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의 힘을 보여준 영화 <워낭소리> 그리고 이충렬 감독 > 문화


진심의 힘을 보여준 영화 <워낭소리> 그리고 이충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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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닷컴]

소는 이미 세상을 떴지만, 워낭소리는 커져만 가고 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개봉 37일만인 지난 2월20일에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관객 숫자를 놓고 <워낭소리>의 성공을 이야기하거나, <워낭소리>에 ‘대박’이란 말을 짝지우는 것은 <워낭소리>의 주제를 배반하는 것처럼도 느껴지지만 어떻든 ‘흐뭇한 이변’임에는 틀림없다. 이토록 많은 동시대 한국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 영화의 힘을 몇 개의 열쇠말로 들여다봤다. 기다림·말·일·관계·소리·생명·눈물·느림 등등. 아마 이 모든 힘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지난 2월8일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광주극장을 찾은 이충렬 감독과의 인터뷰에 많이 기대어 그 힘들을 풀어 봤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반성문 쓰는 마음으로 <워낭소리>를 만들었다"는 이충렬 감독.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다림의 힘

“봉화마을 오막살이에서 할아버지와 그 옆에서 졸고 있는 소를 첫대면한 순간 ‘이거다!’ 싶었다.”
감독의 말에서 첫 대면의 설렘과 흥분이 너끈히 짚어진다.
그때가 2004년 말께. 거의 5년 가까운 세월을 찾아 헤맨 집요한 기다림의 결과였다.

“지금의 농촌의 모습을 닮은 아버지와 소를 찾아 다녔다. 쇠락한 고향을 닮은 소와 아버지가 필요했다. 전성시대를 지나 이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존재의 마지막 몸부림과 헌신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낡고 늙고 장애가 있기에 그 헌신이 더욱 빛날 수 있는.”

만남까지에 긴긴 기다림이 필요했듯 <워낭소리>의 모든 장면들 역시 기다림 끝에 얻어졌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할아버지에게선 금세 사진 포즈가 나왔다. 가까이 갈수록 어색하고 부자연하고 멀어질수록 일상이 드러났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상과 동선을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을 바쳤고, 할아버지와 소가 다니는 길목이나 일하는 들녘에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찍었다. 풀샷이나 롱샷이 많은 이유다.

“핸드헬드(들고찍기)는 아예 생각도 못했다. 대신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멀찌감치서 할아버지와 소, 할아버지와 할머니, 할머니와 소의 관계를 묵묵히 지켜봤다.”
없는 듯 있는 듯, 오래 기다리고 지켜본 끝에 그 ‘관계’들이 화면 속으로 정직하게 들어올 수 있었던 것.

   
말의 힘


#“웃어!”
<워낭소리>를 보고 난 뒤 귓전에 오래도록 쟁쟁 울린 말은 할머니의 말 “웃어!”였다.

아무렇지 않은 이 말은 이삼순 할머니의 삶과 몸과 성격에 힘입어 진정한 카리스마와 웃음을 뿜어낸다. 더욱이 그 말이 뱉어지는 상황은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순간. 두 늙은 부부가 병원에 갔다 오는 길, 비까지 맞아 삼베옷도 얼룩지고 마음도 후줄근히 젖은 채다.

할머니가 삶을 견뎌오고 헤쳐온 방식은 “웃어!”란 한마디 말에도 담겨 있다.
##“오래 살 수 있습니다”라고 수의사가 말했던 ‘오래’는 ‘1년’이었다.
마흔 살 소에게는 ‘1년’도 오래일지 모른다.
하지만 30년을 소와 함께 해온 최원균 할아버지에게 1년은 가혹하리만치 짧은 시간이다.

“소가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던 할아버지가 허허롭게 웃으며 내뱉는 다음 말은 “안 그래”.
“안 그래”라는 담담한 세 음절의 말은 할아버지를 거치는 순간 강력한 저항의 힘을 얻는다. 소를 팔라는 할머니와 가족들의 성화에 “안 팔아” 외칠 때도 그 짧은 세 음절의 말이 갖는 울림은 깊고 크다.

할머니의 말이 지닌 ‘생생한 활기’와 할아버지의 말이 지닌 ‘묵직한 고집’. 그 두 말이 서로를 거들고 있어 <워낭소리>는 소란하지만도 덤덤하지만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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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는 부지런한 사람 잘 만나지 않았습니까? 내가 못 만났지….”
“아이고 누구는 팔자 잘 타고 나서, 싱싱한 영감 만나서 농약도 치는데….”
“나무는 바람이 불문 움직이기나 하지, 저 영감은 코대답도 안해.”
“라디오도 고물 영감님도 고물.”
‘삶=말’이고 ‘말=삶’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삶이 실린 말들은 ‘폼잡지 않고도’ 모두 ‘명대사’다.
“선댄스영화제에 갔을 때 미국 CBS기자가 ‘할머니가 잔소리하시는 게 내 어머니와 똑같더라’고 말하더라. ‘내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래서 고맙다’는 선댄스영화제 관객들의 반응을 접하면서 정서의 보편성을 새삼 깨달은 기회이기도 했다.”

내레이션이나 인터뷰 없이 끌어가는 <워낭소리>.
“할아버지는 귀가 어둡고 일을 방해받는 걸 아주 싫어하셨다. 기존 다큐방식 같은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할머니의 말씀들이 내레이션 역할을 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최상의 선택이 됐다.
사투리의 맛과 힘을 재발견하는 기쁨도 크다. 영화 속에서 사투리는 경상북도란 특정지역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삶의 원형질과 진정성으로 나아간다. 감독 역시 “표준말이었더라면, 어쩌면 할머니의 잔소리가 잔소리로만 들렸을 것”이라고 사투리의 공로를 이야기한다.

   
일의 힘


“그만 때려치와 뿔어라.”
감독이 촬영중 할아버지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란다.
“할아버지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할머니 잔소리하고 저예요. 일 방해하는 걸 되게 싫어하시는데 제 존재가 얼마나 걸치적거렸겠어요.”

할아버지의 삶은 “자나 깨나 맨날 소 자나깨나 맨날 일”이란 할머니의 말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에이구 또 낫 가네 또 낫 갈아” “소 잡을라고 작정을 했네” 같은 할머니의 말에도 할아버지의 일하는 모습은 겹쳐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이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대지에 엎드리다시피, 기어가다시피 밭일을 한다. 그 노동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노동은 타의에 의해(설령 아내나 자식일지라도) 절대 멈출 수 없는, 멈춰질 수 없는 할아버지의 존재 이유고 존재 증명이다.

일 그만하고 쉬셔야 한다는 병원의사의 진단에도 할아버지의 의지는 견고하다. “내 죽을 때까지는 꼼짝거려야 하지.” 발가락 뼈마디가 빠져서 그 상처를 치료받는 순간에도 할아버지의 걱정은 “소 꼴 베러 갈 수 있겠지”이다.

마지막 순간을 앞둔 소와 마주한 할아버지가 코뚜레를 풀어주는 장면처럼, 할아버지에게 일은 죽음을 통해서나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는 것.

   

감독은 “할아버지에게 삶이란 일”이라고 정의한다.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본능이나 습관 같은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다리이자 한몸 같은 소에게도 일을 시킨다는 개념은 없었던 것 같다. 가축이거나 일을 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동일시된 존재랄까. 할아버지는 일을 못하시면 오래 못사실 것이다. 일소 역시 일을 안 시키면 오래 못간다더라. 일을 안 시키면 아 내가 죽을 때가 됐구나라고 자기운명을 예감하고 재촉한다더라.”

용돈 드릴테니 일 하지 말고 편히 쉬시라고 하는 영화 속 자식들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도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한다. “모든 자식들이 똑같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이다. 부모의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거나, 궁극적으로 부모를 위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생시킨다며 더러 자식들을 비난하는 관객들도 있는데, 관객 어느 분의 부모를 찍어도 아마 그 자식은 불효자로 비칠 것이다.”

   
관계의 힘


이렇게 오래고 고요하고 깊은 사랑이 있을까. <워낭소리>는 징상스런 사랑영화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내한테는 소가 사람보다 나아요!”
“이 소하고 내하고 같이 죽을 거래.”
“(소가 죽으면) 장사 치러 줘야지. 내가 상주질 할 건데….”

할아버지의 말 속에 소와 맺어온 평생의 관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감독은 “늙은소와 할아버지, 늙은소와 젊은소, 할아버지와 할머니 등등 삼각 사각관계로 얽혀 있다”며 “할아버지만 빼고 전부 여자다. 어린송아지까지. 그래서 혹자는 멜로영화 여성영화라고도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덧붙인다.

“마누라는 죽어라고 모 심고 나왔는데 보래, 소부터 먼저 챙기잖나….”
“맨날 저래 소 준다고 꼴만 베고 있제.”
“저 놈의 소가 죽어야 끝이 나지, 언제 내 팔자가 피겠노.”

할아버지와 소 사이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할머니의 질투 혹은 원망. 그러나 관계가 일으키는 감정이란 복잡미묘한 법. “우리 영감은 이 소 없었으문 벌써 죽었어. 소 덕분에 살았지”라고 말할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온전히 긍정하고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소하고 내하고는 팔자를 잘못 타고 나서 고생이래”라고 할 때는 소와 더불어 연대를 느끼는 동지다.

“관계에 시선을 두면 마음이 보이겠다고 생각했다”는 감독의 판단이 옳았다. 감독은 “할머니에게선 늙은 소에 대한 일종의 질투도 느껴지지만 그보다 셋은 운명공동체”라고 말한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루하루는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지만,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쌓이는 동안 관계 역시 단층처럼 쌓였다. 소가 죽어 사라지는 순간 쌓여온 관계의 한 축이 무너지고 그 관계의 의미가 관객들 마음 속으로 스며든다.”

영화 포스터에 쓰인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맙다…”는 말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관계맺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바쳐야 될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소리의 힘


“시골(전남 영암)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딸랑딸랑 소리나는 곳으로 눈 돌리면 거기 늘 아버지와 소가 있었다.”
감독은 기억 속의 두 존재인 소와 아버지를 ‘워낭소리’로 불러냈다. 감독에게 ‘워낭소리’는 기억을 현실로 불러오는 주술과도 같은 소리.

“영화 내내 워낭소리는 맥박과도 같이 울린다. 그 워낭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소가 사라진 것을 의미하고 소가 죽음과 동시에 할아버지도 정신적 사망신고를 받는다. 할아버지와 소 사이에 소통의 고리였던 워낭소리는 이제 그리움으로 남는다.”
영화 제목이 <워낭소리>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워낭소리’ 말고도 감독이 이 영화에서 소리에 기울인 공력은 크다.
“어쩌면 비디오보다 오디오를 더 중시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고 진실의 원형질은 오히려 소리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워낭소리, 풀벌레 소리, 빗소리, 할아버지 신음소리, 할머니 지청구 소리, 농기계 소리, 시위대 소리 등등 그 모든 소리들이 합해져 ‘눈감고 봐도’ 농촌현실이 느껴지도록 했다.

   
생명의 힘


“보소, 농약 치소” 란 할머니의 말을 물리치는 할아버지의 논리는 “농약 치문 소 잃고 소 맥이지를 못하고…”이다.
‘생명’ ‘환경’ 같은 말들을 단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도 할아버지는 이미 그 가치들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다. 그 힘은 이 단순한 말에서 나온다. “거 힘들다고 안하문 되는가.”

농약을 치지 않는 할아버지가 골자비 키타진 자바라 같은, 농약회사에서 판촉품으로 나눠준 모자를 쓰고 일하는 장면을 두고 감독은 “‘이상한 몽타주’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장면일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한다. “기계농 대 자연농, 자동차 대 소달구지, 미국산쇠고기 반대 시위와 소달구지 등도 의도한 대조 대비가 아니라 그저 엄연한 농촌 풍경”이라 말한다. 그 엄연함이 성찰을 낳는다.

‘미친 소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모습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탄 소달구지가 겹치는 장면은 할아버지가 병원에 가는 길에 맞닥뜨린 풍경이다.

“그 길목에서 먼저 기다리면서 두 장면이 충돌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은 했다. 소가 그냥 지나치면 그만일걸 다행히 ‘서 주시더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는 상황이 됐다. 시위대도 할아버지와 소를 구경하고 할아버지와 소도 시위대를 구경하고. 동시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소의 두 가지 모습이 비친 것이다. 일꾼이자 친구이자 생명체로서의 소와 고깃덩이로서의 소. 그 간극을 보여주고 싶었다.”

   
올드 파트너의 힘


<워낭소리>의 영어판 제목은 . 감독이 밝힌 작명의 변은 단순명료하다. “소와 농부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파트너였지 않는가.”
또, 주인공 할아버지와 소 사이에는 3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얹혀져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 혼자 워낭을 들고 있고, 소의 발자국이 저만큼 찍혀 있고, 때는 봄이고’ 그 장면은 ‘올드 파트너’가 사라진 빈 자리의 슬픔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올드 파트너를 향한 할아버지의 연민과 애정은 소 팔러 갔던 우시장에서도 확인된다. 턱없이 500만원을 부르는 할아버지.

“할머니나 가족들의 등쌀에 밀려서 갔을 것이다. 제스처는 해보여야 했을 것이니깐. 하지만 우시장에서 고물이나 싼값 취급에 자존심이 무너졌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소는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파트너이자 분신 같은 존재니까. 할아버지가 500만원을 부른 건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최고 높이의 값이었을 것이다.”

관계와 생명에 대해 ‘예의없는 세상’에서 할아버지는 ‘500만원’이란 고집으로 예의를 지킨 것이다.

   
눈물의 힘


먼저 소의 눈물이 떠오른다. 늙은 소를 장에 팔러가는 새벽, 소는 여물을 먹지 않는다. “곱빼기로 했는디 왜 안묵어.” 할머니의 눈물과 소의 눈물이 겹치는 장면이다.

소의 죽음 뒤 장대한 나뭇짐이 끝없이 펼쳐지는 장면에선 내내 참고 눌러왔던 눈물이 급기야 터져 버린다.
“영감 할매 불 때고 살라고 저리 나무 땔감을 많이 해놓고 갔잖아요.”

소의 한생애가 압축된 더미. 어떤 사랑의 증표보다 뜨겁다.
감독은 “울릴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며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소리없는 울음이 고향, 아버지, 어머니, 나를 키워준 소중한 존재들을 돌아보는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느림의 힘

“아마 청와대 계신 분은 이 영화 싫어할 거다. 실용과 효율, 속도와는 반대되는 가치들을 담고 있으니까.”
그 분도 이제 영화를 본 터다. 아전인수격 해석을 내놓긴 했지만.
‘느릿느릿한 할아버지 걸음 소 걸음대로 따라가자’는 마음으로 만든 이 영화를 두고 감독은 할아버지의 느릿느릿하고 정직한 노동의 의미, 효율과 속도에 밀려나는 소소한 것들의 가치를 돌아보길 바란다.

감독이 꼽은 명장면에도 그런 뜻은 깃들어 있다. “나무 해서 돌아오는 길, 소가 힘들어 하자 할아버지는 30년 동안 타고 다녔던 달구지에서 내려 소와 함께 나뭇짐을 나눠지고 걷는다. 소와 함께 느릿느릿 나란히 걸어가는 두 존재의 걸음이 겹쳐지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 느릿느릿 함께 걷는 그 걸음 속에 진정한 동행의 의미가 담긴다.

그리고 광주극장의 힘도 덧붙이고 싶다

“고3 때도 땡땡이 치고 자주 왔던 광주극장에 25년 만에 소 한 마리 몰고 왔습니다.”
그때 그 객석의 고등학생이 이제 감독이 돼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 2월8일 광주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휘황한 멀티플렉스의 시대에 여전히 단관의 고전적 풍모를 지켜오고 있는 광주극장을 재회한 느낌을 그는 “봉화 가서 할아버지와 소를 처음 만났을 때 같다”고 표현했다.

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안 팔리는’ 좋은 영화들을 묵묵하게 틀어온 광주극장은 한눈 팔지 않고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할아버지와 소를 닮았다.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듯 보이지만 자기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광활한 객석에서 너댓 명만 영화를 보는 일도 허다했던 광주극장에 길게 줄지어선 매표 행렬이나 꽉 채워진 객석을 목도하는 것은 광주극장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내 일 같은 경사고 벅찬 감격이었다. <워낭소리>의 힘으로 광주극장도 모처럼 힘을 얻었고, 또 광주극장처럼 흥행과 돈벌이가 아닌 작품성과 다양성을 눈밝게 알아보고 귀하게 대접하는 극장이 있어야 <워낭소리> 같은 영화들이 앞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작성자남신희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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