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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악과 선의 은유적 인물로서의 장애인

「탁류」의 장형보를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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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만식

소설은 논리보다 마음을 담아 펼치는 세상의 단면이다. 작가가 객관적인 주장이나 이론을 펼 때라도 경험하는 주체의 심상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어서 그만큼 더 설득력을 가진다.
그래서 나한테는 채만식 장편 『탁류』의 척추장애인 장형보라는 존재가 괴롭게 다가왔고 그런 만큼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파장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장애 유형 당사자이거나 또한 가까운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묘사를 보고 어떤 심정이 될 것인가. 소아마비에 걸렸던 내가 ‘소아’라는 글자만 봐도 깜짝 놀라곤 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기도 했다. 이번 원고에서는 악의 정점에 있는 장형보를 살펴보고자 한다.
 

더러운 물결, 탁한 강물이라는 뜻의『탁류』스토리는 일제 강점기의 군산에서부터 시작된다. 군산은 호남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던 항구이자 식민지 치하의 왜곡된 근대화의 장소여서 쌀이나 곡식을 매개로 노름판을 벌이는 미두장(米豆場)이 성행했고 도박꾼들이 모여들었다. 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주사도 투전판을 기웃거리다 매를 맞기도 한다. 그의 맏딸 초봉이 약국 점원으로 일하면서 굶기가 일쑤인 식구들을 부양하는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여린 심성에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미덕을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찢어지게 가난한 그녀한테의 미모란 더욱 가중되는 불행의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은행원 고태수가 그녀의 미모에 반해 눈독을 들이는 데서 불행이 시작된다. 그는 은행에서 남의 예금을 빼내 미두장에 투기를 일삼으며 방탕하게 노는 인물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초봉과 결혼해서 한 번 살아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이런 사정을 꿰고 있던 그의 내연녀가 정주사한테 접근해 태수가 장사 밑천을 대줄 거라는 미끼로 그에게 딸을 주도록 주선한다. 정주사는 이 제안을 덥석 물었고, 초봉은 가족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이 결혼을 허용한다.
그런데 결혼과 더불어 신혼집으로 함께 들어온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두 번째 남자 장형보다. 그는 어디서 왔는지 근거를 알 수 없는 인물로 태수가 횡령한 돈으로 투기 협잡을 하던 미두장 중매점의 바다지(시장 대리인)이다. 그도 초봉을 보자마자 반해 그녀를 뺏으려고 악심을 품는다.
태수는 허영심에 들뜬 난봉꾼이지만 성정이 잔인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형보는 간교하면서 모질기가 이를 데 없는 인물로 초봉을 독차지하기 위해 태수에 대해 투서를 넣고 그의 내연녀 남편한테 알려 불륜의 현장을 덮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태수와 내연녀가 죽게 되고 그날 밤 그는 초봉을 겁탈하기까지 한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겪은 초봉은 피비린내 나는 현장을 떠나 정신없이 서울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서 먼저 일하던 약국 주인 박재호를 만난다. 서울에 제약회사를 차려 큰 부자가 된 그는 궁지에 몰린 초봉을 유혹해 그녀의 세 번째 남자가 된다. 졸지에 그의 첩실이 된 초봉은 세 남자 중에 누가 아버지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되고 그나마 아이 키우는 재미에 살아가고 있다.
이 때 다시 형보가 나타난다. 그는 자기가 아이의 친아버지라고 주장하면서 계획적으로 들어오자 재호는 일이 복잡해질 것을 계산해서 물러나고 만다. 초봉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아이를 죽이고 말겠다는 위협 앞에서 번번이 주저앉고 만다. 그는 걸핏하면 “어미 젖통을 뚫어 아이를 산 채로 자물쇠에 채워주지” 그러면서 협박을 가하는가 하면 실제로 아이를 거꾸로 대롱대롱 들기 일쑤였다.
 

또 하루도 쉴 날 없이 들이대는 그의 <밤의 요구>에 단 한번이라도 초봉이 불응을 하고 보면, 단박 두 눈을 벌컥 뒤집어쓰고 성난 야수와 같이 날뛴다. 꼬집어 뜯고 물어 떼고 하는 건 예사요, 걸핏 하면 옆에서 고이 자는 아이 송희를 쥐어박지르고 잡아 동당이를 치곤 한다. 그래도 안 들으면 칼을 뽑아 들고 송희에게고 초봉이에게고 겨누면서 헤번덕거린다.

초봉은 절망의 상태로 거의 미치다시피 결국 그를 죽이고 만다. 가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기로 한 여인의 비극은 그의 잔인함 앞에서 더욱더 절정으로 치닫게 되고, 그가 극악해질수록 그녀의 비극은 더 깊어진다.
이처럼 형보라는 캐릭터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설정돼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악하다고 해도 인간으로서의 일말의 고뇌와 갈등이라도 묻어나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시종일관 흔들림 없이 저주받은 악한일 뿐이다. 이는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라 돌처럼 화석화된 설정이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척추장애인 장형보, 그의 상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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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는 어째서 이런 인물을 창조했을까? 하필이면 척추장애인 장형보한테 화석화된 캐릭터를 부여한 것일까? 이 점을 살펴보자면 이 소설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 채만식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그의 문학 배경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 나라가 일본한테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그 시절, 친일로 자본을 모은 신흥지주층들과 그에 빌붙어 오로지 자기 이익과 영달만 추구하던 계층이 있었는가 하면 상대적 위치에 있던 농민과 하층민들은 최소한의 생존조차도 지탱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또한 우리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한 검열을 강화해 반일감정과 비판의식을 표현할 수 없게 했다. 해서 채만식은 풍자와 리얼리즘에 의존하게 됐고, 부정성의 정점에 있는 인물을 형상화함으로써 어두운 시대상을 드러내는 풍자적 방법을 취하게 된 것이다.

곳곳에 번득이는 독설과 비웃음

조소와 악매(惡罵-욕하고 꾸짖음)로 묻혀진 눈물과 한숨의 기록

 조선일보에 1937년 12월부터 38년 5월까지 연재됐던 이 소설을 처음 단행본으로 펴냈을 때 붙여진 광고문이다. 풍자(諷刺)란 어떤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들거나 멸시, 분노의 감정 등을 불러일으켜서 비판하는 표현 방식으로, 이런 기제가 작동하도록 가장 최전방에 세워진 인물이 바로 장형보였던 것이다.
 

미상불 세상 사람들은 형보가 곱사요, 또 형용이 추하게 생겼대서 속을 주기 전에 덮어놓고 멸시를 했고, 이 멸시 속에서 형보는 자라났고,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꼽추…

병신…

빌어먹게 생긴 얼굴…

무섭게 생긴 상판대기…

 형보는 이런 인물이기에 뒤틀리고 절망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인물로 적격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작가의 이런 설정 못지않게 비평가들의 독해 역시 왜곡된 인간으로서의 상징성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즉, 식민지 치하에서 무기력하게 몰락해가고 있는 군상을 젊은 여성 초봉에게 빗대었다면 형보는 악의 상징이자 몰락의 원흉으로 대상화된 것이다.
장애학적 시각에서 장애(인)의 문학적 이용을 관찰한 학자, Paul Robinson이 “다른 모든 사회적 소수집단처럼 장애인도 예술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술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같이, 여기서도 형보라는 존재는 장애를 가진 외형 때문에 너무나 쉽게 악의 상징적 인물로 처리된 것이다. 특히, 작가들이 은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장애(인)를 자주 이용해왔다는 Joshua Lukin의 지적과 같이 형보라는 캐릭터는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화석화된 ‘은유로 압축’되고 말았다.

왜 이런 일이 문학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일까? 일단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한정된 지면에서의 창작이니만큼 주제를 향한 사건이나 인물들을 극적으로 심화시키지 않을 수 없고 이렇게 해서 부정성과 긍정성은 더욱 극대화돼 한 번 더 왜곡과 편견을 강화시키고 재생산하게 된다.
구태여 첨언을 하자면, 문학에서 장애인이 왜곡됐다는 것은 현실에서 팽배한 편견과 왜곡이 먼저 있었다는 걸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는 수없이 있겠지만 편의상 개인적인 예를 들자면, 내가 ‘불구폐질자’라는 용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2년 교사임용 순위고사에 합격하고 마지막 신체검사를 받는 자리에서였다. 그 때 의사의 진단서에 ‘불구폐질자’라는 용어가 있었고 이로 인해 나한테 내린 최종적인 판단은 불합격이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불구자’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국가의 공적문서에서조차 그대로 사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폐질자’라는 단어와 합쳐져서 도저히 회생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떠밀리는 듯 압박감을 느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기사에서 나는 다시 이 용어를 발견했다.
제목은 「아직도 진단서에 맹자. 불구폐질자…….」로 2016년 2월 2일자 광주일보에 실린 기사였다. 내용은 광주의 어느 보건소에서 발급한 건강진단서에 농자 아자 맹자 불구폐질자 등의 용어를 아직도 쓰고 있었다는 것.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정부는 2014년에 이 용어들을 청각장애인 언어장애인 시각장애인, 장애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 등으로 순화해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용어를 고친 것이 2014년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폐질자’라는 용어를 버리기는 아까웠던지 ‘장애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사람’으로 대체시켰다는 것이다. 도대체 뭘 위한 결론이고 낙인이란 말인가?
이런 상황을 상기하면 일부의 편견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한 시대 공동의 인식으로 장애인에게 덮씌워진 아키타이프(Archetype, 원형 原型) 같은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나왔고 지금도 그런 시간대를 지나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적시(摘示)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가치를 박탈당하지 않을 주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장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나왔다고 믿는다. 또한 장애와 문학, 그리고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성을 밝히는 이런 글들이 생성돼야 하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손흥일 '장애와 문학', '솟대문학' 100호 pp.43~59

작성자글. 김미선 소설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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