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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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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이야기]

 

그날 하루

 

 

 

  오전 11시,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는 놀이방에 가고 없으니 하루 중 가장 한가하고 평화로워야 할 시간이다. 설거지니 밀려 있는 빨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원두커피 한 잔에 오래된 음악이 있으면 베란다 흔들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한참을 있을 수 있다. 햇살이 베란다까지 비치면 더욱 좋다. 이마가 따뜻해진다.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다. 하지만 밀린 설거지나 빨래가 없는 오늘 아침 은희는 몹시 우울하다. 손이 아프기 때문이다. 쭉 찢어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대일밴드가 아무렇게나 붙어져 있다. 얼핏 피가 비치는 그곳이 때로는 쑤시고 따끔거린다.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은희는 손바닥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면서 혼잣말을 한다. 혼잣말에 쉽게 익숙해지는 스스로가 신기하다.
  간밤의 소란이 꿈결인 듯 떠오른다. 밤중에 우는 아이, 달콤한 잠이 달아날까 두려운 남편이 시끄럽다고 투덜거린다. 아이는 더 빽빽 울어댄다. 급기야 아이의 머리통을 갈기는 남편, 그래서 시작된 싸움에 살림살이가 날아가고 그릇이 깨진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다. 남편이 내동댕이치신 그릇을 다시 집어던지려다 손을 베인다.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나마 피 때문에 싸움이 멈춘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버릇처럼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은희는 다락에서 오래된 편지 뭉치를 찾아 방안에 흩어놓는다. 결혼 전에 친구와 나눈 편지들, 그 사이에 누렇게 빛바랜 봉투 하나가 부끄러운 듯 웅크리고 있다. 내용물을 꺼낸다. 파리행 항공티켓, 너무 오래 된 데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꺼낸 흔적이 남아 있는 티켓은 날짜가 희미하고 너덜너덜하기까지 하다.
  넌 결혼이 어울리지 않아,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거야. 네 길은 예술가의 일이다. 여기 항공표를 동봉하니 곧장 이리로 오기 바란다.
  메모는 잃어버려 없지만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는 구절, 그 남자의 확고부동한 가치관. 꿈은 자꾸 자꾸만 물을 주고 키워나가야 하는 거야.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 생생하다. 어쩌면 남편이나 아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 문제는 은희 자신이다. 꿈을 상실해버린 소녀. 지금은 없는 텅 빈 그 소녀의 허무. 그것이 불만을 낳는다. 일상의 때가 꼬질꼬질 묻어있는 아줌마가 싫다. 남편과 공연한 일로 싸움을 벌이는 옹졸함이 정말 싫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은희는 불현듯 서두른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외출준비를 한다. 무심코 핸드백에 항공표도 집어넣는다.
  몹시 서둘렀지만 막상 길을 나서면 갈 곳이 없다. 극장도 싫고 쇼핑도 취미 없으며 친구를 만나 맘에도 없는 수리를 떠벌이는 것은 더더욱 흥미 없다. 어쩔까 하다가 그냥 길을 걷기로 한다. 결혼 전에 자주 하던 습관이다. 길을 배회하다 보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마음이 텅 빈다. 고요해진다. 그 고요는 이상하게도 꿈의 기억을 잊게 해 준다. 그것이 좋다.
  하지만 오늘은 길을 걸을수록 꿈의 기억이 더욱 또렷해진다. 손바닥이 따끔거려서인가. 병원 갈 마음도 없으면서 은희는 자꾸만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혼잣말을 한다. 다리가 아프다. 쉴 곳이 필요하다. 순간 눈앞에 우체국이 나타난다. 은희는 우체국으로 들어가 구석 자리에 않는다.
  그때 허름한 남자가 눈에 띄는 옷차림을 하고 우체국으로 들어선다. 검고 주름진 얼굴에   군청색 상의, 붉은 색 글씨를 새겨 넣은 조끼, 게다가 양복자지 밑으로 말장화를 신고 있다. 어딘가 허둥대는 듯한 남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고 집중된다. 남자는 파는 게 분명한 편지봉투를 조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계산할 생각도 않고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우체국 직원이 그 남자를 부른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남자는 소포를 부치고 싶다고 한다. 우체국 직원은 소포를 보자고 한다. 남자는 조그만 상자를 꺼낸다. "이게 뭡니까." "총이에요." 그 남자는 은밀함을 위장하려 한 모양이지만 생각과는 달리 우체국 안의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목소리가 달떠 나온다. 미친 사람일까.
  은희는 얼굴을 찌푸리며 가슴을 움켜쥔다. 그 남자가 "총이에요." 하는 순간 웬지 가슴에 총을 맞은 느낌이다. "제가 총을 하나 샀는데 맘에 들지 않아 총포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총알은 없으니까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우체국 직원이 우표를 붙이고 달아나듯 출입문을 나서는요. 모두 당신 가져요."라며 선심쓰듯 말한다. 그 남자가 남기고 간 돈은 이백원, 은희는 우체국을 나온다. 총알이 심장을 헤집는 듯 몹시 어지럽다. 순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저 허름하면서도 정신나간 듯한 남자를 묘사하고 싶다. 그의 말장화와 우스꽝스런 행동, 양복바지에 어울리지 않는 조끼, 그리고 이 총맞은 듯이 생생한 느낌. 하지만... 은희는 자신이 파리행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그 때문에 소설을 쓸 수 없을 것 같다.
  또 다시 길을 걷는다. 이번에는 어느 지하도다. 마침 그림 전시가 한창이다. 은희는 그림을 구경한다. 모두 형편없는 그림들이다. 그녀라면 이보다는 훨씬 잘 그릴 것 같다. 갑자기 하나의 그림 앞에 붙박힌 듯 선다. 한 사내가 부두에서 그물을 손질한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가 부두의 이미지와 제법 어울린다. 은희는 말장화를 신은 남자를 떠올린다.
  허리춤에 총을 감춘 남자가 그물을 손질하고 있다. 곧 총을 빼들고 "이건 총이에요." 할 것 같다. 그녀는 그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낀다.
  은희는 뛴다. 한참을 뛴다. 다친 손바닥이 욱신거려 더 이상 뛸 수 없다고 느끼고 걸음을 늦추는데 총이에요. 하던 남자가 거짓말처럼 눈에 들어온다. 여행사 간판 속에 그가 있다.   은희는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간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여전히 말장화를 신은 남자가 은희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작고 허름한 여행사라 그런가. 여행사 같지가 않고 동네 문방구 같다. 남자는 문방구 주인같이 느껴진다.
  "저..."
  잠시 쭈뼛거리다가 핸드백을 열어 구겨진 프랑스행 항공표를 꺼낸다. 말장화 남자가 항공표와 은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묻는다.
  "매우 오래된 것이군요. 그래, 무엇을 원하시나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손이 떨린다. 우체국에서는 남자가 이상해 보였는데 이제는 은희가 이상하다. 누가 보아도 그럴 것이다. 은희는 겨우 말한다.
  "이 표가 아직도 유효한가요?"
  말장화 남자가 뚫어져라 은희를 살핀다. 표정이 경직되어 간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고 너그러운 미소로 표정을 바꾼다."
  "여행을 하실 모양이지요?"
  "아니오. 난 단지 새 항공표가 필요해요. 이건 너무 오래 되어서 구겨진데다 또 글씨를 잘 알아볼 수도 없어요. 새 항공표로 바꿀 수는 없을까요?"
  은희는 생각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당황한다. 도대체 이 오래된 표를 새 것으로 바꾼다는 것도 가당치 않지만 새 항공표로 바꾼다 한들 무엇을 어쩌겠다는 것인가. 정신나간 여자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남자는 의외로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라고 하더니 안으로 들어간다. 은희는 가버릴 수도 없고 기다릴 수도 없어 난감하다. 없었던 일로 하고 그냥 가버리자니 말장화 남자가 그녀의 항공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돌려받아야 한다.
  "다 됐습니다. 손님."
  남자가 그녀에게 항공표를 내민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은희가 핸드백에서 꺼낸 바로 그것이다.
  "너무 구겨져 있어 제가 다리미로 다렸습니다. 오늘 날짜로 글씨도 새겨 넣었지요. 어때요? 이제 꼬깃꼬깃한 새 항공표가 되었지요?"
  남자가 환히 웃는다. 미소가 따뜻하다. 은희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있는 항공표를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도 잊은 채 어쩔 줄을 몰라한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하지만 항공표의 더할 나위 없는 빳빳함에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글/ 남상순 (소설가 ‘흰뱀을 찾아서’ 로 오늘의 작가상 수상)

작성자남상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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