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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방] 오아시스, 그 아픔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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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아시스"가 화제다. 뇌성마비 중증장애를 가진 여성과 사회부적응이라는 역시 장애를 가진 남성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인공인 장애 여성을 시종일관 너무 무기력한 인물로 그려 장애 여성들의 비판을 사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영화일 뿐이다라는 전제하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영화속에 그려진 중증장애우의 현실이다. 그 동안 한국영화에서 중증장애우의 현실과 꿈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아시스"에 그려진 중증장애 여성의 현실이 거짓일까? 아니다. 주인공 한공주는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장애 여성이다. 그래서 장애우의 시각에서 "오아시스"에 접근해 봤다.

 

 

장애우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오아시스 2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영화의 속편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장애우 시각에서 봤을 때 영화의 끝이 너무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그래서 그냥 영화로 봐달라고 감독이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아시스를 통해 장애우 현실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분명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은 사람들이 장애우 현실을 잘못 이해할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누구나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장애우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장애우가 무기력하다고 해도 지금 2002년 현재를 사는 장애우들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장애를 탓하며 주저앉을 정도로 그렇게 온전히 무기력하지만은 않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회에는 장애우와 함께 할 장애우 단체가 존재하고 있고, 장애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비장애우도 많다. 한마디로 장애우의 악다구니가 전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닫힌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속편은 이어져야 한다.

우선 112나 119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종두가 공주 말을 알아듣는데, 되풀이해 얘기하면 결국 경찰도 공주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아니면 옆 집 여자에게 하소연하는 방법도 있다. 옆집 여자가 외면하면 문을 열고 기어나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영화가 거기까지 가면 너무 장애우 현실이 처절하게 비쳐질 수도 있지만,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끈질기게 싸우는, 그런 공주의 모습이 현재를 사는 장애우 모습이고, 바람직한 장애우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은 공주의 노력으로 감옥에서 풀려 나온 종두 옆에서 공주가 미소짓는 장면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오아시스는 순수한 사랑이야기 외에도 장애우 현실을 제대로 그린 수작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냐고? 지금 장애우는 결코 영화속 공주처럼 무기력하지 않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20세기 구닥다리 장애 여성은 현실에는 없는 것이다.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사랑이야기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 장면을 제외하고는 오아시스는 현재를 사는 중증 장애 여성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제 영화속으로 들어가서 장애우 현실을 얘기해 보자.

그이의 유일한 혈육인 오빠는 그이 이름으로 분양 받은 아파트로 이사가면서 낡고 휑한 연립주택에 그이를 혼자 남겨둔다. 왜 오빠는 그이를 데려가지 않은 것일까? 아내가 불편해 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뒤치닥거리에 지쳐서? 구체적인 사정은 드러나지 않지만, 어쨌든 오빠와 그의 아내가 그이를 불편해 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이런 가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데에 장애우의 비극이 있다. 장애우를 수용시설에 보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일 정도로 가족 중에 장애우 가족이 있는 것을 불편해 하는 가정이 많은 것이다.

혼자 남겨진 한공주, 그이에게 유일한 친구는 라디오와 거울이다. 닫혀 있는 공간에서 그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종일 라디오를 듣는 일 밖에 없다. 그리고 라디오를 듣는 게 지겨우면 그이는 거울을 통해 상상력의 나래를 편다. 상상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하다. 그래서 외로움의 극한에 있는 사람일수록 상상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꿈꾼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천장에 비쳐진 거울 조각이 나비와 비둘기로 변해 그이에게 다가오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꿈의 연장선상에서, 영화속 중요한 상징인 아기 코끼리와 인도여인이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 양탄자 이야기를 해보자. 이 양탄자가 그이 침대 맞은편에 걸려있는 건 뭘 의미하는 걸까? 추측하건대 바로 지금 그이가 사막속에 놓여져 있다는 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이는 아무도 없는 삭막한 사막속에 혼자 버려져있다. 그래서 외로움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오아시스에 가고싶어 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중증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절대 오아시스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상상속에서는 오아시스에 갈 수 있다. 그이는 누워 그림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면 오아시스에 가서 아기코끼리와 여인과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꿈을 꾸는 것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도 버려진 채 하루 종일 누워지내며 오아시스에 가고싶어 하는 장애우가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혼자 버려진 그이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종두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 영화속에서 사회부적응자라는 장애를 가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나중에 밝혀지지만 종두는 형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온 인물이다. 그리고 뒤집어쓴 죄는 공주의 아버지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교통사고였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알 길이 없는 공주네 가족에게 종두는 말 그대로 아버지를 죽인 원수일 뿐이다.

오아시스가 장애우들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종두가 공주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로 설정됐는데 어떻게 공주가 종두를 쉽게 연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장애우를 무시한 게 아니냐는 지적인데, 지적대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설정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끝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주가 놓여 있는 외로움의 극한 현실을 대비해 보면, 종두가 공주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행악을 끼친 인물이라고 해도 공주는 종두의 손을 잡았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주 입장에 놓여 있다면 주저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종두를 냉정하게 뿌리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외로움이 깊으면 사람을 그리워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공주의 연인이 된 종두는 악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두는 형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 온, 이 야만의 시대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인물이다. 그런데 가족을 위해 희생한 종두를 가족들은 외면한다. 그 점에서는 공주와 처지가 비슷하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형수는 종두에게 말한다. "삼촌이 안 계시니까 집안에 걱정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런 말하면 미안하지만 삼촌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이렇게 공주와 종두는 똑같이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이런 처지의 비슷함이 두 사람을 가깝게 해준 그 무엇이라고 이해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중증장애우도 꿈을 꿀 자유는 있다

영화를 보면 공주는 종두가 있어서 웃는다. 이게 중요하다. 혼자 버려진 그이는 웃음을 잃어버렸었는데 종두로 인해 웃음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이는 또 종두로 인해 잃어버렸던 말을 되찾는다. 말을 건넬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공주는 행복하다. 그이는 종두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죽음 같은 침묵만이 전부였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상상이 아닌 현실에서 그이는 그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제 연인이 된 두 사람에게 공주 집은 갑갑한 장소이다. 그래서 종두는 공주를 휠체어에 태우고 외출에 나선다. 영화 오아시스에는 주인공인 공주가 장애우가 아닌 비장애우로 나오는 장면이 네 장면 있다. 모두 중증장애 여성이 사랑에 빠졌을 때 표현하고 싶은 바람을 담은 장면들이다.

그이는 지하철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연인들이 토닥거리며 장난치는 모습을 본다. 그이도 맞은편의 연인들처럼 비장애우가 되어 종두와 토닥거리며 장난치고 싶다. 종두의 숙소인 정비공장에서는 "어떻게 나한테 화를 낼 수가 있어?"라고 종두에게 투정을 부리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연인이라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장면들이다.

이렇듯 그이는 종두로 인해 장애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불가능했던 꿈을 비록 상상속이지만 가능한 현실로 바꾼다. 영화를 보면 종두가 청계천 고가 위에서 그이를 안고 춤을 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곧바로 오아시스로 바뀌는데 그이의 꿈이 현실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이는 소년이 꽃종이를 뿌려주고 아기 코끼리와 인도여인이 등장해서 춤을 추는 오아시스에서 종두와 함께 춤을 춘다. 그리고 종두와 깊은 키스를 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그이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그이의 꿈에서 그이를 빙그레 미소짓게 했던 바로 그 장면이 아니었을까?

현실에서 장애는 많은 중증장애우들을 옥죄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중증장애우는 아무 생각없이 사는 사람으로 치부한다. 그렇지만 중증장애우도 꿈을 꾼다. 비록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중증장애우에게도 꿈을 꿀 자유는 있는 것이다.

또 한 장면이 남아 있다.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평가하고 싶은 장면, 막차를 놓친 지하철 플랫홈에서 공주가 종두를 휠체어에 앉히고 노래를 부른다. "내가 만일"이라는 제목의 노래, "내가 만일 시인이라면 그대 위해 노래하겠어,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세상에 그 무엇이라도 그대 위해 되고 싶어,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너는 아니 이런 나의 마음을...." 노래 자체가 그이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이는 연인인 종두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장애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그이를 가로막고 있다. 현실에서 중증장애우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이와 똑같은 비애를 맛 볼 것이다. 그 아픔을 생각하면 목이 메일 수밖에 없다.

 

오아시스는 슬픈 영화

오아시스는 사람들의 장애우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기도 하다. 먼저 이웃집 부부에게 공주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들과 시어머니보다 못한 철저하게 무시해도 되는 존재다. 그래서 그이 앞에서 태연하게 성행위를 갖는다. "보잖아," "괜찮아" 라고 말하며 부부는 웃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

또 한 장면, 그이와 종두가 외출해서 한 음식점에 들어간다. 음식점 주인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장사 안 해요. 딴 데 가봐요." 라고 말한다. 종두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뭔데요?" 라고 묻자, 식당 주인은 "방금 점심시간 끝났어요."라고 둘러댄다. 식당 주인이 내쫓고 싶은 사람은 종두가 아니다. 바로 장애우인 그이다. 현실도 영화처럼 중증장애우는 식당에서 밥 한 끼를 먹기 위해 주인의 눈치를 보는 일이 많다.

실제로 그이처럼 밥도 먹지 못하고 사실상 쫓겨난 사례도 있다. 왜 이런 차별이 벌어지는 것일까? 전적으로 식당 주인의 무지에 기인해서 벌어지는 현상일까? 그렇지만은 않다. 문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 머리 속에 장애우는 불편한 존재로 각인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부인할 수 없는 장애우 현실이다. 열악한 장애우 현실이 장애우들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있고, 장애우들을 불편한 존재로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장애우가 불편한 존재라는 인식은 가족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이 오빠는 그이를 버렸으면서도 옆집 여자에게 너를 돌봐주라고 "한 달에 20만원씩 주는데 작은 돈이 아니다."라면서 생색을 낸다. 현실에서 장애우를 수용시설에 갖다 버리면서 "여기는 친구들이 많으니까 집보다는 살기가 좋을 거야, 너를 편하게 살게 하기 위해 가족들이 힘을 보탰다. 자주 보러올게."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오아시스에 그려진 사람들의 장애우에 대한 편견은 그이와 종두가 사랑해서 갖는 성행위가 종두의 강간으로 왜곡되면서 종두가 경찰에 연행되는데, 그 과정에서 절정에 달한다.

형사는 종두에게 말한다. "너 변태지?, 저런 애를 어떻게, 인간으로 이해가 안되네, 야 임마, 솔직히 성욕이 생기데?" 중요한 것은 형사의 이 말은 종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장애우에게 하는 말이다. 형사처럼 많은 사람들은 중증장애우를 성욕이 거세된 존재로 바라보고 있다.

중증장애우들은 심한 장애 때문에 성행위를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설령 성행위를 할 수 있다고 해도 중증장애우와의 성행위는, 무엇이 정상인지는 몰라도, 정상이 아니라 변태적인 성행위로 치부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중증장애우는 인간이 아니라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비장애우들이 바라볼 때는 그이 같이 장애가 심한 중증장애우는 평생 성행위를 한 번도 갖지 않아야 오히려 정상인 것이다. 중증장애우가 감히 성행위를, 장애우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발칙한 짓이다.

이런 장면들 때문에 오아시스는 슬픈 영화다. 그리고 장애우 현실을 너무 정면으로 그려서 장애우 입장에서는 보기가 심히 불편한 영화이기도 하다.

오아시스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중증장애우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영화다, 장애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는 사랑 영화가 아니다. 중증장애우의 고통스런 현실이 녹아있는 영화다. 오아시스는 장애우가 처해 있는 현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 오아시스 그 이후는 뭘까? 그 이후는 어떤 상황이 됐든 온전히 당사자인 장애우들의 몫일 것이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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