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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완전한 반(3) 여자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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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빨리빨리, 엘리베이터 왔어."
 아들의 외침에 종종걸음을 치며 뛰어와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집어넣기가 바쁘게 요술상자가 완전히 밀봉되었다.
 그 요술 상자 안에서 한 가족이 즐거운 재잘거림을 하고 있을 때 사르르 문이 열렸다.
 그런데 그들은 그 손님이 마치 함께 타서는 안될 외계인처럼 느껴져 약간 방어를 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그 외계인이 "실례합니다"라고 선언하면서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아이는 엄마 쪽으로 쏠리고 아빠와는 떨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미안했던지 외계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몇살이니?"
 아이는 약간 겁먹은 음성으로 여섯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이름이 뭐야?"
 "최  섭."
 짧은 대화지만 인간의 전류가 흘렀기에 아이는 외계인에 대한 두려움을 말끔히 벗어던졌다. 그래서 그녀 몸의 일부인 휠체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도 아이의 그런 마음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꾸미지 않은 미소를 띄우며 "타고 싶니?"라고 물었다. 아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워줄게."
 아이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면서 아이는 아예 엄마에게서 떨어져 나가려고 했다. 아이 엄마는 그런 아이를 나꿔채며 "이런 건 아무나 타는 게 아냐"라고 아이를 제지시켰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그 작은 공간의 공기는 바싹 말라버렸을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손에 끌려나갔고 아이의 아빠는 아내의 냉랭함에 끌려나갔다.
 "섭이 아침 일찍 어디 가니?"
 "외할머니 댁에 가요."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가?"
 "아빠 차 타고 나가려구요."
 경비원과 섭이가 이런 인사를 나누는데도 섭이 엄마는 목례 한번 안하고 섭이의 팔을 잡아 끌어 차에 태웠다.
 섭이 아빠는 빽밀러로 뒷자석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자기가 언제 끼어들어야 할지 살폈다.
 "당신 아까 너무 했어. 그 여자가 미안했겠어."
 "미안해 해야 해요. 남의 귀한 자식한테 환자들이나 타는 휠체어를 타라고 하는 건 무슨 심보예요?"
 섭이 엄마는 불쾌감이 다시 살아나는지 열을 올렸다.
 "섭이가 타고 싶어했잖아."
 "그 여자가 먼저 타고싶냐고 물었다구요."
 섭이 엄마는 치밀하게 그 여자에게 혐의를 씌웠다. 그런데 그때 섭이가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저기 좀 봐, 아까 그 아줌마야."
 정말 지금 대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그 여자가 빨간색 소형 승용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아니 다리를 못쓰는 사람이 어떻게 운전을 하지. 안 그래요 여보?"
 "손으로만 하는 장치를 부착한다고 들은 것 같아."
 "그래요. 아유 저렇게 차에 앉아서 운전을 하니까 꼭 성한 사람 같네요."
 "그러게 아주 멋있어 보이는데."
 섭이 아빠는 그 여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당신 오늘 운전 조심하세요."
 섭이 엄마는 남편이 그녀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 아니라 아침에 있었던 일로 그날 운세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섭이 아빠는 그 주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여자의 차와 헤어져야 할 때쯤    그는 속으로 아내의 잘못을 짧게 사과하며 언젠가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런데 그날의 일을 모두가 잊을 만한 몇일이 지난 후였다. 저녁 식사를 세 식구가 단란하게 하고 있는데 섭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나 오늘 그 아줌마네 집에 놀러갔다왔다."
 "그 아줌마라니?"
 "있잖아. 안 걸어다니는 아줌마."
 섭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큰 눈동자를 약간 흘겨 보이며 대답했다.
 "응. 그 여자."
 섭이 엄마는 밥숫가락을 입에 넣으며 말을 하느라고 소리가 약간 구겨졌다.
 "그 아줌마, 옛날에는 엄마처럼 걸어다녔대. 교통사고래."
 "그 집에도 아이가 있니?"
 "아니 아줌마 혼자 살어."
 섭이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섭이의 말에 귀를 종끗 세우고 있었다. 그때 섭이가 다시 덧붙였다.
 "아줌마가 심심할 땐 언제든지 놀러와도 좋다고 했어."
 "그건 아줌마가 심심해서 그러는 거야."
 섭이 엄마는 그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말에 뼈가 있었다.
 또 몇일이 흘렀다. 섭이 아빠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입구에 있는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가고 있는데 빨간색 승용차가 눈에 띄었다. 아니 그 여자의 휠체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여자는 휠체어에서 운전석으로 아주 가볍게 옮겨 않았다. 그리고 휠체어를 삽시간에 분해하더니 몸체만 남은 휠체어를 접어 들어올리려 했는데 그 순간까지 그대로 멈춰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뛰어가서 불쑥 휠체어를 집어들었다.

 "트렁크에 넣어야죠"라며 동의를 구했지만 그녀는 "아니요."하는 말과 동시에 아주 가볍게 휠체어를 뒷좌석으로 넘겼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아무 일도 해준 것이 없는 섭이 아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섭이 아빠는 "택시 정류장까지 태워주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떡 본 김에 제사나 지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그 여자가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고 친밀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그녀도 쉽게 응해주며 빈 침묵의 공백이 어색한 듯이 "이 동에 사시나보죠."라고 말을 건넸다.
 "네. 저 섭이 아빠예요."
 "아― 그러세요."
 그녀는 반가운 듯이 섭이 아빠의 얼굴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냈다.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그래서 꼭 한번 뵐려고 했어요. 사과를 드릴려구요."
 섭이 아빠는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에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날 퍼마신 술 덕분에 차를 가져오지 못했던 것이 그녀에게 사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섭이 아빠는 큰 짐을 벗어 던진 것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우리 섭이가 아줌마 집에 갔다왔다고 자랑을 하더군요."
 "그래요. 아주 영리한 아이더군요."
 "말썽꾸러기죠 뭐."
 "방향이 어디세요?"
 그 여자는 섭이 아빠한테 눈길도 주기 않고 물었다.
 "여의도예요."
 "그러세요? 저도 여의돈데."
 "그거 아주 잘 됐군요."
 섭이 아빠는 지나치다싶을 만큼 좋아했다. 그런데 그것은 차를 편안히 얻어 탈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왠지 그 여자와 고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 여자도 그 남자가 섭이 아빠라는 사실에 보통 낯선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차 안에는 음악만 흐를 뿐 별 대화가 없었다.

 여의도가 가까워졌을 때 그녀가 다시 물었다.
 "어느 빌딩이세요?"
 "아녜요, 편하신 곳에서 내려주세요. 택시를 타면 돼요."
 "다 오셔서 택시를 탈 필요가 뭐 있어요. 차는 굴러가는 거니까 말씀하세요."
 그녀는 섭이 아빠를 보고 생긋이 웃었다.
 섭이 아빠도 그녀처럼 웃으며 순순히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이거 죄송해서 어떡하죠. 편하게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이웃끼리 그런 정도야."
 그녀는 미소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녀는 참 잘 웃는 편이었다. 적재적소에서 지어지는 미소가 그녀의 휠체어를 전혀 의식하지 않게 만들었다. 섭이 아빠는 그 미소가 머리에서 지워 지질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날 저녁 잠자리에서 섭이 엄마가 그 여자 얘기를 꺼냈다.
 "여보, 그 여잔 여자 구실을 못한데요. 오줌을 호수로 받아내다지 뭐예요. 그리고 똥도 파내야 한데요."
 섭이 엄마는 큰 비밀이나 알아낸 듯 남편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섭이 아빠는 아내의 입김에서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돌아누우며 꾸짖었다.
 "여자들 정말 한심해. 낮에 할 일들이 없으니까 모였다 하면 남 흉이나 보구. 여자 구실 못하는 것을 갖고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몰아 붙이지 말어. 그 여잔 자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구. 아주 유명한 그래픽 디자이너야."
 섭이 엄마는 돌아누운 남편의 올라간 등을 짓눌러 내리며 "어머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라며 다그쳤다.
 "차를 한번 얻어탔어."
 "언제요?"
 "언제긴 언제야 오늘이지."
 섭이 아빠는 당연한 것을 묻는 아내에게 짜증을 냈다.
 "그래요."
 섭이 엄마는 남편이 편하게 회사까지 갈 수 있었다는 사실에 순간 고마움을 느꼈다.
 "당신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구려. 불편한게 많을 텐데."
 그녀가 이웃이라는 말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나 섭이 아빠는 이렇게 부탁을 했다.
 "미쳤어요? 내가 자선 사업가예요?"
 섭이 엄마는 일격에 거절해버렸다.
 "여보."
 거절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지만 아내의 찬 마음이 남편의 몸을 꽁꽁 얼어붙게 해버렸다.
 "자자구 피곤해."
 또 며칠이 지났다. 그녀 차가 주차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는 섭이 아빠가 즐겨 세우던 곳이어서 다른 차가 세워져있으면 무척 속이 상했었는데 그녀에겐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섭이 아빠도 서둘러 주차를 하고 부지런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휠체어를 앉아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약간 들어올리며 인사를 했는데 섭이 아빠는 그때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을 확실히 보았다. 꽤 미인이었다.
 "아 네, 안녕하셨어요."

 섭이 아빠는 계단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계단 옆에 있는 경사로로 향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나란히 걷지 못했다. 그제야 그 경사로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깨달았다. 평소에는 그 경사로가 무의미하게 느껴졌었고 겨우 생각한 건 야쿠르트 아줌마가 좋겠구나 하는 정도였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경사로를 올라가며 무척 힘들어했다. 경사가 아주 완만해 보였는데도 그녀에겐 벅착 일이었다. 섭이 아빠는 자기도 경사로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랬으면 뒤를 밀어줄 수 있었을 텐데 싶어서 말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또 엘리베이터 속에서 그들은 말이 없었다. 섭이 아빠는 말을 걸고 싶었지만 그녀가 싫어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머리를 짜내 입 속에서 연습한 대사를 발설하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땡땡 하며 올라갈 때마다 초조했다. 그녀는 6층이었고 섭이 아빠는 8층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먼저 내리게 될 텐데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땡 하는 소리에 맞춰 섭이 아빠가 입을 열었다.
 "언제 한번 신세 좀 갚게 해주십시오."
 섭이 아빠가 명함을 내밀었다. 여자를 꼬실 때 하는 말 "커피 한잔해요"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섭이 아빠는 이렇게 각색을 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좋다는 표시인지 괜찮다는 거절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미소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악만 박박 쓰는 아내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아름다움이었다.
 섭이 아빠는 그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섭이가 가끔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말에서 유추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기본적인 모습이 전부였다.
 "엄마, 대학 나왔어?"
 섭이가 TV만화 영활를 보고 있었는데 그 프로가 끝나자마자 뚱단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대학 안 나온 사람이 어딨니?" 섭이 엄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엄마 박사야?"
 "박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아줌마는 박사래."
 그 말에 섭이 엄마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박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사람만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해 놓았는데 그 여자가 박사라니, 그것은 그 여자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되니 말이다. 섭이 엄마는 그 여자에게 그런 위대성을 느끼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 여자는 자기보다 휠씬 아래에 있는 여자이니 말이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자, 무슨 만화 영화를 이렇게 늦게 해. 상업 방소은 윤리도 없어, 손님만 끌려고 하지, 아이들 교육은 전혀 생각을 안한다니까,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구."
 섭이 엄마는 유식한 척을 하고 있었다. 섭이 아빠도 그녀가 박사라는데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지난번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무릎 위에 올려진 가방이 참 학구적으로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때 9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보도 내용 가운데 하나가 장애인 특수학교가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신축 공사를 중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반대를 하는 주민들 인터뷰가 있었는데 모두가 아줌마들이었다. 상스런 모습으로 상스런 음성으로 말도 안되는 이유를 붙여 반대를 하는 주장을 했다.
 "무식한 여편네들 같으니라구. 특수학교가 들어서는데 무슨 아이들 교육상 해롭다는 거야. 오히려 더 좋지, 아. 그러구 땅 값이 떨어진다는 얘길 어떻게 저렇게 공공연연하게 하지. 정말 여자들은 한심해. 아마 당신도 그럴 걸."
 섭이 엄마는 가뜩이나 박사 문제로 그 여자한테 진 것이 약이 올라 있었는데 남편까지 그렇게 몰아붙이자 있는 대로 약이 올랐다.

 "그럼요. 저두 반대예요. 안 보는 쪽이 보는 쪽보다 휠씬 편해요. 일단 걸리적거린다구요. 그 여자가 엘리베이터에 타면 어떤 줄 아세요. 그 큰 휠체어가 엘리베이터를 다 점령해서 탈 자리가 없어요. 그리고 민지 엄마는 그 여자 휠체어에 걸려 스타킹이 댄싱이 갔데요, 그리고 그 여자는 항상 "죄송하지만"하면서 사람들을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아세요? 심지어는 겨우 아장아장 걷는 아이한테 자기가 떨어뜨린 볼펜을 주워달라고 하더래요. 그렇게 몰염치한 여자가 어디 있어요."
 "시끄러."
 섭이 아빠는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섭이 엄마는 깜짝 놀라 남편을 쳐다보았다.
 "아니 왜 소리는 지르구 그래요, 당신이 그 여자 서방이라도 되는 것 같구랴."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 섭이가 어떤 사람이 될까 걱정이 되서 그래, 그 까짓 스타킹 댄싱 가는 게 뭐 그리고 중요하고, 엘리베이터 한번 놓치면 하늘이 무너져? 그리고 아이들한테 어렸을 때부터 남을 돕는 버릇을 가르쳐 줘야 해,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구 불평을 하나 당신 제발 그러지 좀 마. 어째 사람이 그렇게 얄팍해."
 섭이 엄마는 반격을 할 아무런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더 큰 말다툼으로 번지진 않았다. 그저 "당신 아주 잘났수. 이제 보니 천사구랴. 하느님이야."라고 비양거렸을 뿐이었다.
 며칠이 흘렀다. 섭이 아빠가 퇴근을 해 돌아왔는데 문이 잠겨 문이 잠겨 있었다. 섭이 아빠는 경비에게 "섭이 엄마 슈퍼 갔어요?"라고 물었다.
 "아뇨. 아침부터 나가셨는데 지금까지 안들어 오시네요. 섭이가 내내 울고 돌아다니더니 얼마 전에 휠체어 아가씨가 데려갔어요, 섭이가 식구 오면 연락하라고 하더군요. 제가 인터폰을 해드리죠."
 경비가 친절히 설명을 하며 인터폰을 해주었다. 그녀의 음성이었다.
 "어떡하죠. 섭이가 자요, 제가 안고 갈 수가 없어서."
 "아- 아닙니다. 제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섭이 아빠는 인터폰을 내던져주고 황급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오늘 따라 그렇게 더디게 내려올 수 없었다. 섭이 아빠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갇혀 아내에 대한 분노심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린아이를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쏘다니는 아내, 그건 여자도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겁에 질려 울고 다녔을 섭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띵동띵동-
 아주 조급한 초인종에 여자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열렸어요, 들어오세요."라고 입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섭이가 쇼파에서 자고 있었다.
 "죄송해요. 쇼파에서 침대로 옮길 수가 없어서……"
 "아- 아닙니다."
 "잠이 들 줄 몰랐어요, 배가 고플 것 같아서 저녁을 먹이고 TV 만화 영화를 보라고 했는데, 글세 앉아서 잠을 자지 뭐예요. 그래서 겨우 눕히고 이불만 덮어 주었어요. 이웃집 하고 가까이 지냈으면 침대에 눕혀 달라고 부탁을 했을 텐데 주변머리가 없어서 아직 사귀지를 못했어요."
 그 여자가 주변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이웃이 인정머리가 없는 것이었다. 섭이 아빠는 미안해 할 것이 하나도 없는 그녀가 미안해 하는 모습에 너무나 아름다운 애정을 느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니었으면 우리 섭이가 계속 밖에서……"
 "아녜요."
 그녀는 또 웃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가 짓는 미소에 섭이 아빠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 미소는 그 여자의 모든 아픔을 덮어주기에 충분했다.
 섭이 아빠는 눈길을 떼지 못했다. 마치 아름다운 조각품을 감상하듯이 그렇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섭이 엄마 오셨어요?"
 "아- 아뇨."
 그제야 정신이 들어 자기가 그녀 집에 들어온 목적이 생각났다. 섭이 아빠가 섭이를 안으려고 할 때 그녀가 친절히 물었다.
 "아 참, 문을 열고 와야겠군요. 고맙습니다."
 섭이 아빠는 급히 뛰어나갔다. 하지만 섭이 아빠는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왔다. 아침에 바지를 오래 간만에 바꿔 입었는데 아파트 열쇠가 바로 그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서 어떡하죠."
 섭이 아빠는 주눅이 들어 기를 펴지 못했다.
 "괜찮아요, 앉으세요."
 그녀는 휠체어를 굴려 주방으로 갔다.
 "커피 괜찮으시죠."
 "네."
 섭이 아빠는 괜찮다는 사양을 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그- 그냥 보통으로."
 주방에서 커피를 타는 모습이 자기 아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무척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식탁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우리집 법도예요."
 그녀는 아주 여유가 있었다. 커피 잔을 들고 올 수 없는 것을 자기 집 법도라고 했다. 그런데 그건 법도일 수도 있었다.
 "식사 아직 못하셨죠?"
 "식사는 섭이 엄마가 더 맛있게 해 드릴 테니까 과일이나 좀 드세요."
 그녀는 과일을 깎고 있었다. 보통 여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 섭이가 그러는데 박사시라구요?"
 "아녜요. 지금 박사 과정인걸요."
 섭이 아빠는 박사나 박사 과정이나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졌다.
 "대- 단하시네요."
 "할 일이 없어서 공부해요. 이렇게 되고 나니까 할 일이 없더라구요."
 "벼-별 말씀을, 정말 훌륭하세요, 혼자서."
 "처음에는 못할 것 같더니, 닥치니까 다 하겠던걸요."
 그 여자는 아주 담담하게 자신의 불행을 말했는데 그것이 당당해 보여 전혀 불행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여자는 긴 머리를 큰 핀으로 지긋이 묶고 있었고, 긴치마로 다리를 가리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자세였다.
 그런 여자가 여자 구실을 못한다는 비방을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참. 제가 아직 이름을 모르고 있군요. 어떻게 불러야 할지를 몰라서……"
 "혜미라고 해요. 고혜미."
 "아주 예쁜 이름이군요."
 섭이 아빠와 그녀는 눈길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주 다양하게.
 그날 섭이 엄마는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며 고맙다는 인사는 하고 남편과 아들을 찾아갔다. 섭이 엄마는 고마워하면서도 그것이 그녀의 착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그녀가 할 일이 다른 여자들에 비해 적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과일 한바구니 사다 준 것으로 신세에 대한 빚을 갚아버렸다.
 그 후 섭이는 그녀와 아주 친해졌다. 끄떡하면 아줌마 집에서 놀다왔다고 했고 밥을 먹고 왔다고도 했다.
 섭이 아빠는 그런 섭이가 부러웠다. 섭이 아빠는 그날 이후로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그 여자라는 막연한 여자가 아닌 이제는 고혜미라는 구체적인 여자로 가슴에 들어와 있었다.
 아침 출근길에도 저녁 퇴근길에도 계속 그녀의 모습을 찾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6층이 눌러져있으면 그녀를 기대하곤 했다. 더욱 더 심해져 엘리베이터 버튼을 8층 대신 6층을 누를 때가 많았고, 6층에서 문이 열리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어쩌다 한잔 걸친 날은 용기 백배가 되어 6층에서 내려 그녀의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취기에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고귀한 여자였기에 감히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결혼한 후 이런 감정이 남아있을 줄은 자기도 미처 몰랐다. 이런 감정은 결혼 전에도 없었다. 정말 처음이었다.

 "엄마, 아줌마 내 생일날 우리 집에 놀러오면 안돼?"
 생일 계획으로 즐겁게 얘기를 하던 섭이가 심각하게 제안했다.
 "아줌마가 네 친구니?"
 "내 친구들 올 때 말구 저녁때 오라고 하면 되잖아."
 "저녁 땐 우리 식구끼리 파티하는 거야."
 섭이 아빠는 아내의 결정을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거들었다.
 "그렇게 하구려. 섭이도 가서 신세를 많이 지는데."
 "당신은 매일 무슨 신세를 졌다는 거예요? 이웃간에 그럴 수도 있지."
 "밥 한끼 같이 먹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운가."
 "그 여자 밖에서 타고 다니던 더러운 휠체어를 어떻게 방에 들여놓아요?"
 섭이 아빠는 아내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내에 대한 실망감에 아내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엄마 나 잠깐 아줌마한테 갔다올게."
 "거긴 이 밤중에 또 왜 가?"
 "아줌마가 내 생일 선물 사다 놓았다고 했거든, 그래서 내가 초대한다고 한 건데 초대를 못하게 됐으니까 내가 가서 가져와야 해."
 "거지 새끼처럼 선물 가지러 간단 말야?"
 섭이 엄마는 악을 썼다.
 "아줌마가 오랬단 말야." 라며 섭이는 나가버렸다. 섭이는 정말 선물을 들고 들어왔다. 선물 포장이 아주 근사했기 때문에 신바람이 나 있었다. 섭이 엄마도 신이나서 선물 구경을 열심히 했다.
 "아줌마 정말 맛있는 것 좀 사다줘야겠다. 섭아, 아줌마한테 고맙다고 인사했니?"
 섭이가 조르던 로버트 인형 세트 선물에 흡족했는지 섭이 엄마는 그녀 얘기를 긍정적으로 했다. 실로 오래 간만에 듣는 말이다.
 "응. 근데 아줌마가 무척 아픈가 봐. 침대에 누워 있어."
 "무척 아픈가 봐"라는 아들의 전언(傳言)이 마음에 걸렸다. 섭이 아빠가 그녀를 보며 가장 걱정을 했던 것은 그녀가 아픈 거였다. 혼자서 끙끙 앓고 있을 테니 말이다. 잠자리에 누웠는데도 계속 그 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녀가 신음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말없이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아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두 층을 내려갔다. 그녀의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려고 하는데 빛이 새어나오고 있음을 발견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혜미씨!" 하면서 방을 기웃거렸다. 침대에 그녀가 누워있었다. 그는 그녀가 잘 자고 있나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래서 다가갔는데 그녀가 작은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혜미씨!"
 그는 놀라 이마를 짚어 보았다. 불덩이였다. 몸의 이곳 저곳을 만져보았다. 이불 속의 몸은 더욱 뜨거웠다.
 "혜미씨. 정신 차려요, 눈 좀 떠 봐요."
 그는 그녀를 둘러업고 뛰었다.
 경비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쫓아 나왔다. 그는 그녀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경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비는 그녀가 어디가 얼 만큼 아픈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섭이 아빠가 그 여자를 업고 뛰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건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정말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왜 하필이면 그 여자예요? 다른 여자였다면 내가 이렇게 비참하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왜 병신한테 이 꼴을 당해야해요. 정말 병신 육갑한다더니."
 "닥쳐!"
 "이제야 본색이 나오는 구랴, 그래 여자 구실도 못하는 여자하고 연애하는 기분이 어떻습디까."
 "몇번을 해야 알아듣나. 그 여잔 나 같은 남자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여자야. 당신 같은 여자하곤 차원이 달라."
 "아이구 억울해, 아이구 분해. 어쩌다 내가 그 병신한테, 아이구 분해."
 섭이 엄마는 대성통곡을 했다. 이제 섭이 엄마에게 있어 그녀는 병신이 아니었다. 아주 거대한 아주 힘겨운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그 여자는 여자 구실을 못하는 여자이니 말이다.

 

 

작성자방귀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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