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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문의 영화이야기]<어둠속의 댄서>, <에론 브로코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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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댄서

 

"세상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옛날 시골의 어느 이발소 액자나 관광지 기념품 점의 나무 조각 속에서 자주보던 이 말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가슴에 사무치듯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둠 속의 댄서)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절망의 연대기라고 할만큼 슬프고 가슴아픈 사연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미국 워싱턴주의 어느 작은 마을, 남자 아이 하나를 키우며 발버둥치듯 살고있는 "셀마"의 처지는 산넘어 산이다.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아들에게 밝은 세상을 찾아 주겠다는 일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세상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공장에 다니며 힘겹게 일하며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지만 두꺼운 안경을 끼고도 동서남북을 가리기 어려운 그의 가물거리는 시력은 공장 일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경찰관인 빌은 셀마 모자에게 집을 빌려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도움을 주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지만 아내의 사치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는 처지다. 살림이 거덜난 지경인데도 돈이 없다면 아내가 멀리 떠날까 노심초사하던 그는 셀마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엿보고는 마음이 흔들린다. 셀마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자제력을 잃은 그는 결국 돈을 훔치고 만다.

 

빌이 자신의 돈을 훔쳐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셀마는 사무실로 그를 찾아가 돈을 돌려 달라고 애원하지만 돈을 훔친 사람이 순순하게 돌려줄리는 만무한 일. 결국 옥신각신 하던 끝에 셀마는 빌에게 총을 쏘고 만다. 그 총소리는 셀마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천둥소리로 바뀐다. 세상은 왜 이리도 잔인하고, 야속할까.

 

하지만 그때마다 셀마는 노래한다. 절단기의 칼날이 손목 근처를 오갈 때도, 공장에서 쫓겨나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때도 노래로 자신의 처지를 달랜다. 돈을 훔친 남자가 오히려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댈 때도 "바보 같은 셀마, 다 너 때문이야"라는 자책의 노래를 부르고, 사형대를 향해 걸어갈 때도 춤을 춘다. 셀마의 인생은 철저하게 부서지는 현실의 잔혹함과 그것을 위안하는 노래와 춤이 어둠과 빛처럼 교차한다. 그녀가 잔혹한 현실을 견디고 죽음까지도 끌어안는 것은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걸은 것처럼 자기 희생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너무도 착해서 안타까울 정도로 순박한 셀마의 행동은 차라리 바보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유로파 유로파나>나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같은 영화들을 통해 전위적 실험성을 앞세우는 작가주의 감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관객이 본다면 <어둠 속의 댄서>는 그야말로 파격이다.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모습은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진부한 영화" 원형이기 때문이다. 무슨 뜻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추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사실적 인물화를 그리는 경우처럼 세상살이의 무게와 그늘은 영화의 중심 소재로 떠오른다.

 

멜로 드라마의 단순성에 변화를 주는 것은 뮤지컬의 병설이다. 셀마가 가슴 속에 꿈처럼 지니고 있는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희망,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마음으로 흥얼거리는 노래와 춤을 멜로드라마와 함께 엮은 것은 현실과 몽환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상징한다. 또한 시력이 떨어질수록 세상으로부터 밀려나는 주인공을 받쳐주는 구원의 지팡이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전체척으로 관객의 감상에 부담을 줄만큼 난해하거나 복잡한 수준은 아니다.

 

영화연출의 인위성을 배제하며 배우들의 즉흥 연기를 강조하는 "도그마 선언"까지 외쳤던 감독이 스스로 그 기준을 내 던지며 전통적인 영화제작 방식을, 가정 보수적인 양식에 대입한 것은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긍정하며 희망으로 그들을 위로하는 대중영화의 가치에 대한 새삼스러운 인정인지 다양성을 실험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인지는 애매하지만 작가주의의 독창성과 대중영화의 보편성이 기묘하게 어울린 경우인 것만은 분명하다.

 

추천 비디오 - 에론 브로코비치

 

"아줌마"는 미국에도 있다. 적당한 세상살이를 거치는 동안 세상에 무서운 것이 뭐 있느냐는 여유와 배짱을 가진 아줌마를 아무도 못말리는 것은 우리나 미국이나 다를바 없다.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내 앞가림하기에 바쁜 어느 아줌마가 호랑이처럼 무섭게, 어미닭처럼 따뜻하게 열정과 책임감을 가진 사회적 인간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그래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에린 브로코비치>는 "아줌마 열전"이다.

 

이혼한 몸으로 아이를 셋이나 키우고 있는 에론 브로코비치 아줌마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돈은 쪼들리고 생활은 뒤죽박죽이다. 근근히 살아가던 그는 슬쩍 다친 자동차 사고를 핑계삼아 법률회사 직원 일자리를 빼앗다시피 차고앉는다. 어차피 막무가내로 버티는 일이니 사무실을 지키기는 하지만 법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게다가 성격도 더럽다.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으면 아무 때, 아무에게나 욕을 해댄다.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싸구려 향수 냄새를 풍기며 가슴을 크게 보이려고 지퍼 절반은 내리고 다닌다. 그러니 회사인들 이런 직원을 달가워할까. 어쩔수 없이 코가 꿰이긴 했지만 적당한 꼬투리만 잡히면 자를 준비를 하고 있다. "브로코비치"라는 성이 말해주듯 그의 조상 중에 누군가 잘살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온 러시아 이민자의 후손일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성공은 아득하고 현실은 고달프기만 하다. 처량한 아줌마의 처지는 이래저래 불안하다.

 

그런 그에게 인생을 바꿀만한 일이 다가온다. 거대한 화학회사가 폐수를 잘못처리하는 바람에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이 때문에 해당 지역주민들이 치명적인 질병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가정과 직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불안하고 무기력한 소시민과 그 앞에 닥친 거대한 불의와 음모.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열이지만 진정한 용기를 시험하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에론 브로코비치 아줌마는 자식 키우는 어머니, 살림하는 주부의 감성과 눈높이로 사건의 중심에 다가선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사람들을 만날수록 그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와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 가를 자각하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해서 누구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무력한 주부가 사회의 정의를 지키는 위대한 영웅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시덥잖은 사기나 자잘한 도둑질로 겨우 먹고살던 좀도둑이 위기에 빠진 비행기 승객을 구해주는 영웅으로 둔갑하는 리틀 빅 히어로나 돈만이 최고라고 믿던 교활한 변호사가 진실로 법과 질서, 정의를 신봉하는 서민의 대변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시빌 액션 같은 영화들이 다루었던 영웅신화의 반복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비슷한 소재의 영화들과 다른 부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인물과 상황의 재현이다. 이쯤 되면 현실이 영화를 따라가는 것인지 영화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 모호할 정도다.

 

따라서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하는 영화속 아줌마 에론 브로코비치는 돈과 권력을 가진 골리앗 기업의 부도덕함에 의연하게 맞서는 정의의 다윗이며, 제대로 가진 것 없는 무명의 변두리 인생이 사회의 중심으로 부각하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일상에서는 무력하게만 보이던 인물이 거대한 불의와 마주 섰을 때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용기와 힘을 빛내며 진정한 영웅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로 변신하고 저주받은 두꺼비가 왕자로 다시 태어난다는 판타지의 현대적 재현이라고 할만 하다.

 

이 영화에는 또 한명의 "아줌마"가 등장한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다. 미국영화계에서조차 여배우 혼자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경우는 드물다. 연기력보다는 외모로 승부를 거는 쪽에 가까운 줄리아 로버츠가 "나도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영화를 이끌어간다. 영화 속에서 줄리아와 어깨를 겨누거나 비슷한 무게를 지닌 스타급 배우가 없는데도 가벼운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귀여운 여인의 신데렐라 이미지 대신 서른을 넘긴 중년 배우의 관록을 새삼스럽게 확인시키는 것이다. 올해 아카데미 상의 여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것은 그같은 결과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에론 브로코비치는 그야말로 아줌마에 의한, 아줌마를 위한 아줌마의 영화인 셈이다.

 

글/ 조희문

 

작성자조희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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