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당연한 게, 우리에겐 가장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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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의 행글라이더 동호회와 함께 토함산에 올라갔던 건 1983년 8월 7일. 그날의 추락으로 ‘그’는 그때까지 가장 부풀어 오르던 인생의 꿈을 모두 접고, 5년 동안 칩거하며 죽음의 꿈만 꿨다고 했다. 그가 세상으로 다시 나온 건 5년 뒤인 1988년이었고, 그때부터 그의 삶은 모든 걸 세상 안에서 진행했단다.
‘그’가 1988년부터 뚫고 나아갔던 30년, 그 기간은 월간 <함께걸음>의 창간과 30년 역사와도 우연처럼 일치한다. 30주년 특집호에 초대할 인물로 ‘그’는 대안 없는 1인처럼 다가왔기에, ‘그’가 헤쳐 왔던 30년을 개인적인 삶 이야기와 함께 듣기로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그’의 이름은 박경석이다.
장애인권의 마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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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어느 호칭이 더 마음에 드는지부터 물었다. ‘개인적’이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그는 교장선생님이 더 편하단다. 20년 넘게 노들장애인야학을 책임지고 있으니, 그의 표현 그대로 ‘장기집권’만큼 애착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공적인 자리에서의 발언과 의견은 차고 넘치도록 접해왔지만,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아주 오래된 질문 몇 가지가 있어서 그걸 먼저 꺼냈다. 역사에는 ‘만약에(if)’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 궁금증 없이는 살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1983년 8월 7일의 그 사고가 없었다면, 그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저는 지향성이 명확했기 때문에, 어떻게 살 거라는 생각은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어요. 저는 배를 탔을 거예요. 외항선원이 되고 싶었죠.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고, 해병대를 지원해서 갔다 온 이유가 되기도 해서, 아마 지금까지 바다 위에서 사는 사람으로 살고 있었을 겁니다.”
대구 사람이던 그가 5년의 칩거를 벗어나,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원에 들어간 건 컴퓨터를 배우기 위해서였단다. 컴퓨터가 미래의 유망직종이라 하니까 어머니께 용돈 드리는 아들이 되고자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웬걸, 인생은 줄을 잘 서야 한다는 걸 뒤늦게 체감하게 됐다고 한다. 장애인권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떠나간 박흥수 열사와 정태수 열사를 단짝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당시의 강의실이 컴퓨터 교육에만 전념하는 수강생들뿐이었다면, 그래서 장애인권운동 같은 건 아예 접하지도 못하고 수료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사업을 하건 뭐를 하든, 아마 꽤 성공한 장애인이 돼 있지 않았을까요? 아주 열심히 일하며 살았을 겁니다. 떼돈을 벌었을 거예요. (웃음) 다만 현장운동이나 장애계 친구들과는 만날 일이 없는 인생이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는 건, 그의 아버지가 하셨다는 독특한 용돈 지급방식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7남매를 키우시던 아버지는 용돈을 절대 현금으로 주지 않고, 실타래와 같은 물건으로 대신 주셨다고 한다. 섬유염색업의 성공으로 생활은 넉넉했지만, 워낙 구두쇠이셨기 때문에 현금 아닌 물건을 주시는 게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나가서 팔든 교환하든 현금으로 만들라는 의도인데, 어린 박경석은 그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고 한다.
“저한테 장사를 시키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실을 주시면 저는 교복 집에 가서 팔아 돈을 받았고, 가끔씩은 염색약을 드럼통 통째로 주실 때도 있었어요. 그걸 자전거 뒤에 싣고 가서 팔면 돈이 꽤 됐죠. 따로 용돈이 필요하면, 극장 앞에서 껌 같은 걸 팔아 충당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사업이나 장사를 했다면, 큰돈을 벌며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다는 겁니다.”
박경석 교장은 어느 자리에서든 바다 얘기가 나오면, 아주 짧게라도 시선이 아득해지곤 한다. 어릴 때부터 시작됐고, 젊은 시절 타올랐던 그 꿈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 전해진다. 누군가 사진 편집용 포토샵을 잘하는 이가 있다면, 박경석 교장 머리 위에 선장의 캡틴모자와 중후한 파이프 담배를 입술에 합성해서 이미지 한 장 만들어 그에게 선물하면 어떨까 싶다. 지금 그의 외모 자체가 이미 대양의 바다 위에 머물고 있는 마도로스(외항선 선원)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떠올리는 기억들
“당시엔 장애인들이 만날 장소 자체가 없었죠. 서울장애인복지관과 정립회관이 전국에서도 거의 유일한 만남의 공간이었을 겁니다. 지금이야 지역마다 자립생활센터가 활성화 돼 있지만, 당시는 갈 곳이 정말 없었어요. 그렇게 제한된 자리에서 어울리다 보니 의기투합이 됐고, 마음속 얘기를 털어낼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게 됐던 거죠.”
박경석 교장의 인생 얘기에서 빠질 수 없는 두 열사와의 만남 또한, 당시의 이동권 문제와도 직접 맞물려 있다. 정태수 열사와는 집이 가까웠고 박흥수 열사는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어울릴 수 있었지, 지역이 달랐다면 그마저도 힘들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교통수단이라는 게 없었죠. 버스도 없고, 있어도 탈 수가 없고, 버스 노선도 없고, 그렇다고 택시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항상 휠체어를 밀며 움직였지만 동네를 벗어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복지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버스 차고지 옆에 선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늘 어울리며 지냈죠. 그러고 나서 태수가 살던 아파트 단지 정자 같은 데서, ‘장애해방’ 어쩌고 하면서 한잔 더 마셨고요. 이동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거주지역의 범위를 벗어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인데도 그땐 그랬죠.”
박경석 교장은 사람들이 자신을 활달하고 외향적인 성격으로만 바라보는데, 나름 내향적인 면도 많았다면서 어린 시절을 잠시 회고했다. 책 읽는 걸 굉장히 좋아했단다. 집구석에서 혼자 놀 때도 많았고, 집 다락방 같은 데서 혼자의 시간을 가질 때도 많았다고 한다.
“칠 남매 중에서 제가 다섯째인데, 저 빼고 다들 장학금 받고 대학 다닐 만큼 공부를 잘했어요. 큰형은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둘째 형은 교수가 되겠다고, 바로 위의 형은 독실한 신자 집안이라서 목사가 되겠다고 했고, 그러니 배를 타겠다고 하는 제가 우리 가족 중에서는 정체성이 제일 난해한 사람이었어요. 당시는 ‘광주사태’라고 불리던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던 엄중한 시기였거든요. 대학은 전부 다 휴교령이 내려져서 학교를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러다 보니 형제 중 다섯이 대학생이라는 부담을 저라도 덜어내야 했어요. 그래서 해병대를 지원하게 됐던 거죠.”
박경석 교장은 뭔가 농담 같은 얘기를 꺼내려 할 때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원래는 고3을 마치고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했었다며, 쉽게 듣기 힘든 개인사를 언급했다.
“필기시험에 합격해서 면접을 보려고 경남 진해에 내려갔는데, 전날 술 먹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면접을 못 봤어요. 그래서 떨어졌죠. 해병대 있을 때도 사고를 쳐서 영창을 두 번인가 갔다 와서, 동기들 다 제대한 다음에 저는 늦게 제대했거든요. 이것 참…. 그런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웃음)”
그가 사고 이후 5년 만에 세상으로 나오게 된 계기는, 병원에서 알게 된 한 여성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옆 병실로 문병을 왔던 여성이 특수교육과 출신임을 알게 됐고, 그의 설명에 따라 장애인복지관이라는 존재 또한 처음 알게 됐단다.
“저는 그런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요. 그가 소개시켜줘서 만나게 된 분이 당시 서울장애인복지관의 교사였던 故 오길승 교수님이셨어요. 당시는 교사였고, 이후 유학을 다녀와서 교수님이 되셨던 거죠. 초기 면접을 하는 사회복지사 같은 역할을 하셨는데, 그분과의 상담을 통해 많은 걸 알게 됐어요. 복지관이 당시 저의 집과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죠. 거리가 멀었다면…, 아마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예요. 그랬다면 제 인생의 사람들도 만날 수가 없었겠죠.”
우리의 속도에 맞는 세상을 만들자
1991년에 그는 다시 대학에 들어갔단다. 서울 숭실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는데, 강동구 길동의 집에서 동작구 숭실대까지 통학을 할 수 있었던 건 차를 운전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동의 거리가 넓어지니까, 삶 또한 아주 많이 달라진 거죠. 그걸 제가 직접 체감했던 거예요. 장애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건 이동권 문제와 활동보조서비스 문제라는 거죠. 저는 운전이 가능해서 밖으로 나오게 됐지만, 그건 차량 운전이라는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장애인한테만 해당되는 일이잖아요. 노들야학에 다니는 모든 중증장애인 학생들에게 가장 절박했던 문제는 이동권이었고, 이동권이 해결되고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선 그 어떤 장애인권도 개선될 여지가 생겨날 게 없는 현실이었던 겁니다.”
박경석 교장은 어느 특정 시점부터 싸우자는 결심을 했다기보다는, 선배들이나 동료들이 집회를 조직하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경험을 쌓으며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불합리한 점을 직접 제기하면서 개선의 방안을 찾고, 투쟁을 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며 교육하는 과정에서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됐단다. 그 자신감이 쌓이면서 도전했던 게 바로 이동권 투쟁이었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시키는 역량을 키우게 만들었으며, 그 연대의 힘으로 씨앗을 뿌리내린 게 바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제정이었다는 것이다.
“혜화역에서 지하철 리프트를 타던 중증장애인이 떨어져서 크게 다친 일이 발생했잖아요. 지하철 리프트 문제로 서울시와 싸우고 결국은 소송까지 가서 이긴 다음, 서울 지하철의 다른 어떤 역보다 혜화역에 엘리베이터가 가장 먼저 생기게 된 계기가 됐어요. 하지만 다른 역에서 추락사고는 계속 발생했고, 결국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로 중증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말았죠. 그런 참극이 벌어졌는데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안 보였어요. 당국은 꿈쩍도 안 했죠. 그래서 최후의 수단과 선택으로 철로 위에 직접 내려갔던 거예요.”
‘박경석’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이 사회에 처음 알려진 계기는, 2001년 서울지하철 서울역 철로 점거농성이 아닐까 싶다. 당시 그 투쟁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낳은 바 있다. 중증장애인들이 온 몸에 쇠사슬을 묶고 철로 위에서 울부짖던 장면은 방송 뉴스화면을 통해 전국으로 전파됐고, 그들의 행위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던 기득권 사회에 적지 않은 균열을 만들었다. ‘보이지 않음’이 당연했던 중증장애인들이 똑같은 사회구성원이었음을 깨닫게 만든, 중증장애인도 똑같이 외출하고 사회 속에서 더불어 살아야 할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직접 확인시켰던 것이다.
“그렇게라도 싸우지 않으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차별의 문제, 사회복지의 소외와 배제의 문제, 이건 투쟁 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어요. 해결하겠다고 속일지라도, 해결하는 척 보일지라도, 말만 그렇게 할지라도, 소외된 사람들은 수십 년 이상 그 상태 그대로 멈춰 살아야 한다는 거죠. 정부와 관료들은 소외된 약자들이 잃어버리는 시간들을 전혀 안타까워하지 않잖아요. 그렇기에 더욱 절실하게 투쟁해야만 우리의 속도에 맞는 세상 환경을 만들 수가 있는 거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더욱 강하게 연대하며 함께해야 한다는 걸 모두가 스스로 깨우쳐 가게 됐어요. 그것이 바로 노들장애인야학의 존재이유로 서로의 가슴에 새겨지게 된 겁니다.”
노들장애인야학은 야학(夜學)이 아니라 들 야(野)자를 쓴다. 야학(野學)인 것이다. 공부하는 시간대의 의미가 아니라,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학생들의 능동적인 삶을 지향한다. 노들장애인야학의 모든 정신이 ‘들 야(野)’라는 한 글자 안에 함축돼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죄 없는 국민들을 형제복지원과 삼청교육대에 감금시키고 죽음으로 몰아갈 때, 중증장애인들은 그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는 존재였잖아요. 그래서 거리청소라는 미명 하에 만든 게 거룩한 은혜의 공동체인 양 포장했던 꽃동네와 전국 각지의 중증장애인 수용시설이었죠. 일그러지고 왜곡된 그 역사 속에서, 이 땅의 중증장애인들은 갈수록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고 각인되기만 했어요. 우리가 3대 적폐로 규정한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기준 폐지, 수용시설 폐지’는 여전히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그러지고 왜곡된 그 역사 속에서 배제됐던 장애인 인권을 바로 잡기 위한 투쟁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당한 국민으로서, 똑같은 국민으로서 더 이상 이 땅에서 차별받을 수 없다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함께걸음>의 30년이 자신의 30년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박경석 교장은 그 긴 기간 동안의 투쟁과 <함께걸음>과의 오랜 인연을, 떠오르는 기억의 순서대로 하나씩 되새기며 되짚었다.
“그 30년 동안 달라진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이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착취당했고 배제시켰고 소외당했고 가둬서 존재 자체도 몰랐던, 그래서 있는 줄도 몰랐던 중증장애인들이 대중 앞에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거, 그건 30년과 20년 전에는 상상만으로 머물렀던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저는 판단해요. 그건 이동권 투쟁, 교육권 투쟁, 활동보조서비스 쟁취,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은 지난한 싸움이 같이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가능해진 거죠. 하지만 아직은 첫 걸음을 내딛은 것뿐입니다.”
박경석 교장은 일반교육기관과 노들장애인야학의 ‘다름’을 특히 강조했다. 노들은 장애인권과 장애인 권리를 위해 투쟁하며 공부한다. 그리고 내부에서 진행되는 학생들과의 논쟁을 중요시한다. 순수하게 공부하러 왔는데 무슨 투쟁이냐는 반론과 항의가 매번 반복되지만, 그런 논의의 장 자체가 열려 있다는 점이 노들의 가장 큰 장점이자 존재가치라는 것이다. 그런 논쟁조차 못하는, 그런 문제의식조차 미리 선을 긋고 접어두는 다른 교육기관에 비한다면, 노들은 앞으로도 열린 공간임을 지향하며 적폐청산의 그날까지 가열하게 나아갈 거라고 그는 재차 확신한다.
“저는 언론의 크기가 장애인들의 삶의 목소리 크기와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애계 전문 언론이라면 이 땅의 장애인 삶의 현실을 직시하고 파헤치며, 언론의 힘으로 세상에 알려야 하잖아요. 우리들끼리는 알아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걸 우리끼리의 정보 정도로 한정하며 끝내면 절대 안 됩니다. KBS, MBC, SBS, Jtbc 같은 공중파방송들이 일제히 귀 기울이며 심층취재를 할 수 있도록, 장애계 언론이 보다 본질적인 언론의 역할에 매진해야 된다는 거죠. 30년 역사의 <함께걸음>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지난 9년간의 수구보수정권 시절에 위축됐던 장애계 언론이 위축된 그 상태로 타성에 젖어 머물러선 안 된다는, 촛불로 탄생한 새로운 질서에 적극 동참함을 뛰어넘는 본질적인 문제해결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대화의 자리가 마무리된 이후까지도 묵직한 여운을 남겼다.
“저는 노들장애인야학의 진정한 의미를 지식의 교육 하나에 두지 않습니다. 활동자금이 턱없이 부족해서 너무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못했던 게 내내 아쉽기는 하지만, 노들을 운영하면서 후회나 회의감 같은 걸 가져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든 여건을 만들어서, 좀 더 다양한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고 싶습니다. 머릿속의 지식을 채우는 게 전부는 아니죠. 여기 와서 즐겁게 놀고, 같이 밥 먹고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게 최고 아닌가요?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을 만난다는 겁니다. 기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하고 만족합니다. 인생이 뭐 있겠습니까? 다 함께 있기에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면 되죠. 안 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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