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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음과 다름으로 보는 영화 속 정신장애와 인권

문화 미디어 속 정신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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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

보호의무자와 정신과 의사의 동의만 있으면 어떤 사람을 너무도 쉽게 본인의 의사에 반해 합법적으로 인신구속할 수 있는 한국 정신보건법의 문제점을 다룬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날 보러와요’는 지난 4월 7일에 개봉돼 법률체계와 구조적인 허점, 가족의 이해관계 속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인권이 어떻게 짓밟히고 말살 당하는지를 스릴러물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한계와 아쉬움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럴지라도 이 영화의 의미는 한국사회의 많은 대중들이 자신도 운이 나쁘면 강수아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더 나아가서는 과학적인 테스트로도 확인하기 어려운 정신장애 판단에 근거한 강제치료나 인신구속을 인권의 측면에서 보기 위한 첫 단추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날 보러와요’에 대한 시사평을 제공해 초를 치는(?) 대신 비슷하게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처음 만나는(느끼는) 자유’라는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정신장애와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1960년대에 수잔나 케이슨은 다량의 아스피린과 보드카를 함께 복용한 후에 정신병원에 입원됐다.
거기서 그녀는 이전의 자살시도와 캐쥬얼한 섹스로 인해 경계성 성격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약 2년 가까운 입원 기간 동안, 수잔나는 병동의 다른 ‘환자’들과 친구가 되고, 특히 거의 8년 동안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는 리사와 가까워진다. 수잔나는 리사가 선사하는 경험들을 즐기고 리사의 직설적인 표현과 반항할 수 있는 용기를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리사처럼 될 자신은 없다. 수잔나는 왜 자신이 그러한 정신과 진단명을 받게 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 정신병원의 빗장이 쳐진 문 뒤에 있는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곧 다시 어떻게 순응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가를 배운다.
정신장애인은 줄곧 미디어에서 “어린아이 같고,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고, 예측불허이며, 위험하고, 불안정하게” 묘사되며, 특정 정신장애와 관련된 증상의 부적절한 묘사 또한 지적된 바 있다(Livingstone 2004). 이 특정 영화를 놓고 보아도 정신과 병동에 입원돼 있는 환자들을 위험하고, 망상적인 사고를 하고, 너무 감정적이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명백한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 자신에게 최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그들의 질환이나 컨디션에 대한 병식이 없거나 결여돼 있는 것, 자신에게 관대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강박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에릭슨(Ericson)과 그의 동료들(1987)이 정확하게 관찰했듯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최상의 방법 중에 하나는 우리가 아닌 것을 손가락으로 지적함으로”이다(Greer & Jewkes 2005에서 재인용). 이렇게 함으로써 우린 “우리의 무결점성과 정상상태를 재차 역설할 수 있다”(Greer & Jewkes 2005). 정신분석적인 아이디어들에 비춰보면, 우리 자신의 불안과 하찮음 가운데서 보다 낫다고 느끼기 위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을 줄 수 있다는 많은 증거를 대중매체에서 찾을 수 있다(Greer & Jewkes 2005). 이러한 정신분석적인 아이디어가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거리를 두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공통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Greer & Jewkes 2005).
자신들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이고, 일탈적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로 사람들이 위로를 삼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그리어(Greer)와 쥬크스(Jewkes)(2005)는 이런 타자에 대한 이해가 종종 상반되는 분류제도와 양극화 내에서 왜 정체성이 ‘내부자’와 ‘외부자’, ‘우리’와 ‘그들’ ‘남자’와 ‘여자’, ‘흑인’과 ‘백인’, ‘정상적인 것’과 ‘일탈적인 것’ 등 포용과 배제의 추론적인 표하기(discursive marking)로 특징 지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을 도와준다고 믿는다. 실제로 “장애가 일탈적인 것으로 인식될 때, 장애를 가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부정적인 가치는 증가한다”(Levers 2001). 이는 정신건강 분야에선 특별히 더욱 서비스 이용자와 전문가들 사이에 이미 확립된 권력의 불균형을 확대하고 “일종의 정신건강 격리정책을 초래할 수 있는 사회배제의 풍토가 있는 상황”을 설정한다(Clarke 2004). 게다가, 이 영화는 사회적 모델보다는 의료적 모델의 담론을 포함한다. 생물학과 유전자와 같은 언어의 사용은 의료적 담론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고, 이 의료적 담론은 현 상태를 야기한 외부적인 요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파악된 치료법과 치료 또한 개인의 병리를 고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의 예로, 수잔나는 그녀의 부모를 당황하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이건(내가 앓고 있다고 판단되는 이 병은) 유전인가요?” 이와 유사하게, 과거 그녀의 행동이나 현 상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의학적인 담론을 선택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장애에 대한 수잔나 자신의 관점은 눈에 띄게 바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전체 줄거리에 걸쳐 여러 번 누가 미치지 않고 정상이며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수잔나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는 택시 운전사도 격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비정상적이라고 믿기를 거부한다. 택시 운전사는 수잔나가 단지 슬프고, 무언가를 보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될 수 있다면 존 레논 또한 입원돼야 한다고 그의 생각을 표현한다.
이러한 진술의 중요성은 수잔나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고, 때때로 사람들은 불쾌한 상황에 처해지는 것을 피할 수가 없는데 그건 그들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닌 외부영향력에 대항하기 위한 재정, 힘 등의 자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 글에서 정신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같음(“나 같은 너”)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름(“나와
다른 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말해 둔다. 다시 말해, 다름의 부정도 같음의 부정만큼이나 폭력적일 수 있는 것이다. 힘들다고 하면 한국사회에서 흔히 듣는 이 말, “다 그렇게 살아. 사람들도 다 힘들어”라는 말도 “남들 다 하는데 넌 왜 못해?”도 어려움이나 고통을 느끼는 개인 차이를 부정하고 같음만을 강요하는 것일 수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요약해 보면, 이 영화는 사람들을 ‘우리’와 ‘그들’로 나누기도 하고, 또 광기와 정신의학적 장애가 단지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정신적인 어려움에 대한 의료적인 설명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적어도 많은 다른 영화들에 비해서는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않는 일탈적인 행동을 하면 당신과 같은 일반적인 사람도 정신과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비춰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춘다.
따라서 논쟁은 이렇게 진행된다.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미디어의 묘사는 타자에 대한 심적 관념을 영속시키고 표준에서 벗어난 상상 스펙트럼의 양극단으로부터 개인들을 빈번히 합체시킨다. 진실로 사악한 사람들보다 진실로 무력한 사람들이 대중매체에서 악마화되고 낙인이 찍혀진다”(Greer & Jewkes 2005).

이러한 시각에서 영화가 행동에 대한 사회적인 설명 대신에 개인적인 설명을 하는 헤게모니에 공헌하고, 현실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절대 필요하다(Livingstone 2004).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각자 영화 관람자로서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 각자의 능동적 역할이 요구되는 까닭은 이러하다.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해석이 우세한 문화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고, 미디어는 이에 따라 그런 사건에 대한 해석을 강화하며 문화적인 의미를 준다는 순환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그 다음에 이는 정신적인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탈적이고 위험하다는 생각을 더욱더 강화하는 사회정책과 관행적인 결정에 반영된다”(Clarke 2004).
마지막으로, 수잔나의 내러티브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광인은 망가진 것이 아니고, 어두운 비밀을 삼키는 것도 아니다. 그건 과장된 당신과 나이다. 만약 당신이 거짓말을 했고 그걸 즐겼다면... 만약 당신이 영영 어린이로 남아있기를 소망했다면...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 친구였다.” 각개인의 차이와 다름은 인정하면서 ‘나와 다른 너’에서 ‘나와 같은 너’로의 전환이 정신장애와 정신장애인의 인권에 대한 우리의 시각에 긴급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작성자글 이지은 위니펙 대학 정신보건분야 자유전공 학사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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