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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나,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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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환점"이라는 말을 주의 깊게 되씹어 본다. "되돌아오거나 되돌아가는 지점"이라는 국어사전의 단순한 낱말 풀이가 생각의 꼬리를 더욱 길게 잇게끔 만들곤 한다. 서른여섯 나이에 접어든다는 시간적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되돌아가서 되찾아야 할 무언가의 여운이 남겨져 있기 때문일까. 요즘 내 마음에서 집요하게 맴돌고 있는 화두가 있다면, 그 한마디는 바로 반환점이라는 세 글자뿐이다.

만년 이십 대 나이로 지낼 것 같았던, 영원토록 청소년기의 꿈과 희망 속에 살리라 믿었던 내 육신과 마음이 어느덧 서른 중반의 언덕 위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된다. 아주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완성된 어른같이 보였던 아버지께서 그 연령이었을 당시가 떠오른다. 그때에도 나는 밑도 끝도 없이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곤 했었다. 내가 저 나이가 된다면 뭐가 되어 있을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까? 아니면 삼촌 같은 사람이 될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일을 하는 어떤 모습으로 서른여섯이란 나이를 헤아리고 있게 될까.

첫 번째로 떠올랐던 생각은, 그 나이가 되려면 서기 2000년이 지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멀었던 시간이 바로 서기 2000년이라는 아득한 미래였다. 어릴 적의 대통령 이름은 무조건 박 아무개 씨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연도의 표시는 누가 뭐라 해도 무조건 19OO의 숫자로 적혀져야 했던 게 절대법칙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2000년이란 시간이 온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물리치며, 자연스럽게 내 인생의 모든 계획은 1999년까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 다음은 아예 보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교복 입은 까까머리의 내 모습이 낯설기만 하던 시절에 대통령의 이름이 최 아무개 전 아무개로 변하는, 그야말로 모든 가치기준이 단번에 뒤바뀌는 혼란이 몰아닥쳤고, 그때에 이르러서야 2000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무서움 비슷한 게 엄습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절대기준이었던 19OO의 연도 표기가 실제로 뒤바뀔지도 모르겠다는 무력감이 사춘기의 내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장래 희망을 펼쳐놓고 행하던 저울질마저도 덧없는 일이라는 체념이 그 즈음에 떠올랐던 것 같다. 과연 내 희망사항대로 세상이 움직여 줄까? 세상 속에서 나라는 인간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최고라고 자부했던 나름대로의 의욕이, 사실은 최악이었음을 감추려던 자만심의 다른 형태가 아니었을까? 고등학교에 가면, 대학에 간다면, 사회로 나간다면 나는 무엇을 하는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살고 싶은 대로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그 이전에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먼저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짙게 낀 먹구름 빛의 회색이었고, 실제로 내 성격 자체도 그 색깔로 물들여진 채 탈색될 줄을 몰랐다. 또래의 친구들 대신 대학생 직장인 등의 어른들과의 시간을 즐기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이해된다. 무언가로부터 도피를 해야 하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몰랐다는 사실. 어딘가로 떠나가야 하는데, 그 어딘가가 도무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절망감. 꽉 막힌 내 숨통을 트이게 만들 방법은 그 시기를 미리 겪고 살아가는 어른들, 그들과의 대화가 유일한 대안과도 같았다.

지나치게 겉늙었던 당시의 내 생활이 왜 그랬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할 필요까진 없겠지만, 지금의 시점으로 돌아보는 당시의 모든 것은 숨가쁜 나날의 연속이었고, 도피와 갈구의 엇갈림 속에 헤매던 그늘뿐이었다. 그런 과정 끝에 이십 대를 맞이하면서 최루탄과 투쟁 열기뿐이었던 대학가에 젊음을 흩뿌렸고, 사회인이 되어도 이곳저곳을 남들처럼 뛰어 다니는 정신없음의 연속이었다. 늘 어딘가에 존재했지만 방향을 잡지 못하기 일쑤였고, 그래도 멈춰 설 순 없다며 다시금 달음질치기를 몇 해와 몇 년. 서른이라는 나이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와서, 내 생활 전체를 보이지 않게 규정짓게끔 만들었다.

남자 나이 마흔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던 누군가의 말은 논외로 치고 싶다. 그렇더라도 칠십 평생이란 숫자놀음의 꼭 절반 지점을 넘어서는 느낌은 그 무게가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젊은 시절, 모두가 썩었다고 외치며 비난하던 그 기성세대 그룹에 스스로가 당사자로 서 있다는 것-서기 2000년은 내 인생에 오지 않으리라 믿던 어린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나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공개되지 못할 마음 속 일기장에는 말줄임표만이 길게 이어질 뿐이다.

이대로 사십이 되고 오십 대가 되어야 할까? 주어지는 대로 순간 순간에 순응하면서, 사회의 법칙에 합당한 인생으로 나머지 절반을 채워가야만 하는 것일까?

21세기라는 팡파르가 울려 퍼진 이래,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는 거기에 대한 대안과 답변을 요구하는 내면의 아우성으로 들끓었었다. 사춘기 시절의 갈등을 떠올릴 만큼이었다고 말한다면, 그 아우성의 크기를 대변해 주는 표현으론 과장된 일일까? 나라는 인간을 완전 분해해서 뜯고, 들여다보고, 평가를 내렸다가 뒤집어보는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희미했던 해답이 하나둘 씩 가슴 안 여기저기에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선 대안도 없는 결론으로 모든 소용돌이를 마무리짓게 되었다.

"다시 돌아가자" 는 것, 그 한마디가 내가 내린 결론의 전부이다. 무엇을, 어디로, 왜, 무엇을 위해 돌아간다는 말인가를 묻던, 스스로에게 던지던 그런 질문은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못하게끔 만들어버린 것이다. 다시 돌아간다는 것, 하나의 계기를 통해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 이상 내 삶의 무게와 의미를 완성지을 일은 없다고 이젠 믿게 되었다.

42.195km의 마라톤이 일정 지역을 직선 코스로 관통하는 경우가 요즘엔 많지만,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경기에선 일정 지점을 기준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던 바 있다. 자신이 뛰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이미 익숙해진 길목의 풍경들을 그 반대의 시점으로 다시 되짚어야 한다는 것. 그 도착점은 다름아닌 출발점 그 자리라는 것.

"반환점"이라는 화두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의 인생 자체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 이제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항상 새롭고 뛰어난 그 무엇만을 좇으며 숨가쁘게 내달음 치다가, 문득 자기 것이 하나도 없음을 느껴야 하는 순간보다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첨단의 신제품과 새 얼굴만 추종하다가 문득 자신이 아끼고 아끼던 의미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상실감, 우리는 그 상실감의 향수 속에서도 늘 대세를 좇기 위해 남들의 뒤를 애써 따라갔던 것이 아닐까 싶다.

쉴 새도 없이 쏟아지는 신간서적의 홍수 속에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꿨던 한 권의 책, 한 줄의 문장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건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할 일이다. 수도 없이 뿌려지는 명함의 폭주 속에서 진정 소중한 이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지 못하며 지나치는 것은 아닌지, 나날이 찾아가서 인사해야 하는 얼굴들 때문에 진정으로 찾아내서 만나야 할 얼굴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젠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그렇게 지내듯이 내가 아는 이들도 그렇게 나를 잊어가는 건 아닌지, 내가 그렇게 살아가듯이 나를 간직해야 할 그들 역시 내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되짚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무언가의 목표를 위해 나름대로의 생을 살아간다. 그 목표가 크든 작든, 높든 낮든, 멀든 가깝든 간에 그 외형의 질감이 중요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 목표를 위해 어떻게 살아왔던가를 혹시 잊고 지내는 건 아닐까?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역경을 당하면서도, 그 꿈을 놓치지 않고자 노력했었는지를 기억 저편에 내버리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나날이 수정되고 뒤바뀌는 생활 단편들 때문에, 자신이 가야 할 진짜 인생을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해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해답을 잊고 지냈던 것도 나 자신이었고, 찾으려는 손길마저 엉뚱한 곳을 더듬거리고 있었음도 이젠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겨진 건 뭘까. 그렇게 헛손질을 계속 이어가야 할까? 그렇게 잊고 지내는 채로 몇 년 후에 똑같은 한숨을 똑같이 내쉬어야 할까?

아니다. 그렇게 헛된 발길과 자기 위안으로 덮어두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가와 버린 인생의 반환점, 나는 그 값어치를 인정하고 싶다. 꼭 시간적인 반환점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진심으로 찍어야 할 하나의 방점을 위해 스스로의 반환점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인생의 마라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다시 한번 물어 본다. 인생이라는 42.195km의 마라톤에서 나는 지금 어디를 뛰어가고 있는가. 뛰고 있는가? 주저앉아 남들을 탓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편 어디에서 이미 포기한 채로 골목길에 들어서 있는 건 아닐까? 대답은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대답마저 기피한다면, 더 이상의 시간과 기회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내 마음속의 반환점을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이젠 그 시간이 왔음을 열린 마음으로 굳게 인정하고자 한다.

 

글 : 시인, 소설가 채지민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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