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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영문의 영화 읽기]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덴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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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질병이 있다.’ 이 문구는 독일의 철학자 한병철의 걸작 ‘피로사회’의 서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이 시대를 면역병의 시대가 아닌 우울증, 불안증과 같은 정신적 공허감에서 생기는 마음의 병이 만연한 시대로 규정합니다. 그의 탁월한 안목에 정신의학자로서 크게 공감하고, 개인과 사회의 내면구조를 조망하는 식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굳이 정신과 의사의 시각이 아니더라도 현대사회의 성과지상주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마비시켜가고 있다고 예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죽하면 올해 최고의 단어는 바로 ‘멘붕’이라고 불리는 지극히 한국적 단어입니다. ‘멘.탈.붕.괴.’ 정신이 황폐함을 넘어 붕괴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한국 사회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소개할 영화 ‘멜랑콜리아(Melancholia, 2011, 덴마크)’는 지구의 종말이라는 판타지를 빌어 우리 내면구조의 쓸쓸함을 그려내는 최고의 영화라고 할 만합니다. 몇 해 전부터 스스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치유의 철학을 가지고 이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사실 그가 사는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지형학적으로 우울증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는 여건(이를 계절성 우울증이라고 합니다)이지만, 이를 예술의 형식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그들에게 존재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우울(그리스어가 어원인 멜랑콜리아)의 창조적 역설을 의미합니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영화는 시작합니다. 클로즈업된 신부 커스틴 던스트의 얼굴 뒤로 죽은 새들이 떨어지고, 지구를 가리는 거대한 행성이 지나가고, 골프장 잔디에 발이 빠져 걸을 수 없는 엄마와 아기가 나옵니다. 말도 달리다가 주저앉고, 신부의 웨딩드레스는 정글 나무에 걸려 찢겨 나갑니다. 마지막까지 나무껍질을 다듬는 어린 소년이 있고, 그가 바라본 하늘에 행성과 부딪히는 지구가 등장합니다.

   
 

약 8분에 걸친 초반 시퀀스만으로도 영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핵심 주제인 멜랑콜리아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겪는 우울증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지구 종말을 일으키는 거대 행성으로 이 영화에 등장합니다. 2개의 파트로 구분된 영화는 1부의 저스틴(커스틴 던스트 분)의 결혼식 장면과 파경 과정, 2부에서는 그의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 분)의 불안과 공포를 통한 ‘멜랑콜리아’ 행성의 지구 충돌을 통한 지구의 종말을 다루고 있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초호화저택이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오늘의 신부 저스틴은 초반에 행복해 보이고 웃지만, 생색내기 좋아하는 형부와 완벽을 기하는 언니 클레어에게 점차 지쳐갑니다.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하는 신랑 마이클과 독설을 일삼는 냉담한 엄마, 무기력한 아빠 틈에 점차 우울해집니다. 사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을 겁니다. 결국, 결혼에 대한 두려움에 저스틴은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직장 상사와도 회복될 수 없는 관계단절을 낳게 됩니다. 결혼식은 파경에 이르고, 그녀는 언니 클레어를 따라 애마를 타고 골프장 밖으로 향합니다. 하늘에는 푸른색을 띤 아름다운 행성 ‘멜랑콜리아’가 점차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그의 애마 애브라함(아마도 라스 폰 트리에의 장난에 의한 이름인 듯합니다)이 행성의 움직임에 꼼짝 못한 채 주저앉습니다.

절망(멜랑콜리아)에 빠진 저스틴에게 푸른 행성 멜랑콜리아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편안함과 안정을 줍니다. 저는 저스틴을 보면서 인간은 절대적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느꼈습니다. 반면 1부에서 냉정과 침착함을 잃지 않던 언니 클레어는 2부에서 시종일관 불안을 감추지 못합니다. 결국, 형부 존의 자살은 극도의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는 죽음 직전까지 공포감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위장된 허세와 지식으로 관객들에게 행성이 절대 부딪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려고 합니다. 정확히 궤변을 늘어놓는 비겁한 지식인들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절망을 경험해 본 저스틴만이 운명처럼 지구의 종말을 맞이하려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이치에 맞게 가는 거야.” 나지막하게 언니 클레어에게 내뱉는 이 한마디는 저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이 영화는 지구의 종말을 일으키는 ‘멜랑콜리아’라는 거대 푸른 행성이 결국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늘 자리 잡고 있는 내면의 우울(멜랑콜리아)과 같다는 것을 은유합니다. 내면의 갈등과 우울(두려움, 세상에 대한 이치)에 귀를 기울이고, 가짜에 현혹되지 않으며(거대한 자본의 환상, 결혼식) 운명과도 같은 시간의 궤적(영화에서는 이를 매직동굴이라고 부릅니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지구의 종말이 다가올수록 강해지는 저스틴의 얼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영화는 멜랑콜리아의 푸른빛을 받으며 미소 짓는 커스틴 던스트의 나신이 아름다운 영화로 저에게는 기억될 것입니다.

인간은 정서적으로 무너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서고, 인류가 물리적으로 멸종되는 상황에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충돌의 시간을 영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역설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습니다.

작성자이영문 이음병원 정신과 자문의/중앙정신보건사업지&  dung7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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