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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칠수씨의 불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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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찌 됐건 화살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나 날아가 버렸다. 그가 쏜 화살이 되돌아와 그 자신을 과녁 삼아 박힌다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다. 되도록 고통을 덜 받았으면 하는 게 남아있는 유일한 바램이다. 그렇다 이젠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다칠수 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설핏 잠의 늪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캄캄한 어둠 속을 그는 비지땀을 쏟으며 내달리고 있었다. 질퍽질퍽한 진흙 구덩이에 발이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발이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는 멀리 보이는 한줄기 불빛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불빛은 가까이 다가갔다 싶으면 어느새 또 다시 그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저만치 뒤로 물러서곤 했다. 몇 번씩이나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불빛이 비취는 곳에 다다라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를 끊임없이 채찍질 해대었다. 주저앉고 싶다는 생각은 한갓 그의 바램일 뿐이었다. 강한 욕구와는 상관없이 그의 두발은 상처투성이 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중에는 너무 힘이 들어 의식마저 몽롱해 지고 말았을 때 그는 어느새 낮 익은 지형에 다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야 했다. 마치 반딧불의 빛처럼 그 일대만 하얀빛에 둘러싸여 빛나고 있었다.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점은 바로 갈머리 절벽 위였다. 어린 시절 마을에 춘궁기가 닥치면 예외 없이 마을 사람들 중 한 두 명이 처참하게 으깨어진 시체로 발견되곤 해서 귀신에 쓰인 절벽이라고 가기를 꺼려하며 두려워 해마지 않았던 그 절벽 위에 그는 서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아우성소리가 몰려들었다. 신음소리, 웃음소리, 악에 받쳐 지르는 앙칼진 소리, 저주를 퍼붓는 소리, ...소리 소리들이 실체가 갖는 힘을 가지고 그를 겨냥해서 옥죄어 밀려왔다. 그는 형언할 길 없는 두려움에 짓눌려 귀를 감싸안고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러자 소리는 날이 선 비수로 돌변해 그의 온몸을 사정없이 찔러대기 시작했다. 그는 비수에 난자 당한 채 괴로운 비명을 토해내며 점점 절벽 끝으로 쫓겨갔다.

마침내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어 그가 절벽 아래를 쳐다보았을 때 그는 당연히 그 곳에 있어야 될 검푸른 바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아귀로 변해 다툼을 벌이고 있는 거대한 구덩이를 발견해야 했다. 그 구덩이 속에는 부장을 비롯하여 망치새끼, 지난 밤 "야유회" 때 그의 발 밑에서 적의에 찬 눈길로 그를 쏘아보던 빨갱이들, 그리고 멀지 않은 그의 뒷골목 시절 때 그에게 당한 주먹들을 비롯한 낯익은 얼굴들이 한결 같이 험상궂은 모습들을 하고 아수라장 속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해대고 있었다. 그는 그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쳐댔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간신히 절벽 가에 솟아 나온 암석을 붙잡고 버팅 겼지만 예리한 비수가 손등을 마구 짓찧어 대자 그는 도리 없이 아악, 단발마적인 비명을 내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야 했다.

"안 돼, 안 돼!"
다칠수 씨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의자가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그는 눈을 떴다. 몇 번 악몽을 꾸긴 했지만 오늘처럼 지독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손을 목덜미로 가져가 흩어 내렸다. 손바닥 가득 축축한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자네, 악몽을 꾸었나보군,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불시에 난데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다칠수 씨는 화들짝 놀라야 했다. 본능적인 방어 태세로 그는 의자를 박차고 후다닥 일어섰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날세 김 부장이야 진정하게"
발소리가 다가왔다. 부장이 책상을 끼고 돌아 그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괜찮아. 몹시 피곤했나 보군, 하지만 자네답지 않게 보고를 거르다니, 지난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부장은 굳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흥분할 때마다 내쏘는 부장 특유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칠수 씨를 옭아맸다.

"전적으로 제 불찰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지금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다칠수 씨는 피부에 와 닿는 불안감을 느끼며 잔뜩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이미 보고 다 받았어, 다 끝난 일이야. 내가 이렇게 내려온 건 자네를 탓하자는 게 아니야. 자네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부장이 책상 모서리를 의자 삼아 걸터앉았다.
"앉게 피곤할 텐데 앉아서 우리 얘기하지"
다칠수 씨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를 노리고 다가오는 불안의 실체가 감지되는 듯 하여 그는 잠시 진저리를 쳐야 했다.

"오해하지 말고 내 말을 들어주기 바라네, 일이 어렵게 꼬였어, 이유야 어찌됐건 이번 작전은 실패야, 자네답지 않게 그런 엄청난 실수를 범하다니, 실망이 크네, 자네가 그런 실수를 하지만 않았어도 우린 일을 깨끗이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거야, 결론부터 얘기하겠네. 상부지시가 내려왔어. 자네에게 근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네. 대책회의에선 해고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됐지만 내 모가지를 걸고 저지 시켰어. 이 바닥에서 해고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아마 자네도 잘 알 거야, 아무튼 이번 일은 나에게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어. 그렇게 알고 이 지시를 수락해 주게, 자네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로서는 더 이상 별 뾰족한 방법이 없네, 자네 보수는 지장이 없게 매달 통장에 입금시키겠네, 곧 바로 짐을 싸게 얼굴을 보이지마, 별도 지시가 내려질 때까지 근신해, 잠시 해외에 나가있는 것도 괜찮겠지. 이상이야"

다칠수 씨는 허공에다 눈길을 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앞으로 그동안 회사를 위해, 직접적으로는 부장의 지시에 의해 움직인 자신의 지난 시간들이 한꺼번에 다가왔다가 사라져갔다. 그 시간의 끝을 이렇듯 허무하게 맞아야 한단 말인가, 우습게도 다칠수 씨는 내내 그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자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이번 일은 국가 백년대계가 걸린 중 차대한 문제야 도리가 없어.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그렇겠죠. 어련하겠습니까. 후후.. 다칠수 씨는 비로소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 밑바닥에서 소름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몹시 춥다고 느낀 순간 다칠수 씨는 웃음을 멈추고 정색을 하고 부장을 노려보았다. "김성진 선배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이번 작전에 망치를 붙인 건 전적으로 당신의 의도 하에 이루어진 일입니까?"

부장의 안면근육이 천천히 분노로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다칠수 씨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물론 부인하겠지요. 후후 대단하십니다. 대단해요.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결국 내가 당신의 술수에 넘어간 꼴이 됐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당신이 나를 경계한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내가 두려웠던 겁니다. 내가 너무 빨리 큰다고 생각했나요. 내가 어느새 커서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아니면 이제 써먹을 만큼 써먹었으니 소모품은 당연히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닥쳐!"
"그러죠 저 역시 더 이상 이야기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다칠수 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부장을 등지고 돌아섰다. 단호한 음성으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가십시오. 그러나 이건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이 다칠수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가 내 자리예요. 아시겠어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단순히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바쳤습니다. 이제 제가 못할 일이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내 모가지가 필요하다면 모가지를 바쳐서라도 반드시 이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공연히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마, 고집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야"
"쓰레기처럼 살아온 놈입니다. 이 다칠수 막말로 밑져봤자 본전입니다. 이제 새로운 줄을 찾겠습니다. 당신 줄은 끊어졌습니다. 변한 건 그것뿐입니다."

"망치 건은 오해야 그 사실만은 자네도 알아둬,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치가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그리고 쓸데없이 말썽 일으키지마, 다 자네를 생각해서 하는 얘기야."
부장이 다가와서 다칠수 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다칠수 씨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장이 체념한 듯 돌아섰다. 부장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을 빠져나갔다. 방문 닫히는 소리가 한순간 다칠수 씨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다칠수 씨는 혼자가 되자 필요 이상의 힘을 주어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쉬기 시작했다. 그런 자세로 한참을 서 있다가 그는 돌아서서 방금 부장이 빠져나간 쪽을 적의에 찬 눈길로 노려보았다. 싸우고 싶다는 전의가 가슴속에서 들 끊어 올랐다. 딱히 부장이 아니더라도 상대가 있다면 한바탕 붙고 싶었다.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피 튀기는 질긴 싸움을 하고 싶다. 다칠수 씨는 그런 생각을 하며 터져 버릴 것 같은 안타까움에 온몸을 부르르 떨어대었다.

방안의 정적을 깨뜨리며 요란스레 전화벨 소리가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다칠수 씨는 언뜻 부장을 생각했다. 전화를 받고 싶지가 않았다. 저 혼자 울어대게 놔두었다. 하지만 전화벨 소리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다칠수 씨는 할 수 없이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칠수 입니다"
"과장님 저 윤입니다."
"무슨 일이야?"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부장님이 직업 다녀가셨습니다. 저희를 호되게 질책을 당했습니다.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과장님은 아무 일 없으십니까?"
"아무 일 없어, 그 일 때문에 전화했다면 끊어"
"실은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방금○○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혹시 삼겹살이라는 애 알고 계십니까?"
"무슨 얘기야?"
"자세한 내막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까불다가 달려온 앤데 막무가내로 과장님을 들먹인다는군요. 과장님 후배라던데..."
"가만있어 봐. 삼겹살이라고 했어?"
"네, 그렇습니다."
다칠수 씨는 정신을 모아 기억 저편을 더듬어 보았다.(다음 호에 계속)

이태곤/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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