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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장애인]독일의 장애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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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다른 표정, 다른 얼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다름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며칠 전 학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려고 할 때 한 학생이 나를 불렀다. 자기는 어느 수업에서 친구들과 ‘차별’에 대해서 주제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에서 인종적으로, 아니면 나의 장애 때문에 차별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난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 경험을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난 후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예전에 의료보험을 들지 못해서 힘들었던 시간이 생각이 갑자기 났다. “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독일어 시험을 합격하고 학생이 된 후 의료보험에 가입하기 위해서 큰 사설 보험회사에 가서 계약했는데 (그때 그 곳에서는 가입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며칠 후 ‘가입할 수 없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래서 그 지점에 가서 물어보니, 중앙 본사에서 가입불가라고 해서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며 미안해 했다.

그 후 나는 다른 사설 의료보험에 들기 위해 여러 곳을 다 가 보았지만, 자기네 보험을 들 수 없다는 얘기만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 보험회사에 갔었을 때 단도직입적으로 “나의 장애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라고 물었고, 그 직원은 조심스럽게 아마 그럴 거라며 ‘당신은 (장애 때문에) 병원에 자주 갈 수 있기에 회사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다. ‘장애 때문에 내가 병원에 자주 간다고? 그것을 어떻게 단정지어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국 나는 의료보험을 들지 못했고, 한동안 의료보험 없이 살아야만 했다. 그때가 내가 독일에서 내 장애 때문에 처음 차별을 당한 경험인 것 같다. 그 기억이 나면서 ‘그것에 대해 얘기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새어 나왔다.

장애를 가진 사람, 동성연애자와 같은 성적 소수자, 그리고 유색 인종에 따른 사회적·심리적 ‘차별’은 그 사람들에 대한 어떤 ‘편견’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 편견들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으며, 또 어떤 학자들은 역사적으로 그것을 이론으로서 증명하려 했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편견’의 사전적 정의는 원래 ‘어느 사회나 집단에 속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 대상(특히 특수한 인종이나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간직하는 나쁜 감정, 부정적인 평가, 적대적인 언동의 총체(總體)’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편견이라고 하면 대부분 부정적인 편견만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 편견 안에는 부정적인 편견뿐 아니라 긍정적인 편견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예로서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시각, 국가에 대한 시각, 자기 자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어떤 사람·사물에 대한 신화를 들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편견의 양면성을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찾아볼 수 있을까? 즉,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편견도 존재할까?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수잔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이라는 책에서 좋은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녀는 질병에는 사람들이 만들어 온 어떤 이미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이미지로 인해서 그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그 이미지를 덮어씌우며 낙인을 붙이게 된다. 그 예로 ‘에이즈’나 ‘매독’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나 어떤 집단에게 내리는 신의 벌로써 이미지화 되어 있고, ‘암’은 고통 속에서 인간성을 없애가는,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 두려움 등이 극대화되어 그 자신도 병에 혐오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고통을 받게 한다는 것이다.

또 손택에 의하면 그 이미지는 정치적· 사회적인 것과 결부되어 있는데, 병들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도덕적·성격적·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 즉 죄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인 것처럼 여기는 인식에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결핵’에 대한 이미지이다. 결핵은 다른 질병들과 달리 성적으로 열정적이 되거나 감성적으로 더 예민해지며 예술적인 능력이 증가하게 되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어떤 질병에 대한 이미지는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역사적·문화적으로 이미지화되어 형성되었음을 수잔 손택은 잘 보여주고 있다.

수잔 손택의 책에서 ‘장애’를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장애’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미국과 유럽의 문화사에서도 같이 발견할 수 있다. 장애학(Disability Study)에서 장애가 역사적·문화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 연구 결과들에 의하면 ‘장애’는 신의 징벌로서 또는 어떤 기괴하고 두려우며 악인의 이미지로 문화 역사적으로 형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 예로 미국과 영국의 Freak Show(19세기 초에 신체적 특이성을 가진 사람들 - 주로 비유럽 사람들로서 거구의 몸을 가진 사람, 하체가 없는 사람 또는 네 발을 가진 사람 등 - 이 소개되어지는 쇼였다.), 또는 여러 영화와 문학 속에서의 장애인들(피터팬의 후크 선장, 지킬과 하이드 등)의 모습은 괴물의 모습으로서 또는 악인으로 나타나곤 했다. 그 결과로 장애우에 대한 이미지는 부정적이고도 공포, 두려움의 대상이며 일반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에 와서 기괴하고 두려운 이미지는 거의 없어지기는 했지만, 장애란 단어에서 사람들은 ‘슬픔’·‘고통’·‘불행’이란 이미지가 여전히 맴돌고 있다. 어떤 산모가 임신 중에 뱃속의 아기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산모는 ‘낙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아니면 의사나 가족, 친구들은 낙태를 권유할 것이다. 그것은 장애 아이를 가진 가족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과 지원체제가 미미하여 그 가족들이 부담해야 할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의 배경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과의 삶은 고통이 수반되는 삶, 슬픔으로 가득 찬 삶, 행복하지 못한 삶이라는 이미지가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독일에서도 임신 중에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면 산모의 90% 이상이 아이를 낙태시킨다는 이야기를,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잘 되어 있는 독일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앞에서 얘기한 의료보험회사의 생각에서도 이러한 생각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과는 의미가 좀 다른 특별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독일 유학 초기에, 어느 날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내 옆에 있는 한 낯선 할머니가 계속 나를 보시더니 잠시 후 내게 다가오셔서 손에 무엇인가 쥐어 주셨다. 그것은 돈이었다. 그 상황에 난 많이 당황했고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나에게 ‘선물’이라고 하며 실랑이 끝에 결국은 나에게 돈을 주셨다.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혼란스러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혼란스러움을 더 가중시킨 것은, 독일에 살면서 그러한 상황을 세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여행 중에 숙박하기 위해 찾아간 조그마한 호텔의 할머니에게서, 또 한번은 크리스마스이브 날 버스 안에서 어느 한 3,40대의 한 여자가 나에게 돈을 직접 주었다. 난 그때마다 너무나 놀랐고,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랐다. ‘도대체 그들은 왜 나에게 돈을 주었을까? 그 의미는 무엇일까? 내가 외국인이라서, 아니면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질문들의 대답을 찾지 못한 채 나의 혼란스러움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 몇 해가 지나고 박사과정 수업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교수님과 박사과정의 동료들은 그 사람들의 행동들에 대해 몇 가지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때 한 친구가 “그것은 아마 그 사람의 장애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거야.” 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 얘기가 나에게는 더 충격이었다. 왜냐하면 돈을 주었다는 것 자체는 문화적인 차이로, 좋게도 나쁘게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학생이 말한 대로 정말로 장애인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나 이미지로 인해서 나에게 돈을 주었다면 그것은 과연 문제가 없을까?

사실 사람들은 그동안 채색되어 왔던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없애기 위해 장애인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미지화를 부각시켰고, 이러한 작업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특히 기독교 내에서 장애나 병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신의 징벌로서의 장애)은 ‘신의 영광이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목적설로 설명되곤 한다.

그리고 장애계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장애의 용어를,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새로운 용어로 바꾸거나 재탄생시켜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요즘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자주 보여지는 장애인의 모습들은 슬픔이나 힘들게 살아가는 고통스럽고 어두운 모습보다는, 장애인들의 밝은 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TV나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은 보통 경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다. 중증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면 밝고 착하고 온갖 어려움에도 장애라는 것을 극복(?)하려고 하는 인간승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장애에 대한 과도한 긍정적인 의미 또는 이미지는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여기에서 그러한 노력들에 대한 비판을 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이미지화가 절대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긍정적 이미지도 하나의 ‘편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본질적은 것은 그 논의의 중심에는 ‘장애’라는 것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애라는 유령(?)은 그대로 남겨둔 채, 그 유령에 부정적이냐 아니면 긍정적이냐 하는 옷만 갈아입힌 것 뿐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보다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 낫지 않냐,”고. 그 얘기는 옳을 수 있다. 만약 이 세상에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없다면, 편견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이미지가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사람이 전혀 그런 이미지에 부합되지 않은 장애인을 만나거나 또는 그러한 긍정적인 편견이 깨졌을 때는, 도리어 더 독한 부정적인 편견으로 옮겨 탈 가능성이 있다.

세상에는 경증의 장애 뿐 아니라 정말로 무거운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중에는 정말로 밝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부터 성격이 모나고 나쁘게 살아가는 너무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내 장애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이미지로 또 하나의 철장을 만들어 가두어 놓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장애를 가지고 있든 가지지 않고 있든 그 사람들은 누구나 다르며, 그 ‘다름’에는 긍정적인 편견도 부정적인 편견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일 생활에서 더욱 느껴본다.

작성자김용진(독일 도르트문트 대학 특수교육 박사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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