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쓰는 게 아니라, 시로 사는 게 시인의 길입니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시(詩)를 쓰는 게 아니라, 시로 사는 게 시인의 길입니다

[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손병걸

본문

<함께걸음>의 이름으로 만나는 ‘사람 사는 이야기’ 주인공들은, 대화의 자리를 마무리할 때면 대부분 이런 한마디를 남긴다. 이렇게 편한 인터뷰는 처음이었다고 말이다. 일반적인 언론의 인터뷰는 항상 ‘정해진 질문’에 ‘미리 정해놓은 대답’을 얻고 떠나는 게 목적이기에, 결과물인 기사를 확인하고 나면 허탈해진다.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다시 풀어낸다면, 미리 기사 원고를 다 적어놓고 찾아와도 괜찮을 만치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은 자신들이 원하는 내용만 골라서 화면이나 지면에 올린다는 의미가 된다.

<함께걸음>은 형식이나 전제조건이 없다. 대화 도중에 담배 하나 태우러 같이 외부로 나가기도 하고, 대화를 끝마친 다음에 건배를 나누고자 술자리로 향하는 일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이런 모습이 편하고 마음 훈훈해지는 이유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사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 위해 만나기 때문이다. 이런 틀에 딱 맞는 인물을 만나게 되어 진정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다. 시인 손병걸 씨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베체트로 시력은 잃었지만, 더 넓은 세상을 가슴에 품고 오늘을 사는 그의 삶을 함께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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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체트 :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은 물론, 구내염을 비롯한 극심한 신체적 통증을 동반하는 베체트는 아직 발병원인이 확인되지 않고 있는 희귀질병이다. ‘베체트병, 베체씨병, 베체트 증후군(Behcet's disease, Behcet syndrome)’ 등 그 병명의 표기 자체도 통일되지 않은 상태다.

 

어린 시절의 기억 - 가난

“1960년대 태어나서 70년대 농촌인 시골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은 비슷비슷하지 않았을까요. 가난은 늘 같이 더불어서 사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직업에 따라서 가족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는지 여부가 달라졌으니까요. 강원도 망상해수욕장 인근에 초구라는 마을이 있어요. 어린 시절의 걸음걸이로는 30분 정도 걸리는 마을이었죠. 지금이야 길이 좋아져서 5분이면 닿겠지만, 소작농이셨던 아버지는 일이 없는 겨울에는 인근 태백에 가서 탄광 일을 하셨고, 오징어배가 뜨면 배를 타고 나가시기도 했죠. 계속 일을 찾아 하셨어요.”

당시 살던 집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외진 골짜기 쪽에 있었단다. 세 채가 그렇게 떨어져 있었는데 손병걸 씨의 집은 그중에서도 제일 높은 곳에 있어서,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는 전기마저 들어오지 않는 집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전설 따라 삼천리’였단다. 해가 저물면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환경 안에서, 그의 어린 시절이 진행됐던 모양이다.

“꿈이라는 건 매번 자꾸 변했죠. 그런데 어렸을 때는 우스갯소리 같지만, 조그만 소형 버스를 사고 싶었어요. 여럿이 탈 수 있는 미니버스 같은 거…. 그런 차를 볼 때마다, 그걸 사서 가족이 한번 여행을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떠올렸어요. 못 가봤기 때문이죠. 어디를 동경한다는 것도 없이 그냥 막연하게 도시락 싸가지고 가서 먹고 불판에 고기를 구워먹고 싶다는 정도의 생각,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행을 간다는 그 의미 자체가 열망이었던 거죠. 가족이 다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그 소망은 가난에 찌든 삶에 대한 탈출구와 같았어요. 거의 유일한 희망이자 소원이었죠.”

하지만 중학교에 와선 ‘학교를 졸업할 수 있을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였단다. 학교에 수업료를 낼 돈도 없을 만치 찢어지게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휴가철이면 해삼과 멍게 등을 직접 잡아 바닷가에 놀러온 관광객들에게 팔곤 했다고 한다. 생존 그 자체를 해결하기 위해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당시의 기억을, 손병걸 씨는 선글라스 속 아득한 시선으로 하나씩 되짚어갔다.

바다와 산이 직접 만나는 강원도의 생활은 언제까지 이어갔던 걸까? 군대를 전역하고 인천 쪽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그 마을 내의 빈 집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아갔단다. 군(軍) 전역이라고? 30대 초반에 베체트를 맞이하게 됐다는 사실을, 그의 어린 시절 회고를 듣는 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디서 복무했느냐고 물으니까, 그의 입에선 뜻밖의 부대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7’로 시작하는, 세 개의 숫자만으로 불리는 특공대에서 3년 내내 현역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적성에 맞는 일은 따로 있다

군복무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사래를 칠 대상으로 떠올릴 그 부대, 일반 보병부대에서 가끔씩 그 부대로 차출되는 이들이 하나둘씩 선택되곤 했는데, 그 부대로의 차출은 곧 ‘죽음보다 더 심한 훈련’을 의미했기에,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런 게 바로 그 부대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이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까 고생을 정말 많이 했더라고요. 남들도 군 생활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제대하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논산이 아닌 강원도 지역으로 현역 입대를 하면 곧장 군부대로 가는 게 아니라, 보충대라는 곳에서 며칠 머물며 복무할 사단을 배정 받게 된다. 그런데 보충대에서 직접 그 특공대로 차출이 됐다면, 그렇게 3년 내내 특공훈련을 받았다면, 당시 손병걸 씨의 체력은 보통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몸 성하게 제대를 한 거냐고 물으니까, 예상했던 대답이 그의 음성으로 흘러나왔다.

“나중에 인공관절로 갈아 끼웠죠. 심한 관절염을 가지고 나왔는데, 의사의 말로는 거기로부터 혈염(血炎: 피로 인해 발생하는 염증)이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더라고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혈염으로 인한 베체트가 훈련 후유증일지도 모른다는데, 그 인과관계를 확인할 길은 없는 거죠.”

제대한 뒤의 첫 직장은 보안경호업체였단다. ‘보안경호’라는 개념이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던 시절, 지금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업계의 대표적인 회사인데, 군대의 추천서를 통해 입사를 했고 2년 정도 근무를 했단다. 그럼 그 다음은 어떤 일을 했을까? 난데없이 ‘신문사’를 운영했다는 대답이 뒤따랐다.

“양복과 바바리를 입고서 주요인사 경호를 서고, 저녁에는 보호 장구를 착용한 채 현장에 출동하며, 각종 상황을 정해놓고 훈련하는 모습은 멋있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경호라는 일은 1년 정도 하면 매너리즘에 빠져요. 똑같은 생활의 반복인 거죠. 허구한 날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회의가 들어 새로운 일을 찾던 무렵에, 독특한 신문을 만나게 돼서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공학도였던 아는 선배가 있었는데, 독일로 유학을 갔던 그 선배가 손병걸 씨한테 신문 하나를 보여줬단다. 독일 현지의 생활정보신문이었는데, 편집이 아주 독특해서 직접 해보고 싶다는 매력을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신문을 만들어 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돈이 없으면 몸을 던져서라도 하자는 각오로 일을 시작하게 됐단다. 지금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생활정보지’라는 새로운 문화가 그때 처음 이 땅에 첫 선을 보인 셈이 된다. 그런데 익숙했던 보안경호 업무에서 신문 제작으로 돌아선 게 적성에는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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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어요. 편집을 해야 하니까 일을 하면서 컴퓨터를 배웠고, 당시 엄청 비쌌던 매킨토시도 들여와서 사용했죠. 편집도 하고 일러스트도 하고, 여기저기 취재도 다니고 배포도 직접 해야 했어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 일을 했던 것 같아요.”

‘정말 재미있었다’는 표현을 말끝마다 덧붙이는 걸 보니, 손병걸 씨는 정말로 적성에 딱 맞는 일을 했던 모양이다. 그 회사가 지금도 생활정보지 업계에서 수위를 달리고 있으니, 회사의 초창기 밑돌을 깔아놓는 데는 그의 힘이 적지 않게 들어가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정말 재미있는’ 일만 계속 이어졌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

“그날은 지금도 기억이 나요. 차를 운전하면서 가고 있었는데, 운전석 앞 유리창이 뿌옇게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쪽에서 닦고 차에서 내려 바깥쪽도 다 닦았는데, 운전석에 앉아도 그 뿌연 상태가 계속 되는 거예요. 다시 내려서 확인해 보니까, 유리창이 아니라 제 눈이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전에도 가끔씩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제 눈의 이상을 확연히 느낀 건 바로 그날의 그 운전석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안과에 갔더니 눈에 백태(白苔: 몸의 열로 인해 눈에 허연 막이 덮이는 증상)가 좀 끼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그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했죠.”

이후로 그의 눈은 뿌옇게 흐려졌다가 맑아지는 과정이 반복되기 시작했단다. 그때까지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혓바늘 돋았다가 가라앉는 정도겠지’ 싶었는데, 어느 순간에 이르자 뿌옇게 변한 게 지워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됐다고 한다. 맑아지는 과정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안과를 다시 찾았더니, 정밀검사를 해보라며 서울의 유명 안과 두 곳을 추천했단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일반적인 진료는 눈이 뭐가 어떻고 이러이러한 증상이라며, 의학적인 용어를 곁들여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추천해 준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고 나니까, 의사가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하며 굉장히 감성적인 언어로 심각하게 분위기를 잡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싶을 정도의 감성적인 언어를 듣고 있다가, 결국 생전 처음 듣는 ‘포도막염’이라는 진단을 받게 됐죠.”

처음엔 끝에 붙은 ‘염’이라는, 염증을 뜻하는 증상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 포도막염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증상이라고 했단다. 이후 계속 통원치료를 받으며 노력했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인하대학병원에서 ‘베체트에 의한 포도막염’이라는 최종진단을 받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눈이 보이지 않게 된게 문제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말 아팠어요. 머리가 통째로 터질 것 같은 거예요. 입 안의 혀가 오뉴월 논바닥 갈라지듯 찢어지는데, 메스(mes: 칼)로 갈라놓은 것처럼 되니까 음식이 들어가면 너무 따가워서 먹지도 못하게 돼요. 아물기는 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게 지속되고, 또 찢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죠.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서 시신경을 아예 죽이기로 하고 수술까지 받았지만, 그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단다. 그럼 그걸 어떻게 견디며 산다는 건가? 익숙해지는 거란다. 예전보다 완화된 것도 아니고 그 고통에 아예 적응이 된 것도 아닌, 완화와 적응이 함께 가미된 상태로 살아가게 됐다는 것이다. 대신 약은 전혀 먹지 않기로 다짐했단다.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곤 했는데, 온 몸이 붓는 부작용뿐 아니라 내분비 기능까지 이상이 생길 게 두려워 약 자체를 완전히 끊고 지내게 됐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정말 재미있게’ 일을 하던 인생에서 ‘정말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각장애 1급으로 삶이 돌변했는데, 그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을까.

“다섯 단계라고 하죠. 모든 환경이 갑자기 완전하게 뒤바뀌면,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그렇죠. 그 다음에는 ‘괜찮아질 거야, 그래, 괜찮아질 거야!’ 그러다가 포기하는 어느 순간에 들어서면 ‘왜 하필 나야?’ 그 단계를 넘어서면 ‘살아서 뭐해!’ 하는 자포자기, 그 다음 마지막엔 ‘그래도 살아야지, 어떡할 거야?’ 그리고 나선 적극적으로, 일부러라도 성격을 강하게 마음먹고, 일부러 행동도 강하게 하려는 과정을 겪게 되죠. 하지만 느닷없이 쓸쓸해지는 순간은 반복적으로 찾아들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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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것

장애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다시 일어설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뜻밖에도 손병걸 씨는 굉장히 빨랐다고, 1년 정도 걸린 것 같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애써 간단하게 생각하려 했단다. ‘죽을래, 살래?’, ‘죽을 거냐, 살 거냐?’의 문제 앞에서 죽을 거면 딱 끝내버리고, 살 거라면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선택을 스스로에게 강요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미련으로 자기 자신을 계속 괴롭히는 게 더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다시 일어서서 시작한 건 무엇이었을까? 직장을 계속 다니는 일이었단다.

“OOO닷컴 본사에서 교육부 팀장을 맡았어요. 오랜 경험이 있으니까 직원관리와 인성교육, 상담 등의 분야를 담당하게 된 거죠. 하지만 모든 게 문제였어요. 혼자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으니까요. 결정적인 건 출퇴근이었죠. 인천에서 서울 강남의 남부터미널 인근까지 오가야 하는데,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태워주고 내릴 때 받아주는 모든 게 도움이 필요한 거잖아요. 처음엔 도와주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정도였지만, 이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까 도와주는 사람들의 사생활이 저로 인해 침해당하는 경우가 계속 생기는 거예요.”

그래도 5년 넘게 팀장의 역할을 맡으며 직장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엔 혼자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결론은 문학이었고, 그 중에서도 ‘시’가 손병걸 씨의 다음 생으로 결정됐단다. 한 인생 왔다가 가는 거, 돈에 관해서는 자유로워지자는 것! 문학을 향한 꿈은 오래 전부터 간직하고 있었고, 90년대 초반 컴퓨터 통신 시절에는 적극적으로 문학 활동에 참여한 바 있었기에, 게다가 생활정보신문을 할 때도 계속 썼던 게 시였기에, 가지고 있던 기득권 모두를 내려놓고 시 하나로 살아가기로 최종결정을 내리게 됐다 한다.

그렇다면 시력을 잃은 것도 인생에서 바닥을 친 거지만,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도 또 하나의 바닥을 치는 게 아닌가? 맞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스스로 다 내려놓은 거지만 자포자기가 아니고, 문학의 길이라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거라는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등단 과정에 연연하지 않고 문학으로 살아가다가 2003년에야 <솟대문학>으로 사회적 개념의 등단을 했고, 신춘문예라는 과정을 한 번 더 거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손병걸 씨의 삶 이야기는 그 대목에서 현재에 이르렀다. 시인으로 산다는 게 숙명인 것 같은지, 아니면 그것도 하나의 과정인 건지 물으니까, 그의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숙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멈춤 없는 과정을 가고 있다고, 놓지 않을 시의 인생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의 오감(五感), 그러니까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중에서, 시각이 가지고 있는 감각의 중심이 90% 이상 되는 것 같아요. 모든 것에서 시각을 빼고 나니까, 갑자기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지더라고요. 관찰의 힘을 잃고 나니까, 문학인데도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죠. 이건 이 세상이 얼마나 시각에 매몰되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거예요. 시각 자체가 패권(覇權)이 되어버린 거죠. 화려한 시각적 매체가 바로 자본의 폭력인데, 더 자극적이고 더 몰입하게 만드는 시각패권이 모두를 매몰되게 만들고 있어요. 그래서 저의 문학적 화두는 ‘시각적 패권주의’에 반대한다는 ‘반(反)’을 앞에 붙여서 ‘반시각적패권주의’라고 부릅니다.”

스스로를 ‘반시각적패권주의자’라고 칭한 손병걸 씨는 문학을 대하는 이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조언이 있단다. 문학을 부르주아의 산물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문학이 내면에 대한 통증으로 가지 않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외피 가꾸기로 흐르는 것 같아 많이 안타깝다고 한다. 작품의 깊이보다는 문장 자체에 멋을 내는 게 좋은 문학이라는 경향이 갈수록 확대되는데, 휘황찬란한 행사용 문학은 결국 내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그의 지적은 밑줄을 쳐놓아야 할 대목이었다.

“‘시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문답은 아주 간단하게 끝납니다. 기능으로 만나지 말고, 자기 삶과 만나야 해요. 자기 삶과의 접점을 만들어 끌어안아야 하는 거죠. 시의 영역 역시 멋진 단어와 눈에 띄는 문장을 만들려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그건 진정한 시 작품이 될 수 없어요.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겁니다. 시를 쓰려고 하면 기술적인 내용으로 갈 가능성이 많아지는데, 시를 살아버리면 살아가는 그 자체를 옮기면 되는 거니까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죠. 체험에 대한 진실과 진정성에 충실해진다면, 자기 노출 같은 보여주기식의 문학은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시를 절대 쓰지 마세요. 시로 사는 게 진정한 시인의 길입니다.”

 

“시는 쓰는 게 아니라 사는 겁니다.

시를 쓰려고 하면 기술적인 내용으로 갈 가능성이 많아지는데,

시를 살아버리면 살아가는 그 자체를 옮기면 되는 거니까 개념이 달라지는 것이죠.

시를 절대 쓰지 마세요.

시로 사는 게 진정한 시인의 길입니다.”

작성자글·사진 채지민 객원기자  natali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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