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할머니의 손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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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있는 이야기] 올해 가장 가슴 찡했던 일 ②
콩나물 할머니의 손장갑
남들에게 얼굴이 알려진다는 것은 연예인으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한 사람의 주부로서는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은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게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나 보다. 그 덕분에 나는 잠깐 볼 일이 있어 동네를 나가거나 가까운 은행을 갈 때에도 화장이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게 되지만, 다행히 우리 동네에서는 연예인이라고 특별하게 바라보지 않아서 편한 것이다.
얼마 전 저녁 무렵 집에서 입는 원피스 차림에 가디건을 걸치고 장을 보러 집을 나섰다. 그런데 시장에 들어서면서 한쪽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동네 시장의 웬만한 사람들은 익숙한지라, 처음 뵙는 그 할머니에게 눈길이 쏠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집에서 직접 기른 콩나물이라며 오가는 사람들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콩나물을 사려고 했던 참이라 할머니에게로 다가섰다.
"할머니, 이 콩나물 직접 기르신 거예요?"
"그럼, 나쁜 건 하나도 안쓰구 내 손으로 직접 키운거지."
대충의 콩나물을 사고 돈을 치르는데 문득 할머니가 물으셨다.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됐나?"
"7시가 조금 안됐는데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럼 이제 꺼내야겠구먼."
할머니는 허리춤에 묶어 놓았던 돈을 넣는 주머니를 꺼내 뒤쪽 지퍼를 여셨는데 나는 할머니가 7시쯤 시간에 맞춰 꺼내놓는 것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하였기에 볼 일을 마치고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오랜 동안 사용해서인지 낡을 대로 낡은 그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뜻밖에도 얇은 종이에 싸여있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손장갑이었다. 할머니는 곱게 싼 종이를 벗겨서 조심스레 접어 주머니에 넣으시곤 곁에 놓여있던 수건으로 손을 깨끗이 닦으신 후 장갑을 양손에 끼셨다.
사실 할머니의 옷차림에 그 장갑이 썩 어울리지는 않았기에 내 궁금증은 더해졌다.
무슨 일인가를 묻는 나에게, 쑥스러워 하시면서 말씀해주신 내용은 이러했다. 할머니가 콩나물을 손수 길러 팔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데 초등학교 6학년인 손자가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에도 저녁때까지 장사를 하시는 할머니가 안타까워 아파트 단지에 전단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비싼 장갑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아직 춥지 않은 한낮을 제외하곤 하루 종일 끼고 있어야 한다는 단서와 함께.
할머니는 손자의 선물을 받고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까지 했지만 그 고운 장갑을 함부로 낄 수가 없으셨단다. 그래서 손자가 올 시간이 되면 그제서야 그 소중한 장갑을 꺼내 곱게 끼신다는 것이었다.
혹여 떨어뜨릴까, 물이 묻을까 조심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왜 그리 고우시던지, 또 내 마음은 왜 그리도 따스해지던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돌아선 뒤 "할머니"하고 부르는 꼬마의 정겨운 목소리가 시장거리에 울려 퍼졌다.
글/최명길 (탤런트 KBS ‘왕의눈물’ 출현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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