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이 기획이다, Love on the spectrum > 문화


인식이 기획이다, Love on the spectrum

장애코드로 문화 읽기

본문

▲  러브 온 더 스펙트럼 [넷플릭스 제공 사진]
 
 
예나 지금이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장 화 젯거리인 ‘아이템’은 ‘연애’, ‘사랑’인가 보다. 내가 즐 겨봤던 <짝>을 비롯해 <하트시그널>이나 <솔로 지 옥>, 최근에는 좀 더 내밀한 소재까지 들어간 <환승 연애>, <돌싱글즈> 등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 을 보면 말이다. 해외에서는 더 다양한 포맷의, 다양 한 사람들의 연애 관찰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지고 반 응도 좋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사랑과 연애는 관심 과 흥미의 주제이고, 그래서 대중문화의 충족조건인 'Want'와 'Need'를 만족시키는 ‘아이템’이지 싶다. 그 런데 자폐스펙트럼 성인들의 리얼 연애 프로그램까 지 만들어질 줄이야.
 
 
‘넷플릭스’의 <러브 온 더 스펙트럼>. 처음에는 다큐 멘터리인 줄 알았다. 그러고는 이내 나의 편견을 자 각했다. 실제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젊은이들이 출연 해 ‘사랑하고 싶다.’ 를 외치며, 사랑할 상대, 자신의 짝을 찾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은 리 얼리티 예능프로그램이다. 우리네 방송에서는 상상 도 못 하는 기획이지 않나. 해외의 대중문화 콘텐츠, 특히 ‘호주’는 여기까지 왔구나 생각하니 반가우면 서도, 호주의 무엇이 이런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했 을까?,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프로그램이 가능할까?, 만약에 제작된다면 우리나라 시청자들의 반응은?, 과연 볼까?, 통할까? 등등의 의문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I’m on the spectrum."
 
이 말에, 그리고 프로그램 안 에 그 답이 있었다. 출연자에게 자기소개해달라는 감독에게, 첫 출연자인 ‘마이클’은 서슴없이 “I’m on the spectrum.”이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이 출연자만 그렇겠지 했는데, 다음 출연자도, 그다 음 출연자도 “I’m on the spectrum.”이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시작한다. 머리로는 당연하지 하면서도 이 상황이 생경했다. 35년 전 즈음에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가 생각났 다. 미니스커트에 의족을 한 여성이 내 앞을 지나갔 다. 나도 모르게 순간 멈칫했다. 그때의 그 느낌이 랄까? 어릴 때는 나도 보조기를 했었고, 치마를 입 고 거침없이 다녔으면서, 미니스커트 아래로 보이 는 의족이 왜 그렇게 생경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니 단순히 생경했다기보다는 이 모습 너머에 자리한 장애를 인정하는 사회, 다름의 평범함, 당연함이 생 경했던 것 같다. 그때도, 지금의 이 프로그램에서도 변함없이, 자신의 장애를 저렇게 자기 이름 소개하 듯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드러내는 것이, 자연스럽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회라는 것에, 또 “I’m on the spectrum." 아래에 ‘나는 자폐장애가 있어요.’라 고 뜨는 한글 자막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의 생 경함을 느낀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 “내겐 장애가 있어요.” 라고 말한 것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며, 드라마 <이 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첫 변론에 앞서 ‘우영우’가 배심원들에게 “저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 어서”라고 말하는 느낌과도 사뭇 다르다. 장르와 상 황이 다르니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겠지 만, 같은 장르에 같은 상황이라도 지금의 우리나라 영상 콘텐츠에서 저 자연스럽고 당연함이 배인 장애 에 대한 자존감이 과연 전달될까?
 
 
자본주의의 꽃인 미디어, 상업성과 떼려야 뗄 수 없 는 속성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이 프로그램도 평범 함, 보편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있고 예쁘고 밝은 장 면들만 보여줄 수밖에 없는 한계가 노출된다. 우선, 출연자들의 면면이 그렇다. 자폐스펙트럼인들 중에 서도 아스퍼거인들이 대부분이며, 경증의 다운증후 군, 심지어 서번트까지 출연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 영우>의 현실판이라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 출연자 들이 거의 백인(한 명이 아시아인)이라는 것, 부모, 자매, 형제와의 관계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부 유한 가정에서 정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이 다. 출연자 중 ‘로넌’의 엄마에게 “‘로넌’이 누군가를 만나려는 걸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엄마 는 “잘된 일이죠. 아이가 거쳐야 할 다음 단계라고 생 각해요.”라고 말한다. 출연한 모든 부모가 자녀의 장 애를 인정하고 자녀의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 는 모습이다. 너무 이상적인 장면들이라 솔직히 연 출인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인상적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자폐스펙트럼 성인들이 주인공이 다 보니 자연히 이들의 일상이, 참여하는 프로그램 들이 카메라 앵글 속으로 들어온다.
 
 
예를 들어 사랑 하고 싶으면 사랑할 수 있도록 짝을 만날 수 있게 자 리를 만들어주는 ‘스피드 데이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수시로 개최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마 이클’은 1대 1로 여러 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서 로를 탐색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5명까지 적어 낼 수 있고, 양쪽 모두 매칭이 되면 연락해 데이트를 시작한다. 이외에도 지역사회와 테라피스트, 가족이 삼각구도로, 자폐스펙트럼 성인들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도록 지속적으로 지 원하고,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필요해 보였던 관계전 문가의 역할이 인상적이었다. 당사자들이 원하면 소 개팅이나 데이트에 나가기 전, 또 평상시에도 주기 적으로 상담할 수 있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인사하 는 법부터, 관계를 지속시키는 대화들과 행동들, 사 회적 관계에서의 의사소통과 상호작용 등을 세세히 코치해주며,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감을 느끼게 도와준다.
 
 
사실 시청하면서 화가 날 수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 까. 장면 장면이 한낮의 꿈같기도 하고, 판타지 같기 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자폐스펙트럼 당사자의 자 기결정권과 독립성이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 에서, 분리와 격리가 최선이라는 정부의 시설지향 에 의해, 가족의 책임에 무게가 실린 정책·제도에 의 해, 자폐스펙트럼 성인들에 대한 지역사회 차원의 지원과 프로그램들이 매우 부족하다. 그래서 장애 가 심한 성인들 대부분이 아직도 집이나 시설에 갇 혀 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뿐일까? 얼마 전 SNS에서 자폐스펙트럼 남성이 용기를 내 결혼정 보회사에 등록했다가 자폐스펙트럼이 있음을 밝히지 않았다고(왜 밝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고 이해 할 필요도 없지만), 환불과 회원자격 박탈을 통보받 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차 별이 여전히 발생하고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 우 리나라 장애인식의 현실이다.
 
 
 
▲ 러브 온 더 스펙트럼 [넷플릭스 제공 사진]
 
우리나라 현실에서 보면 약간 불편하고 믿기지 않 는 장면들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만들어 나 가야 할 세상이고 일부일지도 모르지만, 호주나 미 국의 현재다. 곧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고 되어야 한 다. 그들도 오늘의 우리처럼 지하철과 버스, 거리에 서 비와 눈, 추위와 더위, 땀과 시민들의 욕설을 견디 며 외치고 또 외친 시간이 있었다. 언뜻언뜻 그 시간 의 흔적을 더듬으며 “전 평생 긴장하며 살았어요.”라 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현재 우리 부모들의 이야기 로 들린다. 절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어둡게 담아내 지도 않으면서 그 힘든 시간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 게 연출한다. 감독의 능력이다. 그리고 나는 이 능력 뒤에 자리한 장애 당사자, 그리고 그 가족의 기나긴 외침, 이 외침에 의해 다져진 다름의 평범함과 당연 함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본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인식이 기획이고 작품성의 실체다.
 
 
‘눈과 눈의 시선, 표정, 몸짓 등 비언어적 행동 사용 에 어려움을 겪음. 다른 사람들과 즐거움, 관심사를 공유하려는 자발적 행위가 부족함. 사회적 또는 감 정적 공감의 부족.’ 이 내용은 자폐증의 의학적 판 정 기준이다. 이 기준으로만 보면 자폐스펙트럼인 들과 연애, 사랑은 정반대 편에 나란히 서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출연자마다 “나는 정말로 사랑을 원 해요.”, “전 진정한 사랑을 찾는 중이고 포기할 수 없 죠.”라고 말하며, 사랑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다. 어느 출연자는 결혼 서약을 하면서 “네가 행복할 때 옆에서 함께 기쁨을 나눌게.”라고 말하고, 또 어 느 출연자는 데이트하면서 “이해받는 느낌이에요.” 라며 운다. <러브 온 더 스펙트럼>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웃고, 깨달으면서 던지게 되는 질문들이 우 리의 인식, 의식으로 흡수될 것이고, 당신과 나를 편 견과 오해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리즈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다 양한 나라의 <러브 온 더 스펙트럼> 시리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목의 의미처럼 좀 더 넓은 의미 의 장애에 대한 해석, 장애와 장애 정도의 다양함, 무 엇보다 사랑의 다양한 색을 담아내며, 이어가는 담 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자 기 결정권’ 특히 ‘성적 자기결정권’ 존중의 인식이 스 며들기를. 그래서 우리나라의 <러브 온 더 스펙트럼 >이 제작될 수 있기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 우>에서 ‘최수연’처럼 장애가 있는 캐릭터의 ‘원 나 잇 스탠드’가, 나쁜 남자와 사랑에 빠질 자유가 온전 히 자기결정권 존중의 맥락에서 연출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작성자글. 백수정 대중문화비평 활동가  cowalk1004@daum.net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