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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애인 수기] 파도여, 슬퍼말아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여성장애우 수기공모 최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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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장애우수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여성장애우 수기공모 최우수작
파도여 슬퍼 말아라.
김광이(지체장애)

 

나의 성장기는 1남 5녀 중 다섯째로서, 게다가 기울어가는 가세와 신체적 장애로 인해 힘겹고 감내해야 할 것이 많은 성장기를 보냈다. 그래도 추구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늘 내 의식의 중심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신체적"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은 장애우에 대한 주변의 공정하지 못한 인식과 사회적 시각을 부담스러워하기 전에 장애로 인한 어려움이 있는 만큼 자신의 부족함이나 자칫 무능력해지기 쉬운 부분들을 개선해보려는 오기가 더 많이 작용하는 자의식과 맞서오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집안의 도움 없이 자립하자고 결정했던 중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까지, 그리고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에스컬레이터로부터 배제되고 싶지 않아 백화점에서 지나는 혀 차는 소리와 넘어질 때마다 놀라서 지르는 짧은 비명을 들으며 끝내 그 계단타기를 해내던 일, 직장을 다닐 때는 방문객을 위해 차를 준비해놓고 쿵쾅대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미소 지으며, "보시다시피 저희 회사는 셀프에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최대한 활동의 가능성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한편으로는 살 만한 세상이라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 애써 왔다.
내게 있어서도 자립하기 위해 장애우로서 극복해야할 최대 난제는 역시 생계와 직결된 취업문제였다. 사춘기적 감수성을 다 벗지 못했던 때 장애우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지, 기술을 배우는 것이 보다 나은지 고민해야 했지만 내가 처한 경제적 형편은 그런 갈등을 해볼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늘 가족의 도움없이 자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떠한 사고과정의 끝에라도 당연한 귀결처럼 가슴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현재 30대인 연령층의 부모님 세대가 대체적으로 그러하듯 나의 부모님 역시 지극히 봉건적이셨다. 여기에 한번 기울어진 가세는 빈곤의 악순환을 초래했고, 그분들은 가슴 조이시며 6남매와 번갈아 병석에 누우시는 시부모님에 대한 의무감으로 사셨다.

<첫 월급 1만원>
나는 취업을 하기 위하여 기능을 갖추어야 했다. 기술을 배우는 것도 기숙사가 있는 곳이어야 해서 선택한 곳이 장애우 직업훈련 시설이었다. 기술 교육의 종목에 있어서도 제한적이었다. 라디오·텔레비전 수리, 시계수리, 양장, 수예, 목공 정도가 당시 장애우 기술학교에 설치된 학과들이다.
나는 양장 과목을 선택했다. 장애우 직업 평가와 관련된 프로그램은 전무한 듯했다. 기술 교육을 받아야 될 한 대상자로서 어떠한 평가나 조사도 받아본 기억이 없다. 기초적인 재단법, 스타일화의 이해, 미싱돌리기가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그 이후의 생각이었지만 장애의 상태와 적성에 따라서 스타일화 그리기와 디자인, 체형에 따른 재단법 등 심도 있는 전문교육을 했더라면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수료 후 처음 취업한 곳은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의상실이었다. 숙식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도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네 정류장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1년을 소요해 배운 기술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된 것은 첫 직장에서부터였다.
나의 궁극적인 목적은 독립에 제재가 될 상황들이 반복됐고 양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한 몸으로 능력 밖의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목발을 놓으면 무엇이든 짚지 않고는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허리보다 약간 높은 작업대에 옷본의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선 절대 흐트러져서는 안 되는, 실크 천에 옷본대로 표시하는 일이 나의 첫 작업이었다. 작업대에 기대어 몸을 지탱하면 바로 앞부분은 처리가 되지만 손을 뻗어 반대편 작업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천이 펼쳐져 있는 작업대 바닥을 조심스레 라도 짚지 않을 수 없었다.
"기술을 배웠다는 사람이 그만한 것도 모르니? 천을 움직이면 어떡해!"
"중간 언니"가 그 자리에 섰다. 그때부터 앉아서 하는 일만 하게 되었다. 일의 공정을 눈여겨보면서 나의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적성검사라는 것도 받아보지 못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의 필요한 몸동작과 결부해서 옷을 직접 제작하는 일은 직능 평가상 나에게 맞지 않았다. 방법적 문제? 그렇게 해결할 문제는 아닌 듯했다. 하고 싶은 열의조차 없었다.
두 달을 다녔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밤10시. 때로는 자정 무렵에 퇴근하기도 했다. 점심, 저녁 식사를 주었고 기술을 배우는 입장이었기에 - 더구나 초보 시다에 청소도 면제받고 있었으니 - 첫 달은 급여가 없었다.
둘째 달 급여일을 하루 앞두고 몸살이 났다. 이틀을 앓으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어머니께서 의상실을 다녀오셨고 첫 월급이라며 봉투를 내미셨다.
"엄마가 열어 봐요."
"네가 고생해서 번 돈인데 왜 내가 먼저 보니?"
눈을 감고 있는데 울음을 삼키는 듯 한 소리가 났다. 만원, 만 원짜리 한 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순간 아 어머니가 우산을 받쳐 들고 나서시던 모습이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확성기를 대놓은 것 마냥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어머니도 나도 빗소리 때문에(?) 서로 소리 내지 않고 굵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어머니 손이라고 잡아 드리려니 설움이 복받칠 것만 같았다. 어머니도 그러셨으리라.
후에 나보다 장애가 훨씬 가벼운 친구에게 비슷한 실력으로써 급여수준이 어떤지 알아보았다. 먹고 자고 십만 원은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 공부까지 할 생각은 마">
"잘못 생각했어. 공부를 해야 해."
가능한 방법은 한국방송통신대학 밖에 없을 터였다. 다행히 별도로 입학시험은 없고 내신 성적으로만 합격 순위가 매겨지는 제도였기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한 학기 열심히 공부했다. 뿌듯한 희열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초조감에 밤을 새우기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옷가게를 하시는 아주머니에게 의류 공장의 분위기는 어떤지, 직장 생활을 유지하고 돈을 벌기에는 의상실보다 공장에서 단순작업을 하는 것이 낫겠다고 취업 처를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며칠 후 동대문 상가 뒷골목에 의류공장이 많은데 인력난이라며 숙식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연락이 왔다. "옷가방 하나 , 세면도구는 작은 대야에 담아서"라는 지침과 함께 사장이 처남이라는 사람이 직접 차를 몰고 데리러 왔다.
작업장은 일반 단독주택 마당에 칸막이를 쳐서 만들어져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마루에 내려놓고 작업장으로 들어섰다. 급여는 기술을 배웠다니 일하는 것을 보고 주겠다고 했다. 재봉틀을 해야만 기술자 대접을 받을 텐데 경험도 없거니와 고속 전동 재봉틀이어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조로서라도 완벽하자고 일시적으로는 결심했다. 초보자라도 옷의 제작과정을 알기에 한 번의 실수도 없었고 그 날의 일이 끝나기까지 아니 그 몇 시간 전까지는 희망적일 수 있었다.
그 당시 기술계통에서는 대체로 선배 또는 먼저 입사한 사람들의 텃세가 심하던 때였기에 은근히 신입사원을 내려 보는 듯 한 언행이 없었던 것만도 내심 작은 기쁨이었다.
첫날 일은 밤 12시에 끝났다. 일어섰다 앉았다 하면서 일을 했어도 보조기 속에서 퉁퉁 부은 다리가 답답하게 느껴져 왔다. 그 시간이면 일찍 끝난 거라면서 족발에 소주를 마시러 가자고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 스무 살 안팎으로 보였다. 장애우를 처음 접했는지, 군기(?)를 잡기 위한 것인지 묘한 눈치들 속에서 내게 같이 가자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들은 나갔고 반장과 둘이 남아 잠잘 방을 안내받았다.
방?
"혼자 다닐 수 있을까?"라며 그녀가 문이라고 연 것은 방문이 아니고 맨홀 뚜껑이었다. 정확하게는 그런 느낌이었다.
마당에 만든 작업장과 마루 사이의 좁은 통로 바닥에서 네모난 철판을 보았는데 그것의 한쪽 손잡이를 당겨 여니 가파른 계단이 보였다.
고개를 들이밀고 안을 보니 방은 방이었다. 아무런 사물함도 없었고 한쪽에 이불이 포개져 있었다. 천장과 한쪽 벽이 만나는 부분에 모서리를 따라 홈이 파져 있었고 네모난 방외에 유일한 공간인 거기엔 여러 개의 세면 대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반장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의 키만 한 높이를 세 개의 계단으로 그것도 계단 모서리를 둥그스름하게 깎아놓고 대충 비닐 장판으로 덮어놓은 채 출입구가 처리되어서 무척 위험했다.
취직은 했지만 중간고사 시험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나중에 들어가겠다고 하고 작업실로 다시 들어갔다. 다리미 작업대 위에 책을 펼쳐놓고 앉았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가 없었다.
"80년대 초반, 전태일 열사의 기운이 여전히 노동 운동권에 가득하던 때였다. 한 친구는 대학에서 제적당한 상태였고, 다른 친구는 구로동에서 위장취업을 하고 있었다. 울면서 그녀들이 생각났다. 이성은 그녀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노동 현장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그들로부터 들어오던 터였지만, 감정적으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괴리감에 속으로는 그들과의 친화에 소극적이었으며 친구들로부터 자주 고독해지곤 했었다.
재잘재잘 나갔던 이들이 들어오는 소리에 목발을 짚고는 바른 자세로 들어갈 수 없는 화장실에 옆걸음으로 다녀온 후 씻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제일키가 큰 사람의 머리와 다리가 양쪽 끝에 닿을 만큼의 길이였다.
날이 밝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둘 일어나 세숫대야를 집어 들고 방뚜껑을 밀면서 나갔다. 긴장감 때문에 보조기를 신고 잤기에 바로 일어나 지체되는 시간 없이 이불을 개어 놓고 계단을 올라갔다. 아니지, 뒤로 돌아앉은 자세로 방바닥에서 마당 바닥까지 올라갔다.
"저기요, 저 파란 대야 좀 꺼내 주시겠어요?"
"으휴, 매일 이짓 해야 하잖아!"
"야,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말하니."
어려운 일은 또 있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부엌 구조, 그 부엌 안에 우르르 몰려 세수를 하는데 부엌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폭이 좁은 두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 여기를 넘어가야 하는데, 대야 좀 받아 달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세수를 했다. 그들의 얼굴은 염려스럽고 답답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내 얼굴은 의연해 보이려고 했지만 하얗게 질려 있지는 않았을까?
둘째 날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일이 끝났다. 모두 자연스러운 일상인 듯이 보여서 한쪽 구석에 놓아 둔 책이 신경 쓰일 정도였다. 일이 끝나자마자 사장 부인이 전기를 아끼라고 의도적인 주의를 주었다. 그날 나란히 막 눕자마자 반장이 말했다.
"여기서 공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하지마."
노동자들의 인권이 주요 쟁점이었고 그나마 그것이 비합법적인 민중운동이었던 때에 장애 인권은? 생계는?
무기력해져 버렸다. 국문학과라는 특성상 교재 외에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욕구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중압감과 황무지 같은 현실 속에서 창틀에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 같다는 한 가지 사념만 며칠 내내 머릿속을 차지했다. 존재는 하는데 자주 걸레로 닦아내야 하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런 먼지.
오랜 시간을 두고 고생한 것은 아니지만 양장을 포기하기로 했다.(계속)

 

글/김광이(33세, 지체장애 1급, 여성장애우 모임 "빗장을 여는 사람들" 회원이다.

작성자김광이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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