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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이야기마당] 이들의 육체는 여러분 영혼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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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은 빨리 지워 버리는 게, 반복하고 싶지 않은 수난은 서둘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자 최선이다. 하지만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과거를 다시 한번 반복해야 하는 천벌이 내리게 되는 법이다.
  완전히 몰락한 경제의 틀 속에 생존하고 있다는, 이 암울한 현실의 기억이 어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직장을 일고 가족과 헤어져 길거리로 쫓겨난 이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하루 빨리 찾아왔으면 좋겠다. 묵묵히 서로의 고통을 나누는 얼굴에 다시 웃음꽃 활짝 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도, 이렇게까지 견디어 온 우리들의 모습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연이어지는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따뜻한 마음과 건강한 정신을 지닌 우리들은 이렇게 다시 태어나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반복되는 한 가지 망각의 병을 저지르고 있다. 나라 전체가 붕괴되어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민족 앞에 사죄하는 얼굴도 없으며, 찾아내려는 노력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예정에 없던 시련을 모두에게 안겨준 당사자와 집단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텐데도, 어느 누구도 "내 탓이오!"를 외치며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참회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왜 우리의 현실이 이렇게 되었을까.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잘 못되었기에, 작은 꿈 하나를 간직하며 살아가던 우리들이 그 꿈마저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육체는 단지 껍데기일 뿐이라는 가정으로 생각한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정신이자 영혼이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된 원인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은 껍데기만 추종하고 겉모습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던 세상 풍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치밀한 진행 과정보단 당장 눈앞의 결과에, 속이 썩더라도 겉만 번지르르하면 성공한 것으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버린 탓에, 필요 이상의 거품을 일으키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가꾸려는 노력보단, 최소한 남들만큼의 크기로 장만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에 지배바지 않았던가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은행 빛으로, 국민의 세금으로 빚덩이 기업을 운영했으면서도 재벌이라 으스대던 자들의 마지막 최후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이 땅의 내일을 책임질 청소년들도 정신과 내면을 응시하는 것보단, 외면의 화려함을 추종하는 거대한 연예인 지망생 양성소로 사회를 변모시켰다. 남들보다 튀는 스타일 보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또래에게 소외되지 않는 문화가 지금 그들이 순수함을 물들이고 있다. "시대가 그렇게 바뀐 걸 어떡하느냐"고 간과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급변해 버렸다는 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장애우"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장애를 얻어 고통받는 일상적 의미의 장애우들이 있는 반면, 육체적으로는 멀쩡하고 모든 게 정상이지만 내면과 정신은 부패된 채 썩어 있는 "정신적" 장애우도 현존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우리 앞에 닥친 위기 상황을 시급히 벗어나기 위해, 거짓과 오만으로 가득한 사회를 치료하기 위해, 눈꼽만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타인을 밟고 일어서는 소인배들을 청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뿐이다. 이 땅을 오염시키고 있는, 위와 같은 개념의 "정신적"인 장애우들을 깨끗이 몰아내는 일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존재들이 사회 지도층 위치에 포진함으로써, 정상적으로 살아가려는 모든 이들이 역으로 소외되는 왜곡된 형상을 이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IMF여 영원히!"를 외치던 불로소득자와 그 기생자들, 뇌물받는 것을 당연하게 만든 일부 공무원들, 짧은 선거 기간에만 국민의 봉사자가 되겠다고 떠들다가 돌아서는 정치꾼과 그 지망생들, 총칼로 민족을 짓밟고 이 땅의 역사를 오욕으로 물들게 만든 자들,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기업인들, 자기 제자들에게 고액 과외를 알선하는 교육자들, 장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치기배들, 돈만 벌 수 있다면 표절 따위는 문제삼지 않는 연예계 사업의 몇몇 종사자들, 부실 경영으로 망한 기업을 되살리겠다는 핑계로 우리의 세금을 쓰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자본가들, 더불어 위에 나열된 직책과 명단에 자기가 포함되지 않았다며 속으로 키득거리는 이들까지도 "정신적" 장애우이긴 마찬가지이다.
  "껍데기는 가고 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으라" 던 어느 시인의 외침이. 그가 떠난 지 3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가슴에 와 닿는 이유를 헤아려 봐야 한다. "4ㆍ19 세대의 총체적 실패" 로 규정지어진 국가 부도 사태 이후, 젊음을 불사르며 총칼에 맞서 싸우던 속칭 "386 세대" 마저도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가장 왕성한 의욕으로 세상에 첫 발을 딛으려던 대학 졸업생들은 비전도 없는 실업자로 양산되고 있고, 청소년 문화는 거대한 매스미디어의 비매 속에 방향성을 일고 있다. 국적도 없는 춤과 리듬이 그들의 심성을 마비시키고 있고, 그 나이 특유의 모방성과 섬세함을 이용하려는 상업 자본의 미끼 놀음에 대안 없이 휘말리고 있다.
  국민의 존경을 받을 진정한 지도자마저 보이지 않는 20세기 마지막 시점에 와서도 가진 자가 더욱 많이 갖고, 높은 자리에 앉고 앉았던 자들의 비열한 범죄는 용서가 되며, 힘있는 자의 주머니는 갈수록 두둑해지는 현상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빈털터리가 된 경제와 우리의 주머니는 언젠가는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공동체 의식이 파괴되어 가는 정신과 정의의 붕괴는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 말을 할수록 답답해지는 현실에 대해 푸념하기보다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정신적 독소부터 제거 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리라고 믿는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의 영화(榮華)는 한 편의 싸구려 영화(映畵)처럼 허망하게 곧 사라질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우리가 살아있음"이고 "우리 함께 살아갈 내일이 남아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 내면에 기생하는 정신적 독소들이 존재한지는 않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를 진지하게 반성해 보는 것도, 오늘의 고통을 하루 빨리 잠재우는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1982년의 뜨거웠던 여름 어느 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경재 신부님이 성(聖)라자로 마을에서 하셨던 강연의 말씀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겨져 있다. 상대적으로 건강한 신체를 가졌던 우리들에게, 신부님은 가슴이 뜨끔해지는 당부의 말씀을 나지막이 전하셨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에 의미가 담긴 시선을 던지시면서
  "온전한 신체를 가진 여러분이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았을 때, 여기 있는 나환자들의 눈이 하나 둘씩 멀어집니다. 여러분이 손대지 않아야 할 것에 손을 댔을 때, 우리 나환자들의 손이 문드러집니다. 여러분이 가지 않아야 할 곳을 찾아갔을 때, 여러분 대신 이들의 발가락이 하나씩 끊어지고 있는 겁니다. 이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단지 신체 건강하다고 오만에 빠진 여러분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 짊어질 뿐입니다. 이들의 육신은 여러분 영혼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글/  채지민 (시대문학 시부("93) 및 자유문학 소설부("95) 등단. 제25회 삼성문학상 수상. 시집 <아직도 너를 부르고 있는 것은>, <그대에게 가는 길><이별하기에 슬픈 시간>)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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