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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람이 희망입니다

사람이 생각나는 4편의 영화 이야기

본문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영화를 좋아하시는지요?
문득 프랑수아즈 사강의 단편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떠올리게 하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그렇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를 봅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가 있으신지요? 아니면 어떤 영화를 통해 어떤 사람이 생각나시는지요?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랑, 왜 그 영화를 봤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른 법입니다.

사람은 영화를 만들고, 영화는 사람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 카피입니다. 광화문 교보문고 옆 돌비석에 쓰인 글이지요. 모든 영화는 상상력이라는 날갯짓을 통해 우리의 냉혹한 현실을 담고 있는 우물 안 두레박을 닮았습니다. 오늘 저는 사람이 생각나는 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남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1980년부터 현재까지 발표된 영화중에서 사람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합니다.

#1. 인간과 자연-따뜻함은 차가움과 공존합니다

<아타나주아>(Atanarjuat, 2001, 캐나다)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요? 세계 최초로 에스키모에 의해, 에스키모어로 제작된 이 영화(아타나주아는 에스키모 말로 빠른 사나이라는 뜻입니다)는 기획을 포함한 제작 기간만 무려 6년이 소요된 프로젝트입니다.

   

그 자신이 에스키모의 후손이기도 한 자카리아스 크눅 감독은 에스키모 관련 단체로부터의 기금과 감독 자신의 사재를 털어 조상인 에스키모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는 툰드라 지역의 실제 에스키모 거주 지역에서 텐트를 치고 6개월 동안 생활하며, 가능한 선조들의 그것과 비슷한 상황에 그를 위치시켰습니다. 감독의 이런 고집은 헛되지 않아 <아타나주아>는 에스키모 고유의 생활 방식과 관습, 의식 등을 제대로 묘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적어도 날고기를 먹고 얼음집 이글루에 사는 알코올 중독자 정도로 인식되는 왜곡된 에스키모들에 대한 평가를 바꾼 셈이지요. 그러나 이 영화가 단지 에스키모의 과거 삶을 관찰하기만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닙니다.

영화 속에는 아타나주아와 그의 형 아막주아 그리고 이들 형제를 질투하는 오키, 사랑하는 아내, 아이들, 부모님 등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미움, 상실에 대한 분노, 질투, 비열한 복수 등 우리가 느끼는 일상생활의 정서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전개됩니다. 복잡한 다원적 세상의 비열한 숨김이나 가식이 없습니다. 사랑하면 같이 살고 기다리고 죽음을 슬퍼합니다. 미워한다면 화를 내고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단지 6mm카메라 하나로 자연의 빛을 이용해 촬영하였습니다. 직접 에스키모의 고유한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실제로 살아가며 영화를 만듭니다. 놀라운 것은 6mm카메라로 찍은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만큼의 화질이 보장된 것이지요.

설원을 달리는 아타나주아의 모습도 대역 없이 알몸으로 촬영이 진행되었고 얼음 위에 모닥불을 피워가며 추위를 달랩니다.

롱 테이크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편집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지요. 자동차 추적 장면을 촬영하듯이 그저 썰매를 타고 가며 얼음 위를 달리는 아타나주아를 찍습니다. 할리우드의 눈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허구가 아닌 진실을 담고자 하는 사람들의 뜻이 모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공조명, 화려한 분장, 컴퓨터를 이용한 영상기법, 절묘한 편집, 특수효과 등과 같은 인위적 영화 찍기가 이 영화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습니다. 마치 문명 자체를 거부하려는 초자연주의자들의 축제와도 같습니다. 생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모닥불에 손을 쬐어가며 영화는 만들어집니다.

   

이 영화의 깨달음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자연스러움입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나 보는 사람들 모두는 영화가 끝난 뒤 자연을 느끼고 돌아갑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본 날은 영화 10도가 넘어가는 강추위가 휘몰아치던 밤이었지요.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차가움을 느끼면서도 마음은 한 없이 따스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툰드라의 얼음 위를 달리는 상상을 하면서 조심스레 얼음판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영화 속 이글루 안에는 모닥불이 있습니다. 바로 이글루 밖은 영하 30도를 오가는 혹한이 기다리고 있지만 이글루 안은 늘 따스함이 피어납니다.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이글루 안에서 일어나고 나쁜 귀신을 몰아내는 일도 이글루 안의 모닥불이 해결합니다. 투박하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들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많은 일들이 차가움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살벌하게 경쟁해야 하고 장애인들이 매일 겪는 편견은 이들의 마음 속 깊이 차가운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함께할때 따스함은 스며들어 옵니다. 아무리 주변의 차가움이 우리를 도려내려고 해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은 도려내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자연의 따스함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여럿이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나눌 때 세상은 따뜻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아타나주아>는 단순한 에스키모의 과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와 가족들이 살아있고 사랑과 미움이, 복수와 용서가 그리고 따뜻함과 차가움이 공존합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화려하지만 거짓으로 가득한 할리우드의 조명을 받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근대 영화사의 획을 긋는 걸작으로 남을 것입니다.

    #2. 인간과 신-우연을 가장한 필연 속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정녕 신은 존재하는 것인지요? 저는 특정 종교에 대한 신념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는 아닌 유신론자입니다. 절대적인 어떤 힘에 인간은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말의 유희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신과 함께 가라>(Vaya con Dios, 2002, 독일)는 독일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영화였지만, 한국에서는 단 하루만 개봉한 흥미로운 영화입니다.

왜 하루만 개봉했냐하면, 다음날이 바로 매트릭스 2편을 개봉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티칸으로부터 2백여 년 전 파문당한 칸토리안 교단은 유럽에 단 2개만의 수도원이 유지되는 소수 교단입니다. 주에 대한 찬양을 생명처럼 여기고 수도생활의 대부분을 침묵수행과 찬양으로만 보내는 생활원칙을 고수합니다.

수도원 재정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고 갑작스런 원장의 사망으로 세 명의 수도사는 쫓겨나서 이탈리아에 단 하나 남은 칸토리안을 찾아갑니다. 수중에 돈은 물론 없지요. 독일에서 이탈리아까지 걸어서 갈 예정입니다.

젊은 시절 좀 놀아본 벤노, 시골 농부 출신의 타실로, 아기 때부터 수도원에서 성장하고 속세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아르보, 이 세 명의 수도사는 교단의 보물인 규범집을 챙겨들고 먼 길을 떠납니다. 여행 도중 여기자 키아라를 만나게 되고 천신만고 끝에 이탈리아에 도착하게 되는 험난한 여정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DVD로 보게 된 것이 2004년 봄이었고 그 이후 다섯 번을 보게 되었습니다. 유신론자이기는 하나 기독교 신앙이 없는 저에게 이 영화가 반복적으로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반복 강박(사람이 똑같은 실수를저지르거나 동일한 상황에서 반복하는 생각, 감정, 행동 양상을 말합니다)처럼 교회에서의 찬양 장면에 늘 눈물이 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될 때, 가령 사랑해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을 결정할때나, 인생의 방향을 크게 유턴할 때, 무엇이 이런 결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그리고 잠시 머물다 답을 냅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네 멋대로 해라.”

신과 함께 간다는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의미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르보가 혼자 떠나는 장면에서 찬양은 반복되고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결정을 존중하는 용기를 배웠습니다.

어떤 성스러운 영화보다 이 영화가 더 성스럽다고 느끼는 것은 경건함을 가장한 인간의 숙연함을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과 경건함을 가장한 숙연함은 서로의 상반된 면을 본다는 점에서 동일한 패러다임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이 영화를 보면서 함께 울고 공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얻음과 버림은 빛과 어둠처럼 늘 함께 존재합니다.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놓아버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부와 명예, 학문욕과 영향력, 그리고 그 길을 함께 했던 사람들을 남겨두고 새로운 길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외롭고 힘든 여정일 것입니다.

수도원을 떠나는 아르보의 용기와 진실함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수도원을 떠나서도 그는 신과 함께 갈 것이라는 믿음이지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 속에 우리는 살아갑니다. 만난 사람들이 그러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그러합니다.

    #3. 인간과 삶-우리네 삶과 담배연기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계신지요? 요즘은 담배를 끊는 사람들보다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독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홍수처럼 불어나는 금연캠페인과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배를 피우는 당신에게(아직까지 저도 포함이 됩니다) <스모크>(Smoke, 1995, 미국)는 조그만 위안이 되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

브룩클린 7번가에서 담뱃가게를 하고 있는 오기라는 중년의 남자와 아내를 은행강도 사고로 잃은 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는 소설가 폴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담배연기처럼 모아졌다가 흩어집니다. 담배를 여전히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곳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배연기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담배에 손이 갈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여인이 오기의 담뱃가게를 찾아옵니다. 오기의 옛 애인 루비는 그들 사이에 딸이 있었고 그 딸이 브루클린 어딘가에서 마약에 찌들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 딸의 이름은 지극한 행복을 뜻하는 펠로시티(felicity)였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화를 내는 오기와 더 이상 삶을 지탱하기도 힘든 막다른 길의 루비 사이에 진실은 존재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가 진실과 거짓 사이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삶을 살아가는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진다면 혹은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헤어날 수 있다면 그냥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메시지가 이 영화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때론 한 사람에게는 거짓말이 다른 한 편의 사람에게는 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삶의 모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메시지가 있습니다. 일상이 지루하게 반복되지만 조금씩 진보한다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지난 10년간 매일 아침 8시, 똑같은 장소에서 5분 동안 사진을 찍고 있는 오기에게 4천 장의 사진은 모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무심코 사진이 똑같다고 얘기하는 폴에게 오기가 이야기합니다. 천천히 보라고.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한 장 한장 틀리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 햇볕은 매일 다른 각도로 지구를 비추지. 사람도 얼굴이 매일 달라지고 옷도 달라지지.

오기의 말은 사실이었지요. 천천히 사진을 들추던 폴은 죽기 전의 아내 헬렌을 수천 장의 사진 속에서 찾아냅니다. 그리고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폴은 오열합니다. 방안을 퍼져나가는 담배연기와 함께 헬렌의 살아있던 미소가 폴에게 번져옵니다. 이 장면에 웨인 왕 감독은 무려 10분의 시간을 할애합니다. 문득 영화의 프레임이 느리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가 따분한 이유가 그것이지요.

영화의 대사처럼 감독은 관객들에게도 천천히 영화를 보라고 권합니다. 삶의 공허함. 그리고 공허함의 무게. 담배연기의 무게를 재보려는 시도. 이를 통해 삶의 무게를 함께 느껴보는 영화입니다.

    #4. 인간과 인간-절망은 한없이 깊고 희망은 짧은 물결일 뿐입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리시는지요?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삶이 여전히 자신을 속인다고 느끼시는지요? 이 분들에게 권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모든 삶의 주체는 결국 우리들이며, 행복과 희망을 언제나 느낄수 없다는 것을 받아드리도록 권합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긴 지루함과 짧은 행복의 교차점이 연속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두터운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한국)입니다.

임순례 감독은 현 세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감독입니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와이키키’는 2001년 개봉당시 조기 종영에 대한 팬들의 항의로 인해 제작사인 명필름이 다시 영화관과 계약 임대 후 재개봉한 우리 영화사상 처음 있는 팬들의 반란으로 기억되는 영화입니다. 그만큼 중독성을 지닌 영화입니다.

그러나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랑 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집니다.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이번에도 유효합니다.

음악이 좋아 고등학교 때부터 그룹밴드를 시작한 주인공 성우는 20년이 지나도록 중년나이트 클럽에서 불륜남녀들의 블루스 음악을 연주하거나 미인대회 행사장의 들러리 음악 혹은 회갑잔치의 가라오케 밴드로 전락한 3류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살아갑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와이키키 해변에서 세계적 연주를 하자는 친구들의 어릴적 꿈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이 자본의 거대한 침식과 달콤함으로 치부된다면 성우의 꿈은 비키니 뒤 화면에서 플래시백으로 비춰지는 10대의 추억거리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는 밴드의 와해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지켜가려고 노력합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 달리 선택의 길이 없어 보입니다.

임순례 감독이 설정한 플롯은 정확하게 한국사회가 현재 떠맡고 있는 중년 남성의 무력함과 패배,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삶이 고단한 것은 청소년이나 20대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에게는 매일 싸워야할 주제가 있고, 싸움에 대한 목표가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마초적 남성관이 사라진 중년의 남성에게 진정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중년사회가 패배감을 주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싸움이 치열할수록 더 이상 젊은 날의 초상만큼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을 위로하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입니다. 많은 한국의 영화들이 여전히 마초적 남성관을 주제로 생존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비해 ‘와이키키’는 너무 무기력합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성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공식 해산을 이야기합니다. 마초적 남성상의 항복과 무기력을 선언하면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하고 싶은 일하며 살아가는 너는 행복하니?”라는 유명한 대사 속에서도 어디 하나 희망이 묻어나는 증거는 없습니다.

   

임순례의 영화언어는 은유적이며 우리 삶에 정치의 도구가 드리는 것을 배제하고 세대 간의 역할과 연대의식, 남성과 여성이 함께 희망나누기를 담고 있습니다. 환경문제와 공무원 비리 등의 정치적 파장이 영화에 등장하지만, 어느 것도 절망의 성우를 흔들지 못합니다.

다만 오래전 사랑의 대상이었던 인희가 전라도 땅 끝자락에 있는 한물 간 항구도시 여수에서 새롭게 와이키키 밴드의 일원이 되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마초적 남성들의 무기력감을 일깨울 소재로 나타납니다. 여성과의 연대. 새로운 파트너십의 등장은 왜 이 영화의 엔딩이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로 귀결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영화 도입부의 절망은 깊지만 마지막 엔딩은 짧은 희망의 메시지로 끝납니다. 참으로 절묘한 시퀀싱의 조화입니다.

영화 한 편을 음악 파일 하나처럼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이 3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길거리에서 세일되고, 동시대의 문화가 가을 낙엽처럼 흔하게 뒹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문화적 유산들이지만, 사람이나 사물이 지닌 가치보다 광고나 마케팅효과에 의해 지배되는 시대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희망임을 잊지 말자는, 잃어버리지 말자는 빛바랜 구호를 조용히 외쳐봅니다. 여전히 사람이 희망입니다.

그 밖의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들

쉬핑 뉴스(The Shipping News): 미국, 2000
제 8 요일(The Eighth Day): 프랑스, 1995
개 같은 내 인생(My life as a dog): 스웨덴, 1988
라이프 애즈 어 하우스(Life as a House): 미국, 2002
아름다운 비행(Fly away Home): 캐나다, 2000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미국, 1994
사이더 하우스(The Cider House Rules): 미국, 1999
굿바이 레닌(Goodbye Lenin): 독일, 2003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미국 1990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A time for Drunken Horses): 쿠르드, 2004
여섯 개의 시선: 한국, 2002
송환: 한국, 2004
여자, 정혜: 한국, 2004
소피의 선택(The Choice of Sophie): 미국, 1988
박하사탕: 한국, 1998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미국, 1999
아들의 방(The Son’s Room): 이탈리아, 2002
아이리스(Iris): 영국, 2002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 스페인, 2005
라스트 데이즈(Last Days): 미국, 2007
사랑후에 남겨진 것들(Cherry Blossoms-Hanami): 독일, 2008
화려한 휴가: 한국, 2008
굿’바이(Good & Bye): 일본, 2008
아주 특별한 손님(Ad-lip night): 한국, 2009
호우시절: 한국, 2009
날아라 펭귄: 한국, 2009
작성자이영문 (아주대학교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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