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운명에 대하여 > 문화


[짧은 이야기] 운명에 대하여

본문

[짧은 이야기]

 

 

운명에 대하여

 

 

  노파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소리산은 삼십리 길이었다. 소리산을 다녀오면 해가 질 것이었다. 젊었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소리산에 다녀오곤 했는데, 이제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기력이 그만큼 떨어졌다. 하긴 방구석에 하는 일없이 세월을 보내는 둘째 아들이 벌써 서른 다섯이었다.
  노파가 소리산 산밑에 사는 점쟁이를 찾아다닌 지도 벌써 사십 년이 넘은 것이었다.
  맨처음 노파가 소리산 점쟁이를 찾아간 것은 정씨 집안으로 시집온 지 5년이 넘어서였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시집온 지 5년이 넘도록 한 번도 수태를 하지 못했다. 그러자 집안 어른들은 남편을 꼬드겨 다른 여자를 보라고 권했다. 대를 이어야 할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팔자에 자식이 없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었다.
  정씨 집안의 3대 독자인 남편이 그런 소리를 내놓고 하니 그녀는 더욱 바늘 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당신 그러지 말고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만 낳아와요. 절대로 시기를 하거나 원망을 하지 않을테니."
  잠자리에서 그녀가 진심으로 남편에게 그렇게 소곤거렸다.
  "이 여편네가 시방 무슨 소리를 한데여. 자식없는 중도 잘만 살더라."
  남편이 손사래를 치며 아예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애가 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동네 우물가에서 그녀가 한참 채소를 씻고 있는데, 재돌네도 김치거리를 들고 다가왔다. 재돌네는 벌써 아들이 돌이었다. 재돌네와 그녀는 같은 해에 시집을 왔다. 그녀는 이른 봄이고, 재돌네는 겨울철이었다. 그러다보니 시어머니는 말끝마다 재돌네가 부러워 말을 하고는 했다.
  "나한티 아들 낳는 비법 좀 가르쳐주지."
  그녀가 실없는 소리인줄 알면서도 은근히 물었다.
  "비법이 있간디……. 참 누가 그러던디 산너머 처녀 점쟁이가 용하다고 하던디."
  "처녀 점쟁이?"
  "그렇다니까, 기가 막히게 사주 팔자를 잘 알아 맞힌대여."
  재돌네가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튿날 앞산에 해가 떠오르기 전에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산너머란 말만 듣고 금방 다녀올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십리 길도 아니고 삼십리 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처녀 점쟁이라고 해서 열여섯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웬걸 그게 아니었다. 서른이 넘은 펑퍼짐한 몸집의 여자였다.
  "아들 삼형제를 무시를 뽑듯이 죽죽 뽑아내것구만."
  부부간의 생년월시를 말해주자 점쟁이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툭 한 마디를 던졌다.
  "정말로 제 앞에 아들이 있다 그말이지요?"
  그녀가 믿어지지 않아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여자가 귓구명이 막혔다냐 어쨌다냐, 아들 삼형제를 뽑는다니까!"
  점쟁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들 삼형제요!"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가슴이 벌떡벌떡 뛰었다. 처녀 점쟁이를 만나기 전에는 집에 돌아갈 일이 걱정이었는데, 그녀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몰랐다.
  그녀는 대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어머니 방 쪽으로 걸어갔다. 시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할 수 없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남편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여보."
  그녀가 남편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흔들었다. 술냄새가 물씬 났다. 어디서 낮술을 한 잔 한 모양이었다.
  "점심도 안챙겨주고, 어딜 다녀온 거야."
  남편이 돌아누우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직 점심도 안 먹었단 말예요?"
  "그렇다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챙겨올테니."
  "생각없어. 저녁이나 일찍 먹지, 뭐."
  남편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남편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남편의 어깨를 다시 흔들어 댔다. 남편이 눈을 비비며 마지못해 일어났다.
  "무시를 죽죽 뽑아내듯이 아들 삼형제를 낳는대요."
  그녀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
  "오늘 쪽집개처럼 용하다는 처녀 점쟁이가 소리산에 있다는 소릴 듣고 다녀오는 길이에요."
  "정말 소리산 처녀 점쟁이가 한 소리야?"
  "그렇다니까요. 당신 사주팔자에 아들 삼형제가 있다는 거예요."
  "아들 삼형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하던 남편이 금방 흥분이 된 모양이었다. 목덜미와 얼굴이 벌써부터 붉게 올라왔다.
  "그럼 당장 씨를 뿌려야겠구만."
  남편이 앞에 앉은 그녀를 덥썩 끌어안았다.
  "여보, 왜 그래요. 대낮부터."
  "잠깐이면 돼."
  남편이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덥쳤다. 억센 힘이었다. 그녀는 옴싹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대낮에 남편에게 허연 알몸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점쟁이 말대로 그녀는 그 해 여름에 수태를 했다. 그리고 다섯 해 만에 점쟁이 말처럼 아들 셋을 내리 무를 뽑듯이 죽죽 뽑아낸 것이다.
  그 후로 그녀는 산머리 소리산 점쟁이를 까맣게 잊었다. 삼형제 아들들은 말썽없이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다니던 둘째 아들 놈이 그만 트럭에 치어 하반신마비의 불구가 된 것이었다. 그녀는 둘째놈의 앞날이 은근히 걱정이 되어 산너머 소리산 점쟁이를 다시 찾아갔다.
  "아들 삼형제가 자손을 번성하겠구만."
  "둘째놈은요."
  하루아침에 하반신마비가 되어 방구석에서 세월을 보내는 둘째놈이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총각 귀신은 안되겠어. 서른이 넘으면 동북방에서 귀인이 나타나겠구만."
  "귀인이요?"
  그녀는 귀가 번쩍 트였다. 동북방에서 귀인이 나타난다니.
  점쟁이 말대로 큰아들이 혼인을 해서 떡두꺼비같은 손자를 낳았다. 그러나 둘째놈은 서른이 넘도록 동북방에서 귀인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늘 어둑한 방구석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막내 아들놈이 사귀고 있는 여자를 데리고 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막내 아들놈을 설득해서 결혼을 연기했다. 점쟁이 말처럼 동북방에서 귀인이 나타난다고 했으니, 조만간 귀인이 나타나면 둘째놈의 짝을 맞추어 줄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둘째놈 앞에 동북방에서 귀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반년이 지나고 1년이 쉬 지나갔다. 하는 수 없이 막내아들의 결혼을 허락해야만 했다.
  어느새 둘째놈의 나이도 서른 다섯이 넘었다. 그녀의 머리도 반백이 된 것이다. 노파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노파는 산너마 소리산 점쟁이를 찾아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소리산에 다달아보니 웬걸, 산 중턱에 반듯한 도로가 뚫리고 점쟁이집 부근에는 난데없는 주유소가 들어서 있었다. 주유소 앞에 자동차가 두어 대 서 있었다.
  점쟁이 집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다니."
  노파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다 말고 주춤했다.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그렇구나. 동북방에서 귀인이 제 발로 나타나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더 나이가 들기 전에 둘째놈에게 반듯한 기술이라도 하나 가르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들놈이 홀로서기를 하게 되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인을 의외로 쉽게 만날지도 몰랐다.
  "둘째놈이 총각 귀신될 팔자가 아니라고 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노파의 발걸음이 괜히 편했다.

 

글/김금철 (제3회 동양문학상 수상, 소설집 ‘그대 소망하는 것이라면’(97))

작성자김금철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