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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확인 연락망에 동의해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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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청명한 가을 하늘, 하늘색이라는 말은 참 예쁜 것 같아요. 일본말로는 하늘색을 ‘미즈이로’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물색’이에요. 처음 들었을 때는 ‘하늘과 물은 전혀 다르잖아’라고 생각했었는데, 파란 하늘도, 파란 바다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고, 원래 물도 공기도 색깔은 없고 투명할 뿐이잖아요.

그것이 파랗게 비춰지는 온화한 날, 오랜 만에 하늘색을 만끽해 보는 가을 하늘입니다. 지난봄과 여름, 워낙 굳은 날씨가 많고 지진, 태풍, 호우로 인한 재해 소식이 끊이지 않았죠, 안 좋은 일이지만 한국에서도 최근에는 지진, 태풍이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걸 실감하는 뉴스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10월 15일은 마침 구마모토 지진으로부터 반년이 되는 날로 희생자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렸다고 하는데, 그 지역은 이 몇 달 사이 지진에, 한숨 놓을 만하면 태풍, 그리고 일주일 전에는 아소산이라는 유명한 활화산이 폭발해 화산재 가루의 피해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았네요. 아무쪼록 이제부터는 이 파란 가을 하늘처럼 궂은 일과 시름이 빨리 펴졌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 누군가 문을 ‘통통’, “누구세요?” “저…” 현관문은 잠그지 않고 있었는데,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예요(저희 집은 단독주택이고 대부분 오사카의 서민주택은 길가에 현관문이 접해 있어요). 최근에는 선전이나 물건을 팔러 오는 사람도 많이 줄었고,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거든요. 약간 경계심이 들면서 당황스럽더라고요. “누구세요?” “저, 사회복지협의회에서 나왔습니다.” 오사카시에는 24개 구가 있고, 그 구마다 사단법인 <사회복지협의회>라는 기관이 있어요.

잘 모르지만 사회복지에 관한 다양한 활동, 고령자에 관한 요양보험, 급식지원, 육아지원 등의 복지서비스 활동을 하는 곳으로, 저도 장애인 활동보조서비스를 신청할 때 이용등급에 대한 조사/판정을 받았는데, 그때 상담 나온 사회복지사도 사회복지협의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했어요.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원봉사 등 다양한 지역주민도 참가하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세요?” 연세가 꽤 들어 보이는 남자 분으로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하시네요. 그 분은 저에게 설명서를 한 장 보여주면서, 얼마 전에 사회복지협의회에서 저에게 안내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에 대해 답신해 달라고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찾아왔다고요.

구청에서 여러 가지 안내 편지가 오지만, 딱딱한 글이 많으니까 대강 보고 미뤄두는 경우가 많아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 분이 다시 편지의 취지를 설명해 줬어요. 최근 자연재해 등이 많이 일어나면서 지역에 사는 고령자, 장애인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명단을 작성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그와 관련된 안내 편지, <재해 시의 지원준비에 필요한 동의서>라는 것을 보내 자신의 이름과 정보를 지역의 민생위원이나 주민자치조직 등에 공개해도 좋은지 동의 여부를 답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고요. 기일이 지나도 답신이 없었기 때문에 확인하러 왔다는 거였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내용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었지만 왠지 이름, 장애여부 등의 개인정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보인다는 데 거부감이 느껴져 어쩔까 생각하다가 그냥 미뤄 버렸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어떻습니까? 본인의 정보를 공개해서 만약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지원준비를 위해 활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분들에게 알려지는 건가요?” 그건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니 만, 동네의 민생위원이나 사회복지협의회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나 등 지역에서 활동하는 분이라는 애매한 답변이네요. 그래서 저는 일단 정보공개에는 동의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취지는 잘 알겠지만 저는 가족과 같이 살고 있으니까, 만일 재해가 일어났을 때는 지역에 계신 분들보다는 가족하고의 연락이 더 빠를 것 같아요.”

그러자 방문하신 분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곳에 사인을 하라고 하면서. 혹시 생각이 바뀌면 사회복지협의회로 연락을 해 달라고 연락처를 남기고 가시더군요. 그 분이 가신 후 내가 너무 경계심이 심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지역에서 지원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원받을 대상의 기본정보와 연락망이 가장 기본이 될 텐데, 정작 지원을 받을 사람이 동의를 해주지 않는다면 좀처럼 계획의 추진이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실체를 잘 모르는 곳에 자신의 정보가 공개되고 관리된다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일단 보류.

며칠 뒤 혼자서 자립생활을 하고 있는 근디스트로피 중증장애가 있는 나가타니 씨를 만났길래 그 이야기를 했어요. 마침 나가타니 씨도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본인은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공개하는 데 동의했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혼자 살고 있잖아요. 활동보조인과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만 혹시 활동보조인이 비는 경우도 있고, 갑자기 지진 등 재해가 발생했을 때는 활동보조인이 오지 못할 경우도 생기니까 가까운 이웃의 도움이나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네, 정말 그렇죠. 하긴 제가 가족과 같이 살고 있으니까”라는 구차한 이유를 들었지만 언제 어느 때 닥칠지 모르는 재해, 그때 가족이 꼭 곁에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에요. 편리해졌다지만 한편으로 더 많은 사고와 재해가 예상되는 세상, 다양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100%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겠지만, 누릴 수 있는 이익과 감수해야 할 위험을 동시에 생각하면서 무엇을 가장 우선해야 할지를 제대로 따질 수 있는 판단력과 지혜가 점점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작성자글.변미양 /지체장애인. 재일교포 남편과 오사카 거주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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