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변화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 사람 사는 이야기


사회의 변화는 작은 배려에서 시작된다

대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손홍일

본문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라고, 시험에 꼬박꼬박 나오던 내용을 무조건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신대륙이 되는 걸까? 그 땅에 대대손손 원래부터 살고 있던 주민들한테는 외지인들의 침략일 뿐인데 말이다. 이게 바로 서양의 역사교육을 서양인들의 시선 그대로 물려받은 유학생들(지금은 원로 교수님들이겠지만)이 주입받은 관점이다. 유럽에서 볼 때는 신대륙이지만 원주민의 눈에는 침략자가 분명하고 당연한데, 우리는 그동안 신대륙이라고만 외워왔던 게 한쪽의 시선만 옳다고 교육 받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문학 작가들 이름에 왜 백인들만 등장하는지 의문을 갖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지도교수에게 물었단다. ‘흑인문학이라는 건 없냐’고, 또한 ‘흑인문학을 전공할 강좌는 없냐’고. ‘있다!’는 교수의 대답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결정했다는 ‘그’의 삶을 들어보기로 했다. 얼마 전 <보통이 아닌 몸>이라는, 대중의 시선이 아닌 장애 자체의 시선으로 문화를 파헤치는 화제작을 번역 출간한 대구대학교 손홍일 교수가 이번 호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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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애라고?

성장장애 6급이라고 판정을 받기는 했는데, 늘 애매한 상황에 놓인단다. 키만 작을 뿐인데 몸 어디가 안 좋은 것도 아니고, 말하기와 듣기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팔과 다리를 못 사용하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데도 그게 장애로 판정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해답이 성장장애 6급.

“대학에서 장애인 고용, 뭐 이런 증거와 자료가 필요하니까 등급심사를 받아보시는 게 어떠냐고 계속 요청하더라고요. 그래서 종합병원에 갔더니, 담당하던 의사분이 더 곤혹스러워하는 거예요. 가시적인 장애유형은 보이지 않는데, 외견상으로는 지적할 게 없으니까 저의 신장 크기로 장애를 판정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판정을 내리던 그 의사분도 저 같은 경우의 신장장애는 처음 등급을 내리는 것 같았어요.”

굳이 장애판정을 받을 필요를 본인 스스로도 몰랐다고 했지만, 그 상황이 장애가 맞다는 증거는 얼마 전에야 공개적으로 자신의 몸에 나타났단다. 목의 디스크가 빠져나오면서 척추를 건드리게 됐고, 그 때문에 정말 큰 수술을 작년에 받아야 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목 디스크를 일일이 긁어내야 했기에 그의 표현 그대로 ‘엄청’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 성장이 멈춘 그의 몸에는 필연적으로 드러날 증상이었다는 것이다.

“이게 성장하고 관계가 있대요. 일정한 성장이 계속 진행되며 성인의 몸 형태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저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크기의 신체조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잖아요. 그래서 디스크가 신경을 건드리는 증상이 신장장애인한테는 많이 일어난다고 해요. 정말 심한 분은 척추 전체 마디마디마다 전부 디스크가 퍼져서,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지내야만 해야 한다니… 장애로 인한 증상이 맞기는 맞는 셈이죠.”

1995년 정식 교수로 임용된 뒤 7년 정도 지난 후에야 장애판정을 받았다는 건, 그 이전에는 단지 성장이 멈춰 키가 작을 뿐 그게 장애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저만 작아요. 집안 식구와 친척 일가 전부 다 일반 성인의 키인데 저 혼자만 작은 거죠. 그래서 작은 키에 대한 민감함 같은 게 있긴 했지만, 그걸 장애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 이후로는 평생 키 번호 1번.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것이란다. 글을 잘 써서 글짓기대회에 매번 입상을 하곤 했는데, 한번은 소년한국일보에서 주최한 대회에서 최고상을 받게 됐단다. 그래서 시상식에 참석해서 호명을 받고 단상으로 향하는데, 사회를 보던 진행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아휴, 너무 작은 학생이 지금 올라오고 있네요.” 수십 년이 지나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의 키를 스스로 의식하며 지내왔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장점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동기들 모임에선 누구나 저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거죠. 제가 대전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아주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이 서로를 확인할 때 꼭 이런 대화부터 나눈대요. ‘야, 너 대전고등학교 ◯◯회냐?’ ‘응.’ ‘그럼 너 손홍일 알고 있냐?’ ‘어, 그래.’ ‘반갑다, 친구야!’ 다들 그렇게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거예요.”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교수님한테는 가장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내용이 분명할 질문을 던졌다. 공부는 잘했느냐고 말이다. 진짜 잘했단다. 공부하는 걸 원래 좋아했는지 다시 물으니까, 달리 할 게 없어서 공부에 매달리게 된 것 같다고 한다.

“그런 거 있잖아요. 어떤 콤플렉스 때문에 다른 한 우물을 파는 것 같은 거 말예요. 어린 마음에도 제가 ‘남들하고 좀 다르니까, 키가 작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겠구나’, 이게 아주 뚜렷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공부다!’ 그런 마음으로 굉장히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좋아했던 과목이 그때부터 영어였단다. 잘 알던 분 중에 영어선생님이 계셨는데, 그가 중학교에 진학한다고 하니까 ABCD 기초부터 아주 자세히 가르쳐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영어가 참 해볼 만한 대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됐단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면, 사춘기 시절을 보내는 데는 큰 문제 같은 건 없었을까?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제가 친구 복이 있어서 그런지 잘 지냈어요. 친구들이 제가 키가 작다는 걸 거의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잘 대하고 도와줘서, 저한테는 그게 큰 복이었던 거죠. 사춘기는 대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갑자기 뒤늦게 밀려와서, 그때 정말 심하게 방황을 하게 됐어요.”

공부 잘하는 이과생이었기에, 당연히 의대 합격을 모두가 기대했단다. 담임선생님도 손홍일 학생이 떨어질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하실 정도로 자신 있게 의대를 지원했는데, 정말 어이가 없는 면접을 보게 된 게 화근이 됐다고 한다.

“의대 면접을 하던 분이 그러는 거예요. 의사는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을 할 수가 없다며, 저의 키를 문제 삼는 거였어요. ‘수술 할 수 있겠냐?’ 그때 너무 당황해서 그 충격으로 아무런 대답을 못했는데, 결과는 그 면접에서 떨어지고 만 거죠.”

그 대학 총장이 직접 손홍일 학생과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단다.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불합리하게 불합격 처리했다는 걸 학교 차원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봉합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일단 결정이 난 거니까 이걸 무리하게 뒤집을 순 없겠고, 대신 총장 직권으로 원하는 과를 보내주겠다. 그러니까 원하는 과를 가라. 소송 같은 거 하지 말자. 복잡해지지 않겠나.’

장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대학 측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학교의 문이 잠기던 시절, 부모님은 소송을 준비하셨고 담임선생님과도 긴 대화를 나누며 대책을 마련했단다. 결론은 원하는 과를 가자는 걸로 매듭지어졌고, 이과생임에도 평소에 좋아하던 영어영문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됐단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해서 그 대학을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어 재수를 시작했는데, 엄청난 갈등과 방황이 그때 일순간 그를 덮쳐버렸다고 한다.

대학 진학이 아닌 다른 길을 권할 만큼 부모님의 걱정이 커졌고, 그는 매일 술에 젖어 살며 뒤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그 즈음에 보내게 됐단다. 재수를 끝내며 지원했던 상위권 법대는 면접이 아니라 실력 때문에 떨어진 것 같다며, 그는 영어영문학을 다시 택하게 된 과정을 덤덤히 설명했다.

“대학 4년을 마치고 고향 인근의 고등학교에 영어선생님으로 갔어요. 저는 교직생활을 시작하는 게 좋았는데, 문제는 어린 학생들이 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선생님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거죠.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학생들 앞에서 어떻게 할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항상 수업이 딱딱하게 진행되기만 했죠.”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

그런 상황에서 1년 반 정도 지내다 보니 이 생활을 계속할 게 아닌 것 같아, 다른 출구를 모색하던 중에 유학이 눈에 들어왔단다. 그때가 1982년이었는데, 마침 국가 규제에 묶여 있던 유학이 자율화되던 시기와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국가에 외화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국가시험을 치러서 합격자에 한해 1년에 3백 명 정도만 유학을 갈 수 있던 사회 환경이었다.

공부는 더 하고 싶고 유학이 그 대안인 것 같은데, 금전적인 문제나 정보 부족 등의 이유로 갈등만 계속하던 중에 하나의 자극이 찾아들었단다. 잘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유학 갈 집안 형편이 전혀 아닌데도 유학을 결정하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열악한 환경임에도 유학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그 용기에 감탄하고 자극을 받아, 손홍일 씨 역시 결론은 유학으로 내려졌단다.

“유학의 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막막함, 그리고 학교를 선택하는 문제 등 여러 가지 난관이 쌓여 있어서 1년 정도 시간이 필요 했어요. 정보는 말 그대로 알음알음 얻게 된 거죠. 그 여자 친구한테 저도 유학을 가고 싶다고 연락하니까, 이러이러한 대학이 있다며 각 대학을 소개한 자료들을 복사해서 보내준 게 큰 도움이 됐어요. 원하는 학교가 눈에 확 들어오는데, 신청을 하려고 알아보니 수업료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어서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됐죠.”

그래서 그런 현실을 부모님과 상의하게 됐는데, 아버지께서 대뜸 로터리(Rotary Club)라는 데서 교환학생을 선발해 1년 정도 보낸다고 하니 거기에 지원해 보라 하셨단다. 새롭게 생긴 대안에 기대를 걸고 신청을 했더니 결과는 합격! 그의 호칭이 영어선생님이 아니라 로 ‘로터리 장학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장학생이 돼서 미국 캔서스의 한 대학에서 1년 공부를 했는데, 그쪽 로터리 회원이 제안을 하더라고요. ‘기왕 이렇게 공부하러 온 거니까, 학위를 받고 가는 게 어떻겠냐. 기간을 연장해 주겠다.’ 그래서 영문학 석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게 됐죠.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려는데, 석사 준비를 할 때 읽었던 작품 하나가 계속 마음에 남는 거예요.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라는 작가가 쓴 작품인데, 그 작가가 흑인이었던 거예요. 그 이전까지는 흑인문학이라는 걸 전혀 접해보지 못했는데, 흑인작가가 존재한다는 건 엄청난 관심사로 제게 다가왔거든요.”

처음 접해본다는 건 전혀 다른 관점과 마주치게 됐다는 걸 의미한다. 간단하게 풀어본다면, 지배계층이었던 백인의 시선으로 묘사한 게 아니라, 피지배와 인종차별을 받던 흑인들의 관점에서 등장인물의 내면과 작품의 구성을 이끌었다는 게 완전한 신세계였단다. 180도 다른 관점에서 인간관계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그 시점이 손홍일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

“미국문학에 흑인작가가 있다는 건 충격과도 같았어요. 제가 키가 작다는 시선 속에 살아왔던 탓인지, 상대적 약자였던 흑인작가의 관점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이걸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을까 싶어 지도교수한테 물어봤어요. 흑인문학만 전공하는 과정 같은 게 있느냐고요. 그런데 있다는 거예요. 저는 별 기대감 없이 물었는데 아이오와의 한 대학을 추천 받게 됐고, 저는 좀 독특한 경우가 되겠지만 두 번째 석사학위를 그 아이오와 대학에서 받게 됐어요. 흑인문학을 전공으로 한 국내 1호 인물은 아마도 제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작은 배려 = 가장 큰 격려

미국학으로 박사과정까지 마친 뒤 1993년에 귀국을 했고 95년에 정식 교수로 임용될 때까지, 그에게는 논문을 쓰든 강사 지원을 하건 교수 지원을 하건 간에 항상 하나의 꼬리표가 따라다녔단다. 왜 하필 흑인문학이냐는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문학은 당연히 백인문학이 전부였고, 흑인문학은 대놓고 경시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미국이 아니라 한국의 학계를 의미한다.

“당시는 미국에서 영문학박사를 받아오면, 돌아오자마자 교수가 되던 그런 시기였거든요. 특히 현대문학 전공자는 상한가를 치던 때였죠. 강사 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서울의 모 대학에서 현대영문학 전공 교수를 초빙한다는 광고가 났어요. 그래서 지원을 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 전화를 하신 분의 음성은 지금도 지워지지가 않아요. ‘서류심사가 다 끝났는데 1위로 올라가셨으니까 가볍게 마음 드시고 오세요.’ 한마디로 됐다는 거죠. 그래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면접을 갔더니, 총장 면접이 아니라 이사장 면접이 있다는 거예요. 자리에 앉으니까 삐딱한 자세로 마주앉은 그 이사장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칠판에 쓰든 뭐든 수업이 되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실력과 능력의 가중치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손홍일 씨한테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잊을 만하면 다시 반복이 되고, 다시 언급되고, 다시 결격 사유로 등장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단다. 정작 그가 장애판정을 받은 건 2002년 전후였는데도, 이 사회는 이미 그를 장애인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씁쓸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서류심사 1위가 이사장 면접으로 탈락되는 부조리한 사회, 그 이름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현재 재직 중인 대구대학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만족을 한단다. 특히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남다른 학교이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강의를 하고 연구 활동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편의시설의 배려가 실제 느껴지느냐고 물으니까 확실하게 느껴진단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말해달라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책상 높이를 조절해 주겠다는 거예요. 저는 평생을 만들어져 나온 책상에 저를 맞추며 살아왔거든요. 그런데 제 몸에 책상을 맞추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학교 측에서 먼저 알아서 해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에요. 제가 수업하러 들어가는 강의실 교단도 높이를 조절해줬어요. 그러니까 느끼게 되는 거죠. 장애인을 위한 이런 이해와 배려가 사회 전체의 몫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장애인이 장애를 느끼지 못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잖아요. 삐딱하게 앉아 말 한마디 툭 던지던 그 이사장의 학교와 우리 대학을 비교한다면 당연히 후자가 장애인들이 원하는 환경이 되는 거죠. 마음가짐의 차이예요. 커다란 사회의 변화는 어려운 게 아니에요. 마음만으로도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하니까요.”

손홍일 교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 중에 장애를 가진 학생들은 얼마나 수강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여러 유형이 있었단다. 전동휠체어를 탄 최중증의 뇌병변장애학생이 있었고, 시각장애와 청각장애학생들도 여럿 있었단다. 궁금증이 하나 더 더해졌다. 영어영문학은 언어가 기본인데,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은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

“저는 장애특성에 따라 학생들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방안을 늘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그 평가라는 건 사실은 제가 가르쳐 준 것을 얼마만큼 소화했느냐, 그것만 확인하면 되는 거잖아요.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죠. 리포트를 써서 제출하라는 식으로 왜 똑같은 잣대로 획일적인 과제와 평가를 내리는 건지, 그건 교직사회에서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예요. 비장애학생들한테는 리포트가 한 방법일 수 있고, 장애학생들은 여러 방식으로 평가를 해요. 저한테 직접 와서 얘기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고, 앞에 언급했던 최중증장애학생의 경우에는 그 학생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활동보조인이 대신 써서 제게 보여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장애가 있는 학생들도 장애를 의식하지 못하며 얼마든지 학교를 다닐 수가 있는 것이죠.”

장애를 의식 못한다기보다는, 그 불편함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얼마든지 크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 획일화된 틀을 벗어나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면, 그 사람이 얼마든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을 수 있다는 것. 손홍일 씨가 강조하는 이 대목은 밑줄을 그어놓아야 할 내용이 분명하다.

 

남은 건 필생의 과업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그의 저서 <보통이 아닌 몸>에 관한 저자의 설명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이 저서는 <함께걸음>이 장애학의 관점에서 별도의 지면을 만들어 책 소개를 할 예정이기에, 책 내용보다는 번역 출간을 하게 된 의의 중심으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문학을 비평하려면 보통 어느 한 지점에 초첨을 맞춰야 하잖아요. 그 초점은 보통 주인공, 사회적인 이슈, 또 요즘 활발해지고 있는 페미니즘과 같은 대목에 주로 맞춰집니다. 그런데 문학작품에 장애인이 적지 않게 등장하는데, 장애인에 초점을 맞추는 문학비평은 없는 거예요. 여자가 등장하니까 페미니즘에 초점을 두며 연구하고, 흑인이 등장하니까 흑인에 초점을 맞추는 흑인문학비평이 나오는데, 왜 장애인에게 초점을 맞추는 연구는 없을까. 아예 대상에 되지 않는다는 거죠. 장애를 가난과 약자의 상징으로 언급만 할 뿐, 장애 자체에 초점은 안 맞추고 있는 게 우리 문학과 문화의 현실이에요.”

아주 단순한 예가 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에서 일곱 난장이를 중심으로 풀이한 서평이나 연구가 있었던가? 흑인문학이 당당한 주류의 장르로 자리매김을 하는 세계적 추세인데, 장애인은 왜 중심에 서지 못하고 ‘장애’라는 하나의 상징을 하나의 장식품처럼 취급 받아야 하는 건가.

“번역한 저서 다음으로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이 있는데, 문학작품에 나타난 장애인의 이미지에서 부정적인 게 있다면 그걸 집어내야 하지 않을까, 저는 그 대목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한 교수님과 의기투합이 돼서, 부정적인 장애인 이미지를 다룬 한국작품들을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요. 내년 3월 전후에 공저(共著)로 논문 형태의 책을 출간할 예정이고,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담은 작품들을 계속 찾아내고 선별해서 시리즈로 출간할 겁니다. 이게 제 나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작업이 아닐까 싶네요.”

그는 겸손의 의미로 ‘마지막’이라 표현했겠지만, 마지막이 아니라 필생의 역작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필생의 역작, 천근만근의 무게감을 담은 그 저서들이 전집으로 한데 모아질 그날을 미리 기원해 본다. <함께걸음>은 당연히 응원의 지면을 펼쳐놓을 것이다.

작성자채지민 객원기자  natalir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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