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보다도 참혹했던 정신지체인 시설의 반인권상 보고 > 문화


감옥보다도 참혹했던 정신지체인 시설의 반인권상 보고

동정은 싫다 제 10장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본문

  "20여명의 젊은이들은 잠겨져 있는 방 가운데 의자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무릎이 모두 벗겨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태아처럼 무릎 사이에 머리를 넣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한 젊은 심리학자는 어느 정신지체인 시설을 둘러본 직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가 적극적인 행동치료를 실시한 1년후 81%의 사람들이 변기를 사용하고, 91%의 사람이 옷을 입을 수 있게 됐으며, 수저를 사용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시설에는 장애우가 아니면서 행정착오로 그곳에 갇혀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번 호에는 바로 몇 해 전까지 실재했던 미국의 정신지체인 시설의 충격적인 반인권상을 고발한다.

 

 

  저자 :  조셉 피 쉐피로
     이 책을 쓴 조셉 피 쉐피로는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인 유에스월드앤리포트지

     기자로서 사회정책에 관한 다수의 기사를 썼다. 그는 미국 알리샤 페터슨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미국 장애우 인권운동을 연구해서 이 책을 썼다.

  역자 : 서동명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중에 있다.

 

 
"페리볼트"라는 정신지체인 시설에서 일어난 일들

  정신지체인을 위한 주립병원인 페리볼트 지방센터의 공동묘지는 언뜻 봐서는 그곳이 묘지라는 단서가 어디에도 없다. 가장 자리를 따라 있는 빨간 벽돌집은 그곳에 살고 있는 시설생활자들의 거주지인데 그 옆을 자나 화살표가 표시 된대로 따라갔다. 나는 그 묘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6피트 정도 높이의 하얀 관이 바로 내 발밑에 묻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떠한 묘석도 이곳에서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에 각각의 무덤은 1피트 정도의 길이와 3인치 정도의 평평한 갈색돌에 적힌 숫자들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각각의 돌의 높이는 흙과 같았다. 약 1천2백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동들이 그곳에 묻혀 있었으나 이름도 없고, 태어난 날이나 사망한 날도 적혀 있지 않았다.
  또 그들의 잊혀져간 삶을 이야기해주는 어떠한 비문도 없었다. 1924년 전에 페리볼트에서 사망한 다른 4백87명은 또한 미상의 숫자들로 적혀 있었는데, 이곳은 풀들로 뒤덮여져 있어서 아예 접근도 힘든 곳이었다.
  나는 내가 대학생일 때 만났던 짐이란 친구를 찾기 위해 미네소타의 페리볼트를 방문한 길이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짐이 13살이었을 때였다. 그는 단지 짧은 분절음으로만 말을 했고, 자동차에 아주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청바지 주머니에 장난감차를 가득 채워 다닐 정도였다.
  그는 당시 정신지체인을 위한 시설인 페리볼트 주립병원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1940년대까지, 그곳은 소위 정신지체인과 간질병 환자의 집단 수용시설이었다.) 페리볼트는 미네소타에서 그 목적으로 세워진 첫 번째 시설이었던 것이다. 1861녀에 소위 "저능한 아이들"을  위해서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그 때 이후로, 이 빨간 벽돌 건물과 조그만 막사스타일의 주거지는 단풍나무와 소나무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7백60에이커의 숲 속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1970년대에 처음으로 짐을 만났을 때,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미네소타는 그러한 대형 시설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당시 지미라고 불렸던 짐은 위탁가족과 함께 살거나 공동생활가정 (그룹홈)으로 옮겨가는 대상장의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시설을 떠나기 전에는 6살 때 페리볼트에 보내지기 전에 그가 했었던 것처럼 다시 집에서 생활하는 경험이 필요했다.
  그는 시끄러운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는 것 대신에 저녁식탁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또 그는 한 줄에 36개의간이 침대가 놓여 있는 막사 대신에 자신의 방에서 잠을 자는 것도 연습해야 했다.  근처 대학의 11명의 친구들과 함께, 나는 짐을 비롯해 페리볼트에 있었던 장애우들을 위한 전환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즉 그들을 각자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한 아동을 일반적인 가정 환경에 적응시키는 것이었다.
  1973년 페리볼트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직원들은 우리들이 그곳에 많은 거주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여기저기를 돌아보도록 했다. 그곳의 장애우들은 모두 공동생활가정이나 위탁가정에 보내어질 아이들이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수줍은 금발의 소년, 집을 선택했고 그의 14번째 생일이 되기 몇 주전에 우리집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했다. 나에게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짐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호기심과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자유의 경험으로 인해서 아주 소란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우리의 오래된 집에 있는 나무의자들로 돌진하곤 했는데, 나는 언제나 그의 몇 발자국 뒤에서 그를 잡으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는 문을 열고 방의 침대로 뛰어 들어갔다가, 자신의 눈앞에 낯설게 펼쳐진 모든 방들을 탐험하고, 각종 가구들과 책상을 관찰했다. 그는 특히 마루바닥에 놓여 있는 하키퍽이나 침대바닥의 다리바퀴와 같이 동그란 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짐은 나와 전혀 대화를 하려고 하지도 않고, 질문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는 나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이상한 소리만 내질렀다. 또 혹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의 문장은 결코 한 단어를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간 후에 우리는 마음이 통하기 시작했다. 짐의 수줍음은 조금씩 완화되었고, 나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내리라 기대했었지만, 사정이 있어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해가 지나고 나서 다른 학생이 계속해서 다음 두 해 동안에도 그를 캠퍼스로 데리고 갔지만, 나는 그를 떠나야 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일년이 지났을 때, 우리가 맡았던 12명 중 5명은 위탁가정이나 공동 생활가정으로 옮겨갔다. 짐은 그 속에 속하진 않았지만 대기자 명단의 앞자리에 남겨지게 되었다.
  내가 그와 함께 했던 시간도 어느덧 16년이 지나갔다. 장애권리운동의 시작은 내가 그를 마직막으로 만났던 그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장애우의 삶의 여러 가지 변화에 대해서 글을 썼을 때, 나는 때로 대학에서 짐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그 때 그는 자신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수레를 가지고 학교에 왔다. 나의 룸메이트와 함께 나는 이 수레를 조립하는데 아주 어려움을 겪었다.  복잡하게 적힌 여려 지시사항 혼란스러워울 뿐이었다. 우리들이 어떤 볼트를 어디에 끼워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우리들이 한 시간 이상을 헤맨 후에, 짐은 우리의 어리석은 행위에 지루함을 느꼈는지 조금 짜증을 내기시작 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에게 조용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는 현관에 그를 앉혀 놓고, 잠시 다른 곳에 갔었다. 내가 몇 분 후에 돌아왔을 때, 짐은 자신의 힘으로 조립한 수레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 지시사항을 읽을 수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대신 기계를 아주 잘 다루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짐과의 추억

  이제 30살이 되었을 짐을 찾기 위해, 나는 콜린 위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발달장애에 대한 미네소타 지역 위원회의 위장으로서 위크는 정신지체인의 권리를 위한 투사이며 옹호자로서 전국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짐을 찾을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나쁜 경우는 그가 아직도 페리볼트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지만 다음으로 나쁜 것은, 그를 돌보아 주는 사람이 전혀 없는 커다란 공동생활가정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으로 훌륭한 사례관리자가 그를 발견해서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면, 작은 공동생활가정이나 자신의 집에 보내져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지 몇 통의 전화 끝에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즉 그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16살 이후로 짐은 여전히 페리볼트에 있었다.
  내가 그의 주소를 알아낸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페리볼트를 찾았다. 나는 그곳 묘지를 돌아보면서, 짐과의 재회를 준비하기 전에 잠시동안 생각을 정리했다. 나는 과연 짐을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그 시설을 나오기를 원하는지를 보기 위해서 페리볼트에  간 것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 며칠을 짐과 보내는 동안 독립적으로 일을 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공동생활가정과 직업프로그램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전에 결코 이러한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짐을 담당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짐이 지역사회로 나가기를 원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그가 이야기하는 어법이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짐을 보았을 때 페리볼트에는 약 1천2백여명의 장애우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5백여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아직도 시설밖으로  보내기 위한 긴 대기명단이 있었다. 재정이 부족하고, 공동생활가정에 적당한 장소도 부족하였다. 나가기 위해서 관리되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짐은 그를 옹호하여 행동할 수 있는 어떠한 가족이나 친구도 없었다. 결국 그는 그런 체제의 틈에 끼어 있었으며, 시설에 남아서 아무런 표시도 없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페리볼트에서, 자원활동자는 나를 어두운 매점에 데리고 갔다. 내가 들어갔을 때, 짐은 가하고 호기심이 강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친한 친구의 모습이었다. 벤치에 앉아서 나는 짐이 재치있게 수레를 조립할 때 함께 한 마지막 시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금도 장난감 자동차를 늘 품에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나보다 6살이 어린데도 불구하고, 그는 나보다 더 늙어 보였다. 눈가는 검었고, 사진을 들여다 볼 때, 실눈을 뜨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야윈 체격과 웅크린 어깨 때문에 원래의 그이 키인 약 163cm보다 더 작게 보였다.
  3일이 지난 후에, 나는 내가 왜 짐과 그렇게 즐겁게 지냈었고, 그가 그렇게 나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하는 지가 생각났다. 첫째 날 저녁에 우리는 오와토나에서 열리는 축제에 가서 카레이스를 보았다. 그는 바퀴의 테두리가 하얀 차를 가장 좋아하는 차로 찍었다. 또 우리는 축제에서 여러 가지 놀이기구들을 탔는데, 범퍼카에서 짐은 그가 그것을 어떻게 운전해야 하는지를 전에 배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서로 부딪치는 재미로 타는 범퍼카를 짐은 부딪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속력을 높였다. 그는 자신의 작은 빨간 차에서 숙련되게 나와 다른 운전자들을 피했다. 그는 날카롭게 돌렸고,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이고 속도를 더 내게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탈것에서도 그는 역시 그랬다. 썬더볼트에서, 짐은 어떻게 우리의 작은 차가 중심에 매달려 있고, 어떻게 기어와 레버가 우리를 잡아주고 돌려주는 지를 알고 있었다. 그 후 탐 크루즈가 승용차를 개조한 경주용차를 운전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폭풍속으로"를 보러 갔다. 짐은 그 영화에 빠져들었으며, 특히 빠르게 달리는 경주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마지막 날 , 짐은 나를 자신의 창고에 데리고 갔다. 그 곳은 작은 방과 같은 곳으로 타이어, 자전거 프레임 등을 보관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복잡한 수레의 패턴과 각종 바퀴의 메카니즘을 활용하고 있었다.
  한 상담원이 짐에게 1979년에 선보인 자전거로 동력을 얻어서 날아가는 글라이더의 사진을 그에게 보여준 모양이었다. 이 것을 기억해서 짐은 이 모델을 만들기 시작해, 3미터가 넘는 날개에, 자전거와 사람을 실을 수 있는 가벼운 나무로 된 비행기 모형을 만들었다. 이 창고는 짐의 신비한 실험실이었던 것이다. 좁디 좁은 콘크리트 석탄창고로 쓰이던 곳이었지만, 거기다 아주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서 어렴풋이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짐의 생각은 1분에 1백마일 이상을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고, 차의 새로운 디자인을 생각했다. 나는 그의 계획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마루에 나무 조각들을 펼쳐놓았고, 나에게 펜을 달라고 자신이 자르기 원하는 곳을 표시하였다.


 

참혹한 다코타, 그리고 그 놀라운 변화

  나는 그이 기록들을 보면서 짐이 그 주에 오게 되었던 이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기록 파일에 의하면, 짐은 아홉 형제중 다섯째로 1959년 10월에 미니애폴리스에서 노동자로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란색 잉크로 간략하게 적어놓은 것을 보면 그의 사회력에 대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짐이 두 살 때, 그의 과잉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다. 3살 때 그가 부엌의 싱크대 밑에 있는 것을 어머니가 발견한 후에도 종종 짐은 배수관에 달라 붙여 있었다. 4살 때 집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고, 6살 때는 달리는 차에 돌진하기도 했다. 당연히 많이 다치곤 했다.
  몇 달이 지난 1966년 2월에, 짐은 미네소타에 있는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을 위한 온트코 씨의 하숙집에 보내졌다. 그러나 온트코 씨와 그녀의 이웃들은 짐이 통제가 안 된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사회복지사에게 그가 가구들을 망쳐놓는다며 경찰을 불러 그를 다시 돌아가도록 내쫓아 버렸다. 지능테스트 결과 그이 아이큐는 30이하인 것으로 밝혀졌다.
  미네스타 대학의 아동심리학자들은 짐을 조사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심한 정신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1966년 9월 22일에 헤네핀 카운터 보호관찰 법원의 검사관의 이사회가 짐을 시설에 입소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안건으로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에 그의 어머니가 참석했다. 검사관들은 짐이 "정신적 결함" 이 있다고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곱 번째 생일이 지난 며칠 후에 그를 페리볼크로 보냈다.
  이 시설은 짐과 같이 심한 정신지체로 분류된(label) 사람들을 위한 곳이긴 했지만 무척 잔인했다. 이곳은 1968년에 이곳에 일하려 온 미네소타 대학의 심리학자인 트레비스 톰슨에 의해서 기록되었다. 톰슨은 가장 곤란한 거주자들과 함께 일할 것을 요구 받았기에 "깊은 바다"라고 불리어지는 시설인 다코타에 갔다.
  "내가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했고, 다시 목격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 광경과 소리, 그리고 냄새를 나는 여기서 직면하였다. 이곳의 20여명의 젊은이들은 잠겨져 있는 방 가운데 의자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는데, 그들의 무릎피부는 모두 다 벗겨져서 정강이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방의 70피트 정도의 벽을 따라서 약 15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마치 태아의 모습처럼 무릎 사이에 그들의 머리를 넣은 채로 웅크리고 있었다." 젊은 심리학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톰슨은 이 혼잡한 방에서 소변과 대변이 뭉개진 가운데 앉아, 의미없이 몸을 흔들거나 걷고, 혹은 그 방의 벽을 따라 뛰는 60~70명 정도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몇 명은 벌거벗고 있거나 거의 벌거벗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손을 물어뜯거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날 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톰슨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심한 냄새를 씻기 위해 자신의 몸을 30분 동안이나 씻어야만 하였다.
  톰슨은 이러한 곳의 사람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일을 했다. 여기서 그는 후에 다른 시설에서도 모방한 "긍정적 행동변화기법"을 사용했다. 매 과업들이 완성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는 거주자들에게 상을 주었다. 톰슨이 일을 시작하였을 때 수용소 거주자들에게 65%는 변기를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 해가 지난 후, 81%의 사람들이 변기 사용법을 알게 되었다. 1년이 지난 후에는 91%의 사람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고, 수저를 사용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약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가 발견하기에, 약 79% 정도가 강한 진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에 20%이상이 줄어든, 단지 56%의 사람들만이 약을 필요로 했다.
  톰슨은 그 당시의 기자에게 "어떠한 일반인들도 6개월 동안이 다코타에 있게 되면 더 이상 정상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배설물 바로 위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실정이다"라고 지적했다. (계속)

 

글/ 서동명

 

작성자서동명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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