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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동정에서 자립으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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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미국 장애우 운동사

동정은 싫다
제 2 장  동정에서 자립으로 (2)
(From Charity to Independent)

 

 

장애 학생 프로그램 운영
버클리의 장애우들에게  코웰(Cowell)에서 산다는 생각은 진부해졌다. 낮에는 학생이지만 밤에는 환자로 병원에 머무르는 것이 이들 롤링 쿼즈(Rolling Quads)들에게 오명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학교 밖에서 생활하기 위해 장애우가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기고 했다. 그러나 단지 한 학생만이 휠체어를 이용할 수 있는 아파트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롤링 쿼즈는 서로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지원그룹을 형성하기 시작했는데. 로버츠가 알고 있는 진 워쓰(Jean Wirth)로부터 중요한 국면의 전환을 맞았다.
워쓰는 원래 흑인과 스페인계와 같은 소수민족의 학교이탈을 감소시키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은 성공적이어서 연방정부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66년 워쓰의 요청으로 로버츠는 이 프로그램에 장애학생을 포함시킬 수 있는 규정을 명문화하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워쓰와 로보츠는 장애학생들의 학교이탈방지 프로그램을 가능한 한 장애우들이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규정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단지 몇 학교만이 장애학생을 위한 특별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므로 롤링 쿼즈는 그들의 제안이 잘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결국 연방정부의 보건·교육·복지부는 8만1천 달러를 지원하고 학교도 2천달러를 지원하였다. 1970년 가을에 신체장애학생프로그램(Physically Disabled Students" Program : 이하 PDSP)은 학교 안에서 운영되었다.
로버츠와 그 동료들은 그들 고유의 경험을 통하여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PDSP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학생들을 위한 아파트를 찾아 줄 수 있는 장애우 상담사를 고용하였으며, 식사를 준비하거나 휠체어를 밀거나 학생들을 돕기 위하여 필요한 일은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잠재력 있는 동참자들을 모았다.
휠체어는 자립생활에 주요한 장애물이었는데, 이는 주로 집이나 치료기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되었다. 로버츠와 그 동료들은 그들의 휠체어가 자주 망가져서 몇 주일 동안 학교에 올 수 없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PDSP는 더 좋고 견고한 휠체어를 고안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24시간 일할 수 있는 공장도 세웠다.
학생프로그램은 급진적이었다. 장애에 대한 의학적 모형은 발생 후 얼마나 멀리 걸을 수 있는가 또는 사고 후 얼마나 다리를 구부릴 수 있는가를 가지고 독립성을 측정하였는데, 로버츠는 이를 장애우가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정도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다시 정의하였다. 독립성을 도움 없이 수행할 수 있는 과업에 의해 측정되지 않고 도움을 얻으면서 살 수 있는 삶의 질로 측정한 것이다.
새로 명명된 "자립생활운동"이 가정하듯이 장애우들은 일상생활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의사나 전문가들보다 더 잘 안다. 그리고 장애우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학교에서 일터까지 그들의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이다.
독립성, 자립성, 통합성, 사회적 문제로서의 장애, 이러한 것들이 PDSP와 이것이 주도하였던 장애우 권리운동을 이끄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다양한 범위의 장애를 포함하여야 했다. 전통적으로 다양한 장애우그룹이 그들만의 문제를 위하여 각각 활동하였으며 공동목적이 없었다.
버클리프로그램도 신체장애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고,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프로그램 시작 즉시 자립을 위한 그들의 투쟁에서 유사성을 발견한 시각장애학생들의 요구가 나타나고 참가자를 위한 서비스도 시각장애우를 위해 자료를 읽어주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쉽게 확대되었다. 이는 로버츠에게는 손실이 아니었고, 정치적 힘은 연합이 형성되면서 확대되었다.
몇몇 다른 학교에서도 장애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리노이대학이 처음으로 1950년 2차 세계대전에서 부상당한 장애군인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1961년에는 163명의 장애학생들과 101명의 휠체어이용자들이 참가하였다. 학생들은 학교시설에 연결통로를 만들게 하였고, 그들만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연보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일리노이대학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버클리에 있는 학생들보다 장애정도가 덜 하였다. 보호자 없이 스스로 활동할 수 있는 학생들만을 요구하는 일리노이프로그램에 롤링 쿼즈에 속해 있는 학생들은 거의 자격을 갖지 못하였다.
또한 학교당국에 의해서 운영되는 일리노이프로그램은 버클리학생들의 자립적 접근을 포함하지 못하고 있었다.
버클리에서의 PDSP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00명의 학생이 등록했으며, 장애학생들은 코웰에서 나와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학생이 아닌 일반장애우들로부터도 같은 요청이 쏟아진 것이다.
PDSP 직원들은 거의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러나 봄에는 학생들과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없었다.

 

자립생활센터 이념 탄생
그해 5월 로버츠, 헤슬러 그리고 기타 주요 인사들은 학생이 아닌 일반장애우들과 병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 구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자립생활센터(Center for Independent Living : CIL) 이념이 탄생된 것이다.
1972년 봄에 시작된 자립생활센터는 장애우에 의해서 운영되고 그들의 문제를 사회문제로 접근하며, 다양한 장애형태를 포함하고, 주요목적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등 장애우학생프로그램과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운영되었다.
장애는 스스로의 의사결정능력과 필요한 도움의 이용정도에 의해 측정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년간은 재정부족으로 센터가 문을 닫고 다음 지원이 오면 열리곤 했다. 그러던 중 센터의 뛰어난 문필가 조앤 리온(Joan Leon)의 활동 덕택으로 100만 불의 지원을 얻게 된 후 프로그램의 재정상황이 나아졌다.
그리고 1975년 캘리포니아 주의 새로운 주지사 제리 브라운(Jerry Brown)은 로버츠를 주 재활국의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로버츠는 캘리포니아 주의 재활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립생활과 재활서비스라는 외연적으로 상호 모순적인 원칙을 통합했다. 의식주 등 장애우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재정지원을 한 것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장애의 정도를 막론하고 모든 장애우들이 도움을 받도록 하였다. 로버츠 주도하의 재활국은 보다 많은 장애우들을 도와주게 되었지만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은 아직도 직업을 얻는 장애우의 수에 근거하고 있어 이후 이에 대한 논쟁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로버츠의 개혁은 재활국을 혼란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직원들이 이러한 변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직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질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행동하는 장애우 모임 조직
한편 버클리만이 새로운 세대의 장애운동가를 낳은 유일한 장소는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일년이 된 1970년 봄, 쥬디 휴맨(Judy Heumann)은 뉴욕시의 공립학교의 교사자격증을 거부당했다. 그녀는 이에 저항하게 되었고 또 다른 장애운동지도자로 등장하였다.
휴맨은 초등학교 학생을 도울 목적으로 롱아일랜드 대학에서 언어치료를 전공하였다. 그러나 필기·구두시험을 모두 합격했음에도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하여 증서를 받지 못하였다. 담당의사는 그녀가 스스로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또는 유사시 학생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휴맨은 교육위원회를 차별을 이유로 고소하였다. 그리고 지역신문에 "소아마비장애우는 대통령은 될 수 있어도 교사는 될 수 없다"라는 제목의 기사에 "위선적인 사회가 우리를 명목상으로만 교육을 시킨 후 사회적으로 매장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교육위원회가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문제는 법원 밖에서 해결되었다. 휴맨에게 자격증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모교인 초등학교 교장이 그녀를 채용할 때까지 어느 누구도 그녀를 채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경험은 권리를 위해서는 항상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가르쳤다.
이후에도 세간의 태도는 장애물이었다. 그러나 언론에서 그녀에 대해 보도한 결과 그녀는 주로 유사한 불만을 가진 다른 장애우들로부터 수백 장의 편지를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1970년 휴맨은 또 다른 장애운동인 "행동하는 장애우(Disabled in Action : DIA)"를 시작하였다. 그때 그녀는 22세였다. 로버츠의 조직과는 다르게 휴맨의 DIA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장애우의 자립생활을 돕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적 시위에 가담하였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장애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법안을 거부하자 링컨기념관에서 시위하였으며, 대통령선거 막바지에 대통령과의 공개토론을 요구하며 베트남전쟁 상이군인조직과 함께 닉슨의 뉴욕재선본부 점령을 시도했다.
다음해 휴맨은 CIL에서 일하기 위해 버클리로 왔다. 공항에서 그녀는 자동수압 리프트가 있는 밴에 태워졌으며, 주로부터 개인 수행자의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었다. 성장하는 서부지역에서 그녀는 접근 가능한 새로운 건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동주체성으로 뭉쳐있는 장애우들을 발견하였다.
1975년에서 1982년까지 휴맨은 CIL의 부소장으로 일하면서, 동부의 정치적 행동주의와 자립생활서비스를 제공하는 버클리의 장애우사회를 융합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휴맨은 로버츠와 함께 장애우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계속)

 


저자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했고,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의 유수한 언론에 소개되고 있다.

 

역자
이 책을 번역한 이상진 씨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원에서 직업재활을 전공했다. 현재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동교 재활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미국 직업재활전문 상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글 / 조셉 피 쉐피로

역 / 이상진

작성자이상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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