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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사랑에서 찾은 나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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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있는 이야기] 올해 가장 가슴 찡했던 일 ①

 

 

너의 사랑에서 찾은 나의 생명

 

 

  올 정축년 연초에 "장애인 먼저"인가 뭔가 하는 운동을 하는 몸 성한 후배한테 멋대가리 없는 제안이 하나 들어왔다. 사회철학을 했으니 장애우에 대한 이 사회의 구조적 편견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철학적 틈을 좀 마련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이 정리한 문제들이란 모두 성한 사람들의 고민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철학 책을 읽으면서 불구의 신체나 정신을 떠올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분석하는 정신현상도 "멀쩡하게 보이는" 신체나 정신에서 "멀쩡하지 않은" 정신이 나타나니 이상하다는 식의 문제가 중심이다. 결국 거기에서도 성한 사람의 자기고민이 문제의 핵심인 셈이다.
  그래도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고 보니 큰일났다 싶었다. 나날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장애우에게 신경 좀 쓰라고 얘기할 여지가 없다. 신경써서 뭐 얻을 것이 있어야 말이지.
  여기저기 장애우 실태에 대한 조사자료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런데 잘 조사해 놓고도 제대로 분석되지 않은 장애우의 삶 구석구석을 마치 퍼즐게임처럼 짜맞춰 보니 진짜 놀라운 정경이 펼쳐진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전국의 약 102만 재가장애우 가운데(비공식으로는 약 4백만 추산) 전혀 외출을 하지 않은 경우(16.6%)까지 포함하여 일주일에 평균 한 번 정도만 바깥 나들이를 하는 비율이 70.5%나 된다. 이 얘기는 국내 장애우 10명 가운데 7명은 바깥 세상과 거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뜻이다. 이런 실태이니 장애우 자체가 문제될 여지가 없다. 문제란 그것을 느낀 사람들이 못견디겠다고 소리질러 표현할 때 비로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는 이 안방살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누군들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추 몸 성한 사람들이 그렇게 고립당할 경우에 빗대어 어줍잖은 분석을 해놓았는데 장애우 활동권에서 과분한 -그렇다고 열광적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반응이 왔다. 이 여파로 나의 생활권에 장애우 작가들이 손수 자기를 표현한 글들이 전달되기에 이르렀다. 어줍잖다고 했지만 내가 추측적으로 분석한 바로는 장애우가 고립된 생활 속에서 원한과 절망을 쌓았어야 옳다. 그러나 나의 이 분석은 상당부분 실증적으로 빗나갔다.
  이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생명", 갖고 싶어도 누구도 주지 않는 "사랑"을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처지에서 표현된 그 생명과 사랑의 모습은 성한 사람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렇게 갖고 싶어하면서도 갖지 못하는 그런 모습의 생명과 사랑이었다. 그런 것은 수많은 유행가에서 오직 자기 위안을 위해 낭비적으로, 그리고 산만하게 표현될 뿐이다.
  그런데 고립된 장애우들은 그런 생명과 사랑을 몸으로 산다. 내버려두면 죽게 되어 있고, 살더라도 사는 것 같지 않다고 외면할 삶 속에서 매일을 이어가는 그런 "생명"은 그 어떤 추한 탐욕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가장 순수한 생명활동이다. 그 안에서 생명은 자신의 감정에 풍부하고도 고마운 체험을 준다.

 

 

조금 아프면 울지만
많이 아프면 울지 못합니다

조금 아프면 죽음도 생각하지만
많이 아프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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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금 아파 울어도 보고
조금 아파 죽음도 생각해 보니
조금 아픈 것은 참 고마운 아픔입니다.

-"조금만 아팠으면", 「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중

 

 

  아프다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고유한 현상이다. 그리고 보통 아픔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쓴 이는 "많이 아픔"과 "조금 아픔" 사이에서 아예 죽음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상태와 죽음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상태를 예민하게 식별해낸다. 그리고 "죽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자신의 그런 처지를 고마워 하고 있다. 이런 마음 속에 그 어떤 욕심이 있을 수 없다. 자기가 가지고자 해서 가질 수 있는 그런 생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생명 안에서 누가 주지도 않을 뿐더러, 자기가 주겠다고 해도 받아줄 사람 없는 그런 "사랑"이 우러난다. 그때 사랑은 단지 자기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즉 사랑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장애우들의 사랑은 그 사랑을 받을 "님"도 들려줄 "말"도 없다. 그런데도 사랑을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음의 유일한 표징이기 때문이다.

  방안에서만 지내니 다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힘이 없어져 나중에는 나가려고 해도 나다니지를 못하고 자리에 눕게 되었다. …내 나이 36살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지내야 하는지 그 대답을 해주실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나의 꿈은 하루라도 빨리 어머님을 더 이상 고생 안시키게 생을 마감하여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며 나라를 사랑하며 나를 사랑하면서 얼마가 되건 조용히 살다 갈 것이다."(박정규 "하루라도 빨리 생을 마감하여 " 중)

  이제까지 철학공부에 매달렸던 나는 니체를 넘어설 자신이 없었다. 인류가 추구한 그 모든 숭고한 가치, 하다 못해 가장 순수한 진리의 추구도 그 밑바닥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도사리고 있다는 그의 독설은 철학한다는 행위의 엄숙함이나 진지함을 송두리째 뒤흔들기에 족했다. 그러나 권력을 부릴 대상도 없고, (종교적 신앙까지 포함해) 모든 인간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당해 의지를 부릴 여지조차 없는 상태에서 죽음이나 절망이 아니라 생명과 사랑이 남는다면, 그런 상태의 생명이나 사랑은 그 어떤 욕심도 끼어들 틈이 없는 생명 그 자체를 위한 생명, 또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이 아닐까. 순수함을 비웃는 데 익숙한 현대의 철학사를 다시 쓰는 일도 결코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충격적인 일은 많아도 감동적인 얘기는 드문 세상이다. 해를 넘기면서 잊은 일은 많아도 내년까지 가슴에 안고 갈 사연은 적다. 해마다 남는 사연이 없으니 남는 인생은 언제 살까.
하지만 요새 충격적인 일들이라는 것은 대체로 나쁜 일이다. 그러다 보니 가슴 찡한 일도  그 파장이 마음섶홈으로 깊이 파일 틈도 없었던 것이 아닐까?
  짧게 짧게 넘어가는 햇살을 본다. 그리고 오랜 동안 내버려 두어 먼지 쌓인 음반 같은 마음 위에 마치 레코드 바늘을 얹듯이 가만히 기억의 바늘을 얹어본다. 그리고 흘러갔지만 영원히 되풀이하여 듣고 싶은 그런 노래처럼 울리게 해본다. 추상개념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철학에서 단지 문학적 수법으로만 취급되는 생명과 사랑에의 소망이 권력에의 의지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의 인간체험임을 확신하게 한 그 사랑의 구절들을, 그리고 내가 하고픈 말을 나보다 더 잘 표현해준 그 사랑 속에서 나의 생명을 찾아준 그 구절들을.

 

혼자이기 싫어서
밤이 있어라

밤은
별이 있어
별이랑 둘이 되니
외로움이 없어라
내 사랑 별주고
별 사랑 내 받고
못다 한
사랑 얘긴
은쟁반에 담았다가
내일밤을 엮어야지

 

-"별이랑 나랑" ,「산골소녀 옥진이 시집」

 

 

글/홍윤기 (숭실대․이화여대 철학과 강사)

작성자홍윤기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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