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보이고 들리던 것들을 흰 종이에 그려내 세상과 마주하다 : 고유선 작가 > 사람 사는 이야기


나에게만 보이고 들리던 것들을 흰 종이에 그려내 세상과 마주하다 : 고유선 작가

사람 사는 이야기

본문

 
자신만의 고유한 선을 그려내는 고유선 작가
 
“도착했어요. 2층에 있으니 1층에 오시면 연락주세요!”
 
인터뷰를 약속한 시간 30분 전, 고유선 작가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취재원을 기다리게 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하니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던 그가 눈을 마주치고는 “기자님이시죠? 괜히 서두르게 한 건 아닌가 걱정했어요”라며 멋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고유선 작가는 2024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인권 동화책 <내 친구를 그렸어요!>의 그림작가다. 작품 활동을 할 때는 본명 고유선 대신 ‘고유한 선’이라는 필명을 사용한다. 정신장애 당사자로서, 그는 자신에게만 보이고 들렸던 것들을 흰 종이에 그려낸다.
 
그림작가로 참여한 <내 친구를 그렸어요!>
다름을 이해하는 데 나의 그림이 도움이 되었으면
 
책 <내 친구를 그렸어요!>는 그림 속 공룡이 살아있다고 믿는 한 아이의 이야기다. 작품 속에서 어머니는 아이에게 “공룡은 없어!”, “부끄러우니 그런 이야기는 밖에서 하지 마”라며 아이의 말을 부정하고 숨기게 한다. 마을 사람들 또한 아이를 보며 수군거린다. <내 친구를 그렸어요!>는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가 겪는 일상적인 이야기인 것도 같지만, 사실은 정신질환의 증상들을 아이의 동심을 통해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 동화책 <내 친구를 그렸어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고 작가는 “저 역시 정신질환을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애정이 가는 책이에요”라며 이 작품이 자신의 경험과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화책의 표지를 애정 깊은 눈빛으로 보며 “많은 이들이 <내 친구를 그렸어요!>를 통해 우리가 가진 각자의 다름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개인작품을 만들며 혼자 작업해 온 고 작가는 동화책 작업을 통해 처음으로 협업을 경험했다. 이번 작업은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저는 늘 제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렸고, 혼자 작업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색감부터 형태까지 세세한 부분을 상의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처음엔 적응이 필요했으나 마무리하고 나니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낸 거에 성취감이 컸어요”
 
또한 동화책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고려해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이 책을 볼 대상이 어린아이들이니까,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단순히 제가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글 작가님이 만들어낸 이야기를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역할이었으니까요.”
 
△ <내 친구를 그렸어요!> 中,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잠시나마 환각, 환청을 잊을 수 있어 몰두한 그림
그림에 담긴 고유선 작가의 경험들
 
고유선 작가가 정신질환을 진단받은 건 그의 나이가 스물셋이 되었던 때다. 그가 성인이 된 후 정신질환을 겪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교류했던 미술 선생님의 부재가 컸다. 작은 규모의 기숙형 대안학교를 다니며 돈독한 관계를 맺었던 미술 선생님과는 일대일로 수업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다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준비하며 익숙한 터전을 떠나고 나를 이해해 주던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니 고 작가는 심리적으로 의지할 곳이 사라졌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며 몸과 마음을 쏟아야 했고,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그렇게 정신질환이 찾아왔다.
 
평소와 달라진 고 작가의 모습에 가족들은 조심스럽게 정신과 진료를 권유했다. 처음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에도 고 작가는 ‘내가 보는 것들이 다 진짜일 거야’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질환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도 필요했다. 처음에는 우울, 환청의 증상만 있었고 이후 점차 환각, 환시, 환촉, 공황장애 등 더욱 다양한 증상들이 그에게 찾아왔다.
 
△ 그림을 가리키고 있는 고유선 작가. 그가 가리킨 그림은 중학교 3학년에 거울을 보고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말들, 보이는 것들, 느껴지는 감각들에 고 작가는 회피할 곳을 찾고 싶었다. 유년기 때부터 항상 곁에 두고, 학창 시절 여러 경진 대회에서 상을 받는 등 취미이자 특기였던 그림은 그에게 도피처가 되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아무런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종이를 채우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증상이 심했을 때는 하루종일 그림만 그리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증상에서 벗어나고자 그린 그림들에는 오히려 그의 경험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제 그림에는 검은 뱀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검은 뱀이 처음 환시를 겪었을 때 봤던 거예요.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환청이 들리니까 다른 소리로 덮어보고자 스피커로 음악을 크게 틀고 그렸던 그림에는 자화상 속 귀 옆에 혼란스러운 터치들로 가득해요. (…) 또 환청과 환시가 심할 때 증상을 떨쳐내고자 옥상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던 당시를 그린 그림에는 제가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던 동선들이 표현됐지요.”
 
고 작가는 자신의 증상을 단순히 병리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의미를 부여하며 그림으로 승화하고자 했다. 그가 작품의 영감을 받는 것도 멋진 풍경, 여행 등 일상적 기억보다 자신이 겪은 증상과 기억들이 많다고 한다.
 
“작품 하나에도 저만 아는 스토리가 하나하나 다 담겨있다 보니까.. 작품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크지요.”
 
△ <15년도 자화상>, △ <옥상의 흔적>
 
정신장애 당사자 대상 미술 교육 진행
다른 이들도 그림을 통한 변화를 경험해봤으면
 
자신의 증상을 마주하는 데 큰 영향을 줬던 그림, 고 작가는 이제 그 그림을 통해 다른 사람의 기억도 어루만져보려 한다. 그는 지난 2024년 ‘회복의 공간 난다’에서 정신질환을 겪는 이들을 대상으로 미술 수업을 진행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집중해 온 그에게, 다른 사람을 살피고 수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제가 그림을 통해 변화를 경험했듯이, 다른 분들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아니었어요. 자신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을 이미지로 표현하면서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죠.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평소 자신이 겪는 증상들, 자신이 보던 세상을 밖에 꺼내기 어려워하는 정신장애 당사자들이 그림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아하시더라고요.”
 
고 작가는 한편 올해도 미술 강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림
더욱 성숙한 예술가가 되고 싶다
고유선 작가는 지난 2024년을 동화책 그림작가와 미술 강의 등 자신에게 도전이 되는 것들을 용기를 내 시도했던 해로 기억했다. 고 작가가 뽑은 계획이자 목표는 더욱 성숙한 예술가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앞으로 그려갈 고유한 선들을 기대한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어떻게 볼지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그림 속 표현들에서도 자꾸 망설이게 됐던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올해부터는 조금 더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작품 활동에 몰두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작성자글과 사진. 동기욱 기자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409호 표지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