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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닌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

사람 사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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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낭여행 중인 유리 씨. ‘인도’라는 뜻의 수어를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쉬웠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새롭게 뜨는 해를 바라보며 도전을 꿈꾼다. 멈추지 않고 도전하는 청년 노유리 씨의 이야기를 2023년 첫 호를 읽는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자신의 인생을 롤러코스터라고 비유하는 그녀는 찬란한 20대를 보내는 농인 청년이다. 매일을 모험처럼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녀는 아시아농아청년캠프, 세계농아청년캠프 등 세계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은 그녀는 얼마 전 바디프로필 촬영을 통해 유리 씨의 빛나는 시기를 기록했다.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나 가는 유리 씨의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
 
청인이 되기를 강요받았던 어린 나날
“엄마가 장난감을 사준다고 약속해서 따라갔는데 그날로 수술대 위에 놓였어요. 인공와우 수술을 받게 된 것이죠.” 농인인 유리 씨는 10살 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받게 되었던 인공와우 수술에 대해 본인 인생에서 경험한 첫 번째 ‘어려움’이라고 표현했다. 10살이 될 때까지 수어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국어를 바꾸어야 했다. 어제까지 한국어를 쓰던 사람에게 오늘부터 영어만 써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과 비슷했다. 인공와우를 착용하고 학교에 가니 또래 친구들이 유리 씨가 아닌 와우를 먼저 보기 시작했다. 본인도 껴보겠다며 뺏어가는 친구들과 다툼이 지속되어 견딜 수 없는 괴롭힘이 이어지기도 했다.
 
친구들의 괴롭힘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 수술의 이유를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던 지점이다. 청인인 유리 씨의 부모님은 농인인 딸이 청인들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공와우 수술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였다. 거액을 들인 수술인 만큼 유리 씨도 부모님이 속상하시지 않게 와우를 착용하려 하였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와우를 착용할 때마다 늘 머리가 아팠고 다치지 않게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는 점이 가장 신경 쓰였다.
 
“저는 지금까지 수어를 잘 쓰면서 살아왔고, 수어가 좋고 편한데 와우를 착용해야 할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만약 병원에서 저희 부모님한테 인공와우 말고 수어의 선택지도 같이 주셨다면 결과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유리 씨는 청인 부모가 농인 자녀를 처음 낳게 되면 가장 많은 의지를 하게 되는 곳이 병원이기에 병원에서 부모들에게 다양한 선택권을 제시해야 하는 중요성을 강조했다. 재활의 관점에서 보면 농인들은 청력 기능을 상실한 것이지만, 이 기능 없이도 소통이 가능한 ‘수어’가 있기 때문에 여러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수어를 사용하다가 제가 나중에 조금 더 커서 잘 듣고 싶어진다면 그 때 와우 수술을 하거나 보청기를 착용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이 부분에서 자기결정권이 반드시 보장되면 좋겠어요.”
 
농사회에 녹아들며, 인생의 전환점이 시작되다
“너무나 힘들었던 제 어린 시절은 청인이 되기를 내려놓으면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유리 씨는 모든 것이 청인들의 기준에 맞추어진 삶에 적응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중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농인 학생과 선생님들이 모인 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유리 씨를 ‘말을 못하고 못 듣는 사람’ 이 아닌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바라봐주었다.
말을 못하는 사람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배제가 익숙한 환경이었지만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에겐 새로운 일들이 주어지고 펼쳐졌다. 유리 씨는 이곳에서 비로소 움츠러져 있던 꽃잎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독후감 대회, 정보화 대회, 체육대회 등에서 상을 휩쓸면서부터 그의 도전과 모험은 시작되었다.
 
오늘의 아름다움을 바디프로필로 기록하다
유리 씨의 수많은 도전들 중 스스로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도전은 바디프로필 촬영이었다. “바디프로필을 찍게 된 계기는 엄마의 사진이었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부터 극심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빠져있었는데 어느 날 엄마의 사진이 큰 위로로 다가왔어요. 사진 속에서 싱그럽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엄마는 마치 일기를 쓰듯 매일을 추억으로 기록하시던 분이었어요. 하루가 선물처럼 소중하셨던 분이지요.” 사진 속 어머니의 당당한 모습은 유리 씨를 다시 일어서게 하였다.
 
▲ 유리 씨의 어머니
 
바디프로필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헬스장에서 개인PT를 받기 위해 트레이너와 소통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했다. 수어를 사용하는 트레이너를 찾기는 쉽지 않으니 동네 헬스장을 찾아가 속기 통역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을 요청하였다. 트레이너는 에이유디사회적협동조합에서 지원하는 속기사와 통화를 하며 동작을 지시하고 유리 씨는 실시간으로 속기사의 타이핑을 보면서 동작을 익혔다. 때로는 음성이 문자로 전환되는 기능을 제공하는 어플을 사용하기도 했다. “처음엔 헬스 전문 용어를 따라가는 것이 어려웠어요. 영어도 많고 처음 들어보는 단어이다 보니 속기를 보면서도 의아한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도 트레이너 분이 제가 배운 동작을 잊지 않도록 사진을 찍어서 계속 공유해주셨어요. 나중에는 제가 혼자서 그 사진을 보며 운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거죠.”
 
유리 씨는 이후 바디프로필을 촬영할 땐 수어통역사의 지원을 받았다. 촬영은 시간제한이 있어 자세 하나하나 지도받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동작을 수행해 내기 위해서는 빠른 소통이 중요했다. 유리 씨의 도전 앞에서 장애는 불필요한 수식어가 될 뿐이다. ‘이게 될까?’를 고민하는 단계는 최대한 줄이고 일이 진행되게 하기 위해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리고 본인에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다양한 시도를 하며 찾아 나간다.
 
▲ 유리 씨의 바디프로필
 
청인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제 1원칙, ‘다양한 의사소통의 방식이 있음을 알리는 것’
인간은 대개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유리 씨는 자신의 일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음성언어만이 아닌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저는 카페에 가서 음료를 주문할 때 직원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1잔 주세요’라고 핸드폰에 적어서 보여드려요. 그럼 대부분의 직원들은 제가 농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다시 말로 되묻는 경우가 많아요. 아주 가끔 눈치를 채시고 필담으로 답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그런 분들에게 정말 감사해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농인이어서 듣지 못합니다. 적어주세요’라는 표현을 한 번 더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생기니까요.
 
또 유리 씨가 디자인 회사에 처음 출근했을 때의 일이다. 청인들이 많이 근무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유리 씨는 일찍 출근하여 직원 수만큼 박카스를 사서 일일이 이렇게 써진 메모를 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청각장애를 가진 노유리입니다. 저에게 천천히 말해주시거나 필담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리 씨가 다른 이들의 세계를 확장해 준 덕분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일을 진행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유리 씨는 반려견 ‘사랑이’를 기르고 있다. 기자는 유리 씨에게 ‘사랑이’와의 소통방식을 물었지만 이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 씨의 모국어는 수어이니 ‘사랑이’와도 수어로 소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는 ‘앉아’, ‘일어나’도 모두 수어로 훈련을 받아왔다.
 
반려견 ‘사랑이’와 수어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유리 씨는 예전보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진 사회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이야기한다. “얼마 전에 인도여행을 하면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 한 분이 저한테 ‘저도 현지인이랑 소통하기 힘든데 유리님은 농인이라 소통하기 더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가끔 농인이 말을 하면 청인들이 깜짝 놀라서 ‘너 농인 맞아? 어떻게 말을 해?’라고 되묻을 때가 많아요”. 모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잘 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온 말들이다.
 
유리 씨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굳어버린 이 ‘전제’에 균열을 내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전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는 세계일주를 하며 세상의 다양한 사람 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일을 꿈꾼다. 한 사람의 단편적인 면모만 바라보면 그 사고 안에 갇혀버리기 십상이다. 유리 씨가 담아올 전 세계인들의 풍성하고 다양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넓혀줄 우리의 세계가 기대된다.
작성자글. 김영연 기자 / 사진제공. 노유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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