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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동백꽃 환한 아침

본문

 

"내립시다!"
누가 어깨를 툭툭 치는 바람에 아저씨는 소스라쳐 일어났다. 빡빡 깎은 아저씨의 민머리를 노인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벗겨진 모자를 집어 허겁지겁 머리를 감췄다.

"어이구, 곤했던 모양이구먼. 다 왔기에 알려준다는 것이 그만…" 그런 아저씨를 쳐다보며 노인은 겸연쩍어 했다.
"아, 아니에요."
버스에 남은 사람은 노인과 아저씨뿐이었다. 아저씨는 얼결에 노인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그새 짧은 겨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여기가 끝이라우. 이게 막차니까 내일 아침에 버스가 올 때까지는 오도 가도 못하지."
노인은 묻지도 않는 말을 주절주절 쏟아 놓았다.
힘겹게 올라온 산길을 도로 내려가는 버스를 쳐다보며 아저씨는 건성 고개를 주억거렸다.

산아래 빈 들판에서 아이들이 연싸움을 하고 있었다. 한데 엉켜 주춤거리던 연이 줄을 끊고 어둑한 하늘 속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아저씨도 그렇게 세상과 인연을 끊으리라고 다짐했다.

"녀석들도 겨울이 끝나 가는 걸 아는 모양이야. 겨우내 갖고 놀던 연을 저렇게 미련 없이 날려보내는 걸 보면."

사라지는 연을 눈으로 쫓으며 노인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흘렸다.
"저기에 오는 분이시지? 먼저 분이 떠나면서 곧 새 사람이 올 거라고 하더니만."
노인은 이미 어둠에 덮인 산자락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예."
아저씨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노인과 헤어지고 난 후에도 아저씨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 멀지 않으니까 주-욱 올라가 보슈."
노인이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손사래를 쳤다. 아저씨는 노인이 가리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가지 않아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빈집이란 걸 알면서도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서야 아저씨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어둠 속에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한기와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저씨는 얼굴을 들었다.
가슴이 쿵덕거렸다. 숨을 죽이고 소리가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밖의 소리는 점점 더 요란스러워졌다. 아저씨는 엉거주춤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린아이였다. 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아이가 머리며 어깨에 눈발을 얹고 서 있었다.
"송이야…"
아저씨는 숨이 턱 멎는 것 같았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으, 추워!"
아이는 그런 아저씨를 밀치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익숙한 손놀림으로 호롱에 불을 붙였다.

송이가 아니었다. 어두운 밤에 불쑥 나타난 어린아이가 이상할 만도 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저씨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 배고파. 밥 먹었어?"
"응."
아저씨의 입과 고개가 반대되는 대답을 했다. 입으로는 그렇다고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알아채고 새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생각해 보니 아침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것 외에는 하루종일 아무 것도 입에 넣지 않았다.
"에이, 아저씨도 배고프구나. 저기에 식량이랑 김장이랑 다 있는데…"
"남의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키고 아저씨는 아이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아저씨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괜찮아. 갈 때 나중 사람을 위해 도로 채워 놓으면 되는 거야. 내가 보니까 다들 그렇게 하는 걸."
아이는 연신 산새처럼 조잘거렸지만 아저씨는 그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온통 송이 생각 뿐이라 다른 것이 들어 올 자리가 없었다. 그 사이, 아이는 어디서 고구마를 꺼내 왔다.
"먹어 봐. 맛있어. 잘 싸 놓아서 하나 얼지도 않았어. 근데 송이가 누구야? 아저씨 딸이야?"
아이는 날고구마를 우적우적 깨물면서 물었다. 순간 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던 아저씨가 슬그머니 시선을 거두었다. 초롱초롱하니 쳐다보는 아이의 눈을 바로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런 아저씨의 기분은 아랑곳없이 조잘거렸다.
"아저씨, 춥다. 군불 좀 지펴."
"귀찮게 하지 말고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둬라!"
아저씨는 아이에게 버럭 성을 내며 돌아앉았다.

그제야 머쓱하니 입을 다물더니 한참이 지나도 아이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어린아이한테 너무 매몰차게 대했다 싶었다. 그때 아이가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 어이구 아야."
아저씨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배를 움켜쥐고 몸을 뒤틀었다.

"얘야! 왜 그러니? 응?"
아저씨는 놀라 아이를 안아 일으켰다. 돌덩이처럼 차디찬 아이는 얼굴까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배가 으… 배가 아파."
"아까 먹은 게 체했나 본데 이 일을 어쩌냐?"
아저씨는 아이의 등을 두드리고 배를 문질렀다. 아이의 신음 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조금만 참아 봐라"
아저씨는 바늘로 아이의 손끝을 땄다. 손끝에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런데도 아이는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안되겠다!"
아저씨는 아이를 들쳐업고 문을 박찼다. 눈발 섞인 바람이 매섭게 달려들고 천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앞을 막았다.

아저씨는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캄캄한 밤에 모르는 길을 걷기란 쉽지 않았다. 아저씨는 얼마 가지 못해 무릎을 꺾으며 넘어졌다. 아이가 간신히 눈을 뜨고 물었다.
"어디 가?"
"응, 병원 찾아보려구. 놀랬니? 미안하다. 조심할게."
아저씨는 다시 아이를 추슬러 업으며 말했다.
"병원은 너무 멀어서 차 안타면 못 가. 나 이제 괜찮아 졌어."

"정말이야? 괜찮겠어?"
"응. 추워. 빨리 들어가자."
아이는 몸을 덜덜 떨었다. 아저씨는 아이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송이도 이렇게 업어 줬었어?"
아이가 물었지만 아저씨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에 내려놓자 아이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저씨 같은 아빠가 있어서 송이는 좋겠다."

"아니, 나 같은 아빠는 없는 게 낫단다."
아저씨는 속으로 말했다.
"송이가… 아저씨 기다릴 거야. 너무 늦기 전에 가."
아이는 벌써 반쯤 잠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아이의 말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불을 찾아 아이를 싸 놓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궁이에 장작을 듬뿍 지피고 다시 들어갔을 땐 아이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아저씨는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의 얼굴에 송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아저씨는 세게 도리질을 하며 물러나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다 잊은 줄 알았던 지난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때, 아저씨는 잠깐 잘못된 생각을 가졌었다. 그 때문에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갔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송이가 제 엄마를 따라 감옥으로 아저씨를 만나러 왔다. 그건 송이처럼 어린아이가 할 짓이 아니었다.
"아저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소.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아저씨는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일체의 연락을 끊었다. 세상일들이 하나 하나 잊혀 갔다. 하지만 송이만은 달랐다. 가시처럼 아프게 아저씨 가슴을 찔렀다. 송이를 생각하는 것도 잊는 것도 아저씨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여러 해를 보내고 아저씨는 오늘 아침에 감옥에서 나왔다. 그런데 갈 데가 없었다. 한나절이나 버스 정거장에 서 있다가 행선지도 보지 않고 버스에 올랐다. 아저씨는 그렇게 이곳으로 왔다.
아저씨는 낭랑하고 맑은 소리에 눈을 떴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그대로 잠이 든 것이었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 왔다.
"얘야 좀 어떠냐?"
아저씨는 이불을 걷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이가 없었다. 대신에 빨간 꽃 이파리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아저씨는 아이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아무리 찾아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밤새 내린 눈 위에는 발자국 하나도 찍혀 있지 않은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저씨는 호들갑스레 날아오르는 새떼들을 쳐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다시 또 그 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처마 끝에 매달려 온 몸으로 소리를 내고 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 집은 가끔씩 스님들이 와서 수행을 하는 절 집이 틀림없었다.

여기 저기 둘러보던 아저씨의 눈이 한곳에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하얀 눈을 이고 활짝 피어있는 동백꽃 뒤에 숨바꼭질하듯 서 있는 아기 돌부처. 천연덕스레 웃음을 머금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간밤의 그 아이였다.

아저씨는 아기 부처를 쓰다듬으며 다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깨우쳐줘서 고맙구나. 그래, 지나간 세월 때문에 앞으로 올 세월까지 망쳐서야 안되지. 송이를… 찾아야겠어"
빨간 동백꽃 꽃등잔에 환하게 켜졌던 아침 햇살이 아기 부처에게로 미끄러져 내렸다. 아기 부처의 얼굴에 밝으래 홍조가 번졌다.

 

 

 

 

글 정진숙 (동화작가)

작성자정진숙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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