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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장애형제자매들을 전멸시키는 홀로코스트

안락사논쟁에 이어진 낙태논쟁

본문

동정은 싫다

제9장 장애우의 삶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No Less Worthy A life)

  매년 1백60만 명의 합법적인 낙태가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임신한 여성들의 약 1%는 자신의 태아가 무엇인가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사로부터 들으며, 12%는 태아가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만약 태아가 심각한 유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면 약 50%정도의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하게 된다. 그 연장선상으로 많은 장애우들도 스스로 안락사를 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전학 연구는 가치절하된 장애우들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인가.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을 수료했다.

 

 

 

 

 

 

 

 

 

 

 

"내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줄 손"
  데이빗 리블린은 인공호흡기를 한 사지마비 장애우였다.  1971년 그는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파도타기를 하러 갔는데, 도중에 그만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높이 떠올랐다가 모래사장에 머리부분이 부딪혔다. 이 사고로 인해 그는 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됐고, 팔과 윗몸을 약간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신체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동안 영위하던 삶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했으며 대학에 다니고 있던 미시간주로 돌아와서 철학을 계속해서 공부했다. 한동안 도우미 한 명과 함께 살며 간단한 도움을 받았지만, 점점 더 팔의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디어본의 요양원으로 들어가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들은 약혼을 했으며, 리블린은 1980년에 그녀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곧 문제에 부딪쳐 짧게 끝나고 말았다. 리블린이 사지마비의 장애우인 것이 역시 그녀에게 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건강은 계속해서 나빠졌으며, 결국 1986년에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왔다. 리블린은 이곳에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 경우는 아주 명확하다."
  1989년 6월에 리블린의 청원에 대해서 오클랜드 카운티 순회 법원의 힐다 게이지 판사는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 "우리는 충분한 판단 능력이 있는 성인을 다루고 있다. 그는 자신의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후 38살의 사지마비 장애우인 리빌린은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의사를 찾기 위해 지역 신문을 통해 간절하게 호소했다.
  "인공호흡장치는 내 삶의 모든 선택권을 빼앗아 버린다. 나는 남은 30년이라는 시간을 요양원에서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 않다. 죽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평화라는 휴식을 제공하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기자에게 이야기했다.
  게이지 판사의 판결이 있은 지 15일이 지난 후, 의사인 존은 리블린에게 정신안정제와 몰핀혼합제를 제공했다. 리블린이 점점 더 의식을 잃어 가는  동안 인공호흡기는 멈추어졌다.
  그와 약혼했던 아가씨를 포함한 3명의 가까운 친구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았으며, 리블린은 30분이 지난 후 숨을 거뒀다.
  리블린의 경우는 맥아피가 자신이 보다 빨리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찾는 것을 더욱 더 고무시켰다. 미시간에서 그가 발명한 "자비로운 기계"를 가지고 있는 의사 잭 케보키안을 고무시킨 것도 바로 의사의 도움을 요청한 리블린의 간청이었다. 케보키안은 리블린이 죽을 것을 도와줄 의사를 찾는 과정에서 만났다. 케보키안은 리블린과 같은 사람이 자신을 의해서 플러그를 잡아당겨서 자살을 할 수 있는 자살 기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오레곤에 살고 있는 아킨스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케보키안과 그의 기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54살 먹은 전 영어교사, 아킨스는 알츠하이머병이라고 진단을 받았으며, 의사는 그녀에게 상당히 좋지 않은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으며, 자신이 죽기 일주일 전까지 아들과 테니스를 즐겼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점수를 어떻게 매기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그녀가 처음에 케보키안을 만났을 때, 케보키안은 의료적인 치료를 계속해서 받아볼 것을 그녀에게 권유했다.
  그러나 의료적인 치료에 더 이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자 그는 미시간주로 그녀를 초대했다. 그녀와 남편인 론은 자신들이 존엄성을 가지고 죽고자 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자넷 아킨스의 한 친구는 그녀 스스로 삶을 끝내는 것을 가족들에게 자신을 돌보아야 할 짐을 덜어버리게 하는, 가족들에 대한 선물로 보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의 죽음은 가족들에 대한 선물일 뿐이에요."
  1990년 6월, 케보키안은 아킨스를 캠프족을 위해 전기가 설치되어 있는 미시간 공원에 태워갔다. 그는 자신의 오래된 폭스바겐 밴의 뒤에서 아킨스의 팔에 있는 정맥에 기계 바늘을 장착했다.
  그녀가 죽을 준비가 다 됐을 때, 그녀는 케보키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버튼을 눌렀으며, 이를 통해서 고통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로 생명유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국인들은 삶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케보키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피하는데 도움을 주는 인정많은 사람으로 그를 간주하였다. 한편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은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던 독일 나찌와 같은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미사간주는 자살을 도와주는 것을 반대하는 법률이 없는 몇 개 주 가운데 한 곳이었기 때문에 판사는 케보키안에 대해서 살인죄라는 부담을 덜어 주었다.
  1992년에 자살을 도와주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에 주지사가 서명하기 전에 케보키안의 도움으로 인해 8명의 장애우와 병에 결린 여성들이 미시간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또 케보키안은 1994년 5월에 배심원단이 루게릭병에 걸린 30세 남자의 죽음을 도와준 것에 무죄를 선고할 때까지 케보키안은 20명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도와주었다.
  애틀란타의 법률가 5명은 장애활동가 스미스가 맥아피가 그의 삶을 마치는 것에 반대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맥아피가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여성이 낙태를 하는 것과 같은 합법적인 권리에 기초한 것이다. 궁극적으로 대법원도 이러한 결정에 동의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삶에 대한 권리집단과 장애활동가들의 연합은 불안정한 정략적인 것이었다. 합법적인 낙태는 장애권리운동에 있어서 가장 의견이 다른 이슈 중의 하나이며, 이 때문에 여러 단체들이 권리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 합법적인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한 중증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위한 의료적인 치료에서 그들의  싸움을 시작했다.
  미국연방은 소위 "베이비 제인 도어" 사건에 개입하였는데, 이것은 장애우에 대한 시민권 보호와 관련한 것이었다. 재활법의 504조에 의해서 연방정부에서 지원금을 받고 있는 한 병원이 고소됐는데, 이 사건은 장애 때문에 베이비 제인 도어를 불법적으로 차별한 사건이었다. 의사들은 그녀가 너무나 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그녀는 결코 즐거움을 알지 못하며, 침대에 누워서 그녀의 삶을 끊임없는 고통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적절한 의료적인 혜택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

 


결함 있는 태아 1%의 운명
  이것은 맥아피의 경우와 비슷하다. 심하기는 하지만 결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장애아를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허락하는 권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삶에 대한 권리 집단은 이것을 "유아살해"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한 싸움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에 대한 장애 권리 집단은 "베이비 제인 도어"에 대해서 확신을 덜 가지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부분의 장애우들은 그들의 상태가 선천적이며, 그들은 거의 예전에 살 수가 없거나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에반 켐프와 같이 일부는 자신들의 어머니에게서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듣는다.
  캘리포니아 ADAPT 활동가 릴리베스 나바로는 낙태를 "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조그마한 형제, 자매를 전멸시키는 홀로코스트"라고 명명하였다. 매년 1백60만명의 합법적인 낙태가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다.
  임신한 여성들의 약 1%는 자신의 태아가 무엇인가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사로부터 들으며, 12%는 태아가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만약 태아가 심각한 유전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면 약 50%정도의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하게 된다.
  합법적인 낙태의 제안자들에 의해서 결함이 있는 아동, 섬뜩한 이야기, 그리고 미래가 없는 기형 혹은 완전히 몸이 뒤틀린 인간 등에 대한 과도한 동정어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결함이 있는 아동을 낳은 것에 대한 부모들의 두려움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장애가 결코 재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장애우의 삶의 질이 일반인에 비해서 과도하게 평가절하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베이비 제인 도어", 그녀의 진짜 이름은 케리 린이었으며, 삶에 대한 무서운 여러 가지 예언에 대해서 마치 반증이라도 하는 듯이 자라났다. 그녀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에 그녀의 부모들은 의사와 정부의 십자포화를 맞으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을 바꾸어서 의료적인 개입을 하도록 했다.
  미국 뉴스데이지의 리포터인 캐서린 케어는 그녀의 출생 후 7년이 지난 후에 그 가족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행복한 아이를 발견했다.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 친구들과 함께 활짝 웃고, 놀고 있었다.
  "베이비 제인 도어는 의사가 공언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바르게 배우고 있다. 교육가능급인 정신지체인으로 그녀는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고 리포터 케어는 적고 있다.
  외과의사인 제너럴 C.에베레트 쿠프는 케어에게 그녀가 만약 태어나자마자 즉각적인 치료를 받았더라면 지름 훨씬 더 정상적이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여성지도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장애권리운동에서 두드러진 리더들은 선택적인 낙태에 대한 분노와 자유로운 출산의 권리에 대한 그들의 신뢰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애권리와 낙태권리운동 사이에는 일정한 선이 있었으며, 기본적인 이슈가 존재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과 의사들에게 그러한 결정을 넘기는 것에 대한 불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강요된 불임수술에 대한 반대는 페미니스트와 장애권리 운동의 양쪽에 다 이슈가 되는 것이었다.

 


장애아 낙태 종용은 모성권 침해
  의료윤리학자이며 시각장애우인 아드리엔 아쉬는 여성의 선택권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기에, 장애에 기초한 선택적인 낙태는 잘 못된 것이다. 그녀는 다운증후군, 근육병과 간은 장애를 진단 받은 태아를 낙태하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장애권리운동이 그러한 상태를 가진 아동의 삶의 질을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장애의 나뿐 점에 대해서 사회의 과장된 부정적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쉬는 선택적인 낙태와 임신상태의 중단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삶 때문에 하는 낙태는 우리가 앞으로 지탱하게 될 잠재적인 삶에 대한, 발견하고 싶지 않은 여러 가지 것들 때문에 하는 낙태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장애에 기초한 낙태는 장애우의 삶이 별로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 사회가 만약 태아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낙태할 것을 기대할 때 그 아이를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도 함께 침해된다"고 그녀는 주장하였다.
  전국적으로 가장 강력한 반낙태집단인 전국생명권리위원회는 장애권리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분리를 원했다. 1991년 하지마비장애우인 로버트 파웰이 의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나는 장애우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한다. 우리는 장애 때문에 태내의 아이를 낙태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고 파웰은 말해다.
  장애우 단체들은 낙태논쟁을 회피했다. 새로운 여러 가지 연구들은 유전적인 조사를 통해서 태아의 상태를 더욱 더 명확하게 했으며, 부모들이 선택적으로 낙태하는 것을 더 쉽게 해 주었다. DNA 재조합 기술은 이제 과학자들이 유전으로 물려받은 유전자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과학의 커다란 발견은 해답이 없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만약 부모들이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아이가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낙태할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보험회사가  낭종 섬유증(cystic fibrosis)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의 건강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캘리포니아 태평양 의료센터의 폴 빌링스 의사는 이미 그러한 사례가 존재한다고 밝히고 있다.
  앞으로 유전적인 새로운 실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유전적인 연구는 부모들이 아이에게 좋은 외모, 키, 혹은 좋은 지능을 부여하는 것을 선택하고, 경미한 장애상태를 피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계속)

 

글/ 서동명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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