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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맑은 기상이 서린 강마을 경기도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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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기상이 서린 강마을
경기도 여주

 

  선방(禪房)의 스님네들 고요해 졌는데/ 혼자 앉았으매 밤은 더욱 깊어진다/ 고깃배가 지나감을 알 수 있나니/ 강 복판에서 사람들의 말소리 들리누나

이 시는 중종 13년에 나온 시문집 속동문선(東文選)에 나오는 이달선(李澾善)의 시이다. 신륵사를 끼고 있는 여주 남한강의 밤 정경을 정감 어리게 묘사하고 있다.
남한강은 태백준령인 오대하 1천5백63 고지에서 발원하여 전선 아우라지를 거쳐 영월, 단야, 충주로 내려와서 다시 양평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합쳐서 서울을 가로질러 서해로 흘러든다.
  경기도 여주는 남한강이 만들어낸 넓고 비옥한 강 마을이다. 최근 골프장 등 각종 레저시설이 들어서면서 옛스런 정취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관동별곡, 택리지 등 옛 문헌에서 보듯이 여전히 맑은 기상이 남한강과 함께 유유히 흐르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천년고찰 신륵사를 비롯하여 영릉, 고달사지, 영월루, 명성왕후 생가, 여주 향교 등 여주는 아직도 많은 역사유적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이번 걸음은 남한강이 보듬고 있는 여주 땅으로 진입한다. 편의상 서울에서 출발하여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여주로 진입하기로 했다.
  여주로 막 들어서면 능현리에 한말 풍운을 몰고 다니던 명성왕후의 생가가 있다.
명성왕후는 영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서 고종 3년(1886년) 한 살 아래인 고종의 비로 입궁  한다. 대원군이 뼈대 없는 집안의 딸을 며느리로 간택한 것은 전대왕가의 외척 세도정치에 신물이 난 까닭이었다. 그러나, 소녀시절부터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녀는 일찍이 왕실정치에 간여를 하면서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한다.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난 왕자 완화군(完和君)에 대한 대원군의 편애와 세자책봉 음모였으나,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들의 득세에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파란만장한 여걸의 삶을 살았다.
  현재 남아있는 생가는 숙종 13년(1687년)에 건립된 것으로 명성왕후가 16세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명성왕후가 글공부를 하던 자리에 민비의 탄강비(誕降비)가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영의정 민유증의 신도비가 있다. 다른 비와는 달리 거북의 머리가 옆으로 향해져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여주를 찾는 이들이면 누구나 한번씩 들르게 되는 영릉(英陵)은 조선 5백년 동안 가장 뛰어난 성군이었던 세종과 소헌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읍내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영릉은 본래 경기도 광주 대모산 기슭에 있던 것을 풍수지리설에 의해 예종 1년(1469년) 현재의 위치로 천장을 하였다. 여기에서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영릉을 현재의 위치로 천장을 했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1백년 더 연장되었다는 이야기다.
영릉의 훈민문을 들어서면 세종대왕의 동상을 비롯하여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한글 창제와 관련된 갖가지 자료와 측우기 등 당시의 과학기자재를 전시한 기념관인 세종전 등이 있다.
  능은 좀더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합장릉이기 때문에 혼유석이 2개가 있다. 동자주에 12지 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석마와 문무인석 등 석물도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거기서 남한강을 건너 신라고찰 신륵하를 찾아간다.
풍치가 뛰어난 남한 강변에 자리한 신륵사는 일명 또는 "벽절"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경내에 전탑(塼塔: 벽돌로 쌓은 탑)이 있다는 데서 연유되었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먼저 다층전탑이 눈에 들어온다. 보물 제 226호인 이 탑은 국내 유일한 고려시대의 전탑 이다. 재료는 전(塼)으로, 감실은 없고, 탑신의 벽돌 사이를 넓게 면토를 발랐으나, 벽돌의 배열구조는 무질서하다. 벽돌 문양은 연주문에 당초문을 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다층전탑 위쪽에 대장각기비가 서있다.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에 대한 내력을 새긴 비석이다. 대장각은 고려 말 충신 이색이 부모의 유언으로 나옹선사와 그의 문도들이 경율론 삼장을 인출한 곳에다 고려 우왕6년 (1380년)에 이 비를 세웠다. 귀부와 이수 부분은 장방형 복련대석과 옥개석이 대신하고 있다. 비신을 보호하기 위해 양쪽에 돌기둥을 댄 것이 이채롭다.
대웅전 앞에 아담한 탑 하나가 서있다. 보물 제 225호인 이 탑은 조선 전기의 백색 대리석탑으로, 재료가 희귀석인 만큼 탑층의 부재를 모두 1매씩으로 한 소규모 탑이다. 지대의 4변 상면에는 복연화문을 조각, 하층 기단갑석은 두꺼워서 다소 중후한 느낌을 준다. 상층기단 면석에 화형과 연주문으로 장식한 우주형 모각이 있고, 각 면에는 구름과 용문이 있다. 8층탑까지는 그대로이나 그 위층 상륜부는 없어졌다.
보물 제 180호인 조사당 건물이 대웅전 뒤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다. 조선 초기의 목조 건물로, 다포계 팔작지붕 단칸집이다. 그래서 천장에 대들보가 없다.
조사당이란 그 절 출신의 뛰어난 스님의 영정을 모신 일종의 사당 성격 건물로서 이 절에서는 나옹선사를 모시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로 알려진 서왕가(西往歌)와 발원문, 회심곡 등을 지은 학승이면서 당대의 뛰어난 선승이기도 했던 그는 당시 정계를 주름잡던 신돈과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
  그를 만나러 대웅전 뒤 둔덕으로 올라간다. 거기 보물 제228호인 그의 부도와 보물제229호인 석종비, 석등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보제존자 무도는 신라의 전형적 팔각원당형 모양을 벗어난 아마계 부도이다. 금강계단 형식을 딴 사각형 기단위에 봉안된 것이 특징이다. 부도탑의 정상부는 보주로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석종형 부도에 영향을 준 작품이다.
나옹의 부도 옆에는 부도탑비가 서있다. 이 탑비는 이수와 귀부 대신 옥개석과 장방형 복련대석을 하였다. 비신 양쪽에 돌기둥을 댄 것은 대장각기비와 흡사하다.
그 앞에 앙증맞도록 아담한 석등 하나가 있다. 보물 제228호인 나옹의 석등이다. 장식성이 돋보이는 고려 말 작품으로 높이는 1.9미터, 팔각원당형 부도 양식을 빌린 이 석등은 8각 지대석 위로 복엽복판을 조각하여 우아를 더했다. 간주석이 짧고, 화사석 받침 표현 없이 그대로 놓았다. 화강암이 아닌 납석으로 한 점, 각 면마다 화창을 놓은점, 각 면마다 섬세한 비천상 등을 조각한 점...등이 뛰어나다.
이것만으로도 하루 걸음은 넉넉하다. 그밖에도 여주에는 천년 절터 고달사지, 여주 관아의 정문이었던 영월루, 목아불교박물관 등이 있다.

 

 

김재일/ 소설가, 경실련 중앙위원이며 시민모임 "두레" 회장이다. 문화역사기행모임 "두레" 는 수시로

문화유적지 답사를 실시하고 있다. 참가하실 분은 02)712-5812~3로 문의하기 바란다.

 

 

작성자김재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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