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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줄 타는 광대

이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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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노래 한 곡 부르면서 시작해보자.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뉴질랜드 마오리족 민요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의 번안곡 ‘연가’다. 1970년대에 활동한 혼성 포크 듀오 바블껌이 불러 널리 사랑받았다. 모닥불이 타오를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캠프송의 대명사다.

노래 한 곡 더 불러보자.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고 네 아범…

 

 
창작동요로써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내이름(예솔아)’이다. 1984년 바블껌의 이규대 씨와 다섯 살배기 꼬마가 함께 불렀다. 그 꼬마가 바블껌의 두 멤버인 이규대 씨와 조연구 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자람이다.

“처음 무대에 섰을 때 새까만 무대 바깥에서 카메라의 빨간 불빛만 보였던 게 어렴풋이 기억나요. 아빠는 옆에 있는데, 엄마는 어디 있는지 몰라 두리번거렸죠.”

이제 스물아홉 살이 된 이자람은 그때를 떠올리면 아득하기만 하다. 별 생각 없이(다섯 살짜리 꼬마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았겠나!) 노래를 부른 게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단초가 될 줄은 당연히 몰랐으리라.

열한 살 무렵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예솔이에게 판소리를 가르쳐서 방송 오프닝을 부르게 해보자.”는 기획의도로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무한도전’ 같은 건데, 그렇게 해서 만난 분이 고 은희진 선생이었다. 방송은 석 달을 하고 끝났다. 선생이 물었다. “자람아, 제대로 한번 배워볼래?” 선생이 무서우면서도 좋았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12년 동안 사사했다. 1997년 심청가를 완창(4시간30분)했고 99년엔 춘향가를 완창(8시간)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큰 화제가 됐다. 은희진 선생은 이듬해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였다. 이자람은 이제 은희진 선생의 스승인 오정숙 명창을 사사하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수궁가도 완창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 중 벌써 세 바탕을 완창한 것이다.

판소리를 시작한 걸 후회한 적도 있다. 국악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사춘기 때였다. 어릴 때부터 딱딱한 걸 싫어하고 자유분방하게 커온 그에게 하루 한 시간 반드시 연습해야 했던 판소리는 지독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당시에도 “영화 하자, 앨범 내자.”는 제의가 제법 들어오던 터였다. 쉽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힘든 수련의 길을 걷는 게 녹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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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위로가 된 건 음악이었다. 자율학습시간에 이어폰을 꽂고 본조비, 메탈리카, 너바나, 라디오헤드 등을 들었다. 판소리가 의지와 강박이 어우러져 무의식에서 의식까지를 모두 지배하는 것이었다면,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은 휴식과 위안이었다. 그런 음악을 하는 이들을 향한 질투심이 일었다.

서울대 국악과에 입학한 뒤 노래패 ‘메아리’에 들어갔다. 동아리방을 슬쩍 엿보니 기타가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음악을 들으며 느꼈던 질투심이 동했던 모양이다. 가창반이 아닌 반주반에 들어갔다.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였다. 2002년 모던록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를 결성했다. 밴드 음악을 할 땐 마음가짐부터 다르단다. 판소리 무대에 서면 자신에게 집중되는 공간 전체를 운영해야 하지만, 밴드로 무대에 서면 안 그래도 된다는 거다. 편안하게 즐기며 노래한다. “그래서 기교 없이 최대한 편하게 불러요. 사실 기교를 부리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거든요.”

판소리 또한 정진하고 있다. 몸을 낮추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국악뮤지컬집단을 만들기도 했고, 최근엔 “전통의 틀 안에 갇힌 판소리를 살아 숨쉬게 만들겠다”며 브레히트 원작을 판소리로 녹여낸 ‘사천가’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뿌리가 되는 전통 본연에 충실한 자세도 견지한다. 곧 적벽가 완창을 위한 연습에 들어갈 계획이다. 그는 “의무감이 아니라 판소리가 정말 매력 있고 즐거워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밴드와 판소리는 완전히 별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누가 그러더군요. 인간문화재 집에서 판소리를 배우고 나오는 사람도 이자람이고, 홍대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이자람이라고. 둘 다 이자람이란 걸 인정하라고. 그런데 지난번 ‘사천가’ 공연 때 둘이 합쳐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둥둥거리는 베이스 음에 판소리를 입히니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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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은 자신을 “주류와 비주류, 언더와 오버, 권력과 비권력 사이에서 곡예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음만 먹으면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성공의 길로 들어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이 구려질 것 같아서” 여전히 줄타기를 감행한다.

“밴드 첫 앨범 발표, 적벽가 완창, 현대무용 연습, ‘제2의 사천가’ 작업 등등 계획이 많아요. 그런데 또 몰라요. 어느날 갑자기 캄보디아로 가버릴 수도 있어요. 참 아슬아슬한 삶이죠? 당장은 집세를 걱정하면서도….”
오늘도 줄 위에 서있는 그는 타고난 광대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파란 얼굴’ <빵컴필레이션 앨범 중>
작성자서정민(한겨레 신문사 기자)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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