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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연재] "한국인이면서 그 정도도 몰라?"

국적 이유로 연금차별 받고 깨닫게 된 민족의식

본문

어머니는 포장마차일을 나가게 되면 나를 형제들에게 맡겼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형제들은 피곤해서 한 번 잠들어버리면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다. 어느 날 나는 소변이 마려워 도저히 참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이불 안에서 실례를 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침대에서 일부러 굴러 떨어져 방바닥에 내려온 후 바닥에 깔린 비닐 위에 실례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 방바닥에 부딪친 부위가 아파 신음하고 있는 것을 일하고 돌아온 어머니가 듣고 형제들에게 잘 돌보지 않는다고 크게 화를 내기도 하셨다.
내 나이 이십대 중반쯤 어머니가 앓아 누웠을 때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고 하루 빨리 이 상태를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
그러나 양손을 쓰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자살은 혀를 깨무는 방법 정도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만 생각한 시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는 지옥같은 생활이었다. 아버지는 입원 중이었고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 포장마차를 할 수 없게 되어 직업안정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래서 낮에 잡일을 하고 오후 5시쯤 집에 돌아오는 할머니가 우리들을 돌보아주던 때였다.

희망의 고향집에 들어간 후
 

부모님의 나이가 더 많아지게 되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걸까, 라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누나가 우연히 신문에서 ‘희망의 고향집’에 관한 기사를 읽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사라이(血井)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고, 희망의 고향집 모임의 회원으로 등록했다. 그 때에는 아직 이 건물이 들어서기 전인 1976년경이었다.
그 해 5월 희망의 고향집 창립기념일에는 많은 회원들이 모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곳에서 나는 사라이 선생님에게 “저 같은 사람도 들어올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때 “물론입니다. 희망의 고향집의 취지에 찬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리고 조금 지나 희망의 고향집이 문을 열게 되었다. 희망의 고향집이 건립될 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월 초에 어머니와 나는 약간의 돈을 기부했다. 내 연금 5만엔과 어머니의 돈 5만엔을 합쳐 10만엔을 접수대에 앉아있던 야마다(山田) 씨에게 건네며 “조금밖에 안 되지만 보태쓰세요”라고 말했다.
다음 해 3월 개소식 때 와다(和田)씨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의 기부금에 대해 감사의 표시를 해 주시면서 자주 들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 날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설령 이 시설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놀러오자”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러던 4월 어느 날 희망의 고향집의 직원인 야마다(山田), 가토(加藤), 사카이(坂井) 씨 등 3명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저희도 어쩔 수 없지만, 이 친구는 저희들이 데리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뭐라고 대답할 시간도 생각도 주지 않고 곧바로 나를 봉고차에 태워 희망의 고향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때 내 나이 27살이었다.
처음 여기 들어와서는 갑작스런 생활환경 변화 탓인지 몸무게가 22kg밖에 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27kg으로 5kg이나 늘었고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줄곧 집안에서만 생활을 했기 때문에 희망의 고향집이 나에게 있어서는 첫 사회생활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다른 사람과 어울려 지낸다는 게 고통이었다.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생활환경변화에 대한 긴장의 연속으로 항긴장제가 듣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극한상황에 놓였었다. 이러다가 내 인생 끝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도 야마다(山田)씨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그 때 야마무라(山村)씨가 희망의 고향집 제1호 사망자가 되지 않을까 해서 심각하게 걱정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병약했다. 실제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도 소화할 수도 없는 상태가 열흘간이나 지속된 적도 있었다.
6개월 정도 지나 복용약을 조절하고 현실을 수용하면서 주변 환경에도 조금씩 적응이 되었다. 다소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되자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주인(여기에서는 시설 생활자들을 주인으로 부른다)들이 적어 총 19명에 직원 10명으로 야근도 남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했다.
어느 날 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직원을 부르니까 여직원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그 여직원에게 부탁해서 해결했다. 근데 왜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부탁했을까. ‘시설이라면 여직원, 남직원 구분없이 도움받고 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까 ‘서로가 한 사람의 객체로서 장애가 있든 없든 인정하자’라는 희망의 고향집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호할 때 남자는 남자를, 여자는 여자를 개호하는 것을 철저히 원칙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과 주인을 구분하게 되는 거니까. 한사람 한사람을 완전한 남자나 여자로서 볼 수 있는 소중함, 그리고 직원과 주인의 범주를 넘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하는 중요함을 깨우치게 된 하나의 사건이었다.

글과 워드를 배우고

  
여기에 들어온 지 1년 정도 지나 주위 사람들에게 제일 충격을 받았던 것이 나보다 나이어린 친구들이 책을 읽고 워드프로세서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었다. 그 친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따라잡고 앞지르고 싶었다. 그래서 자음, 모음을 매일 열심히 외우고 또 외웠다. 그 때까지는 ‘계속’이나 ‘끝’, 아니면 TV에 자주 나오는 문자밖에 몰랐다.
여기에 오기 전 아버지께서 글을 알면 책을 볼 수 있어서 세계가 보인다며 국어를 배워두라고 말씀하신 것도 있고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직원에게 “이것은 무슨 글자?, 이것은 어떤 뜻?”하면서 열심히 묻고 물었다.
주 2회의 학습시간도 최대한 활용하여 문장이해나 문장만들기에 힘을 쏟은 결과 28세 때 처음으로 워드를 활용하여 연하장을 만들 수가 있었다. 친척이나 친구에게 연하엽서를 작성하여 보냈는데 특히 부모나 형제들이 깜짝 놀랐다.
처음 그 시설에 갔을 당시에는 말하는 방법이 서툴러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라고 꾸중을 들은 적도 많았다. 또한 한 직원에게는 내 말투가 너무 건방져 보인다고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화장실이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그러한 태도는 좋지 않다”라든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느낌이 좋다든지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전부터 나는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집에서 부모나 형제들과의 대화는 정해진 대답 이외에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매우 기뻤다. 손님이나 지나가던 사람, 채권자 등 이런 사람들과도 조금만 이야기를 나눠도 즐거웠다.
희망의 고향집에 와서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이 친구들의 영향으로 많이 변했고 지금의 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 같다. 예를 들어, 지금은 ‘마도카’라는 시설에 근무하지만 당시 자원봉사자로 와서 잠시 희망의 고향집의 직원으로 있던 쿠즈마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나의 학습지도 담당이었는데 어떤 사소한 의견차이로 심하게 싸운 적이 있었다. 그 때 쿠즈마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느냐”며 따지고 들었을 때는 정말로 뭐라고 말을 못했다.
그리고 가토우(현 마도카 직원) 씨와는 야근을 하는 날 새벽녘이면 일찍 일어나 함께 밖으로 나가 아침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가토우 씨는 만화책을 읽고 나는 그 옆에서 앞으로 살아갈 방법에 대해서 멍한 상태에서 생각에 잠긴 적도 있었다.
애광원에서 온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카이 씨는 나를 꾸짖기도 하고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다. 사카이 씨는 1년 정도 지나 나의 학습 담당자가 되어 읽고 쓰고 이해하는 것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었다. 한자를 몰라도 읽는 방법(전후 문장에서 판단하는 것) 등을 포함하여 3년간 어떻게 해서든지 사카이 씨 정도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사카이 씨는 나에겐 친형같은 사람이었다. 치요꼬 씨는 쇼핑하는 날이 가까워 오기 전날 간단한 숫자테스트를 했는데 맞추니까 굉장히 기뻐한 걸로 기억된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게 된 점이 제일 기뻤다. 그리고 여러 가지 할 수 있게 되니까 자신도 생기고 지금까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만 느껴졌었는데 하등의 차이가 없는 보통의 사람으로 느껴지는 것도 굉장히 기뻤다.
  

국적차별에 대해 공부하기 위하여

  
희망의 고향집에 들어온 지 1년, 글씨도 읽게 되고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친숙하게 되었을 때 어느 직원으로부터 “한국인이면서 그 정도도 몰라”라는 말을 들었다. 일반상식이라든지 장애우에 관한 법률등 아무 것도 모르던 나는 건방지고 철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그 사람은 “정신차려! 고생하면서 너를 키워준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면서 매우 화를 내었다. 그리고는 장애우라고 해서 누군가가 해 주기를 기다리지만 말고 스스로 하려고 하고, 알려고 노력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아는 데까지 가르쳐 줄테니까 열심히 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그 직원은 법률과 역사,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마다(山田)씨가 “너무 죄송하다, 당신은 국적이 달라 연금을 받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해왔다. 그 때 처음으로 국적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통장을 보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통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들어와서 1, 2년은 부모가 관리해서 모아둔 재택수당으로 살아왔지만 그 후에는 그 돈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나만 항상 돈이 없을까?’하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냥 우리집이 가난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버지가 자주 입원하는 바람에 어머니 혼자서 버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내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와 직면하고 나서 처음으로 나는 국적이나 연금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에게 용기를 준 사카이 씨의 힘을 빌어 국적에 의한 차별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같이 살고 있고 같은 장애우면서 왜 차별을 하는 걸까!
그리고 나서 조금 후 나는 재일한국인이면서 록밴드 리더인 백룡(白龍)씨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는 어떻게든지 그를 한 번 만나 재일한국인이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차별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백룡씨의 콘서트에 갔었다. 재일한국인으로서 차별과 싸워나가면서 당당하게 노래부르고 자신있게 행동하는 백룡 씨의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인간은 극한상황에서 필요성을 느낀다고 한다. 극한상황에서도 좋은 시가 만들어지듯이 좋은 생각도 극한상황에서 떠오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과연 지금까지 극한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던가. 부모형제가 있다는 자체 하나만으로 정신적으로 편했고 어려우면 어떻게든지 부모형제가 도와주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 나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신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의미를 더욱 더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1982년 법률개정으로 연금에 의한 차별은 없어지게 되었다.)

  

노리꼬에 대한 추억

희망의 집에 외출제도가 만들어진 후 이삼년이 지나 직원들과 함백룡 씨의 콘서트를 보러 갔다. 그 당시 나는 그 직원들로부터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더욱 더 한국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러한 때에 나는 나와 같은 한국국적을 가진 록밴드 리더인 백룡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재일한국인 문제, 국적문제 등 차별에 대해 공부하기에는 같은 민족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 록음악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적이 없었지만 차별문제를 테마로 한 백룡 씨의 목소리는 박력이 있었다.
백룡 씨는 나에게 “당신도 열심히 살아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는 “우리 함께 싸워나가요”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콘서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세 사람은 지칠 줄 모르고 백룡 씨의 음악에 취해 있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설에 들어오기 전 집에서만 생활했을 때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는 한 마디로 어머니 또는 누나가 전부였다. 따라서, 여자를 사랑의 대상자로 생각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었다. 예를 들면, 어머니나 누나와 함께 잘 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지만 타인과 잘 때라든지, 더 더욱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에는 완전히 다르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고 서로 믿는 사이가 되고 싶고 남녀관계의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면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나에게 있어서의 여자는 구름 위의 존재였다.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나는 사랑을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아기가 엄마를 사랑하고 아끼는 느낌과 남자가 여자에 대해 느끼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고 싶은 욕구와 나만의 여자로 만들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면서 나는 여자를 여자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으니까.
여기에 와서 처음으로 어머니나 누나 이외의 여자와 접하면서 여자를 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집단생활이란 평상시에는 모두가 함께 떠들고 웃고 즐겁지만 가끔씩은 홀로된 듯한 외로움이 견딜 수 없이 엄습해 올 때도 있다.
이렇게 외로움이 찾아오면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이 노리꼬다. 노리꼬는 처음 이곳에서 실시하는 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사람으로 인상이 밝고 상냥하여 부담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느끼지 못했지만 노리꼬는 다리가 약간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해서 알게된 노리꼬는 가끔씩 나에게 학교를 졸업한 이야기나 졸업하고 일하고 있다는 일상적인 얘기들을 편지로 보내주었다. 노리꼬의 편지는 나에게 굉장한 선물이었고 외로울 때마다 노리꼬가 생각나곤 했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화라도 해 볼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노리꼬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온통 노리꼬 생각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또한, 노리꼬를 생각하면 학습의욕도 더 생겨 빨리 배우고 익혀서 노리꼬와 대등한 위치와 수준에 서고 싶어서 더욱 더 분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내일로 향한 활력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후, 노리꼬는 이곳 시설과 인접해 있는 애광원이라는 곳에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굉장히 기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오후 4시경 애광원에 전화를 하여 불러낸 적이 있는데 그 때 노리꼬는 “될 수 있으면 전화를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1년 후 애광원을 그만두었고, 이삼년 지나 결혼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역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밤잠을 설쳤을 정도였다.
지금도 여름축제 때 자원봉사자로 와서 나의 개호를 맡았던 흰 T셔츠에 안경을 낀 해맑은 웃음과 상냥한 목소리의 노리꼬가 나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첫사랑의 추억을 작문한 시가 ‘일곱 색깔 콘서트’에 입상하여 곡으로 만들어졌다. 처음 작문했을 당시에는 의미가 맞지 않고 문장이 매끄럽지 못했지만 고치고 고치면서 한 편의 시로 완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가 입상했을 때에는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을 받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의 자작시를 소개한다.

 

나의 꿈을 향해

 

언젠가는 당신과 함께
아름다운 곳에 가고 싶다
예를 들어
아무도 없는 겨울바다를 둘이서만
암벽에 부딪쳤다 사라지는 희고 흰 파도
파도를 향해 큰소리로 소리치고 싶다
나의 발인 휠체어
나의 발인 휠체어
어를 버리고 파도치는 사이를
마음껏 헤쳐나간다
그리고는 당신을 양팔로 힘껏 안는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당신은 알아줄까
이러한 꿈을 당신은 주었던거야
당신은 주었어

(1982, 11, 25)

 

대안적 의사소통 체계의 실천 - 중증장애우에 대한 의사소통 전략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 Strategies for Learners with Severe Disabilities)

 

이 책은 중증장애우를 위한 의사소통 전략에 대해 논의 하고 있다. 장애우복지 관련서적을 주로 출판하고 폴 브룩스(Paul H. Brookes)에서 펴낸 이 책의 저작에는 죠 레이첼(Joe Reichle), 제니퍼 요크(Jeniffer York), 제프 시가 푸즈(Jeff Sigafoos) 등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네소타주립대학 언어병리학과 교수이자 지역사회생활 훈련연구소 훈련국장직을 맡고 있는 죠 레이첼은 중증장애우를 대안적 의사소통체계(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System : AACS)에 관한 다수의 저서 및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으며, 이 분야에 있어 선구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그는 중증 발달장애우의 지역사화 생활상 장애요인으로 대두되는 문제행동 변화의 긍정적 개임방안 개발 및 관련 서비스 전달체계 개선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재활공학 및 중증장애우의 교육재활 서비스 분야에 있어 그의 지명도는 미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매우 높다. 제니퍼 요크는 레이첼 교수와 동대학 특수교육학과 교수로 물리치료사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증발달장애우의 경우 신체장애를 동반하고 있는 중복장애우를 의미하며 이들에 대한 대안적 의사소통 체계의 적용을 고려할 경우 재활공학, 심리사회 뿐 아니라 신체적 측면 또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각돼야 하며 자세(Postures), 시스템 자체의 인체공학, 해당 체계 적용에 있어 물리치료사로서의 그녀의 경험과 기술은 내용상 완성도와 전문성을 높이는데 공헌하고 있다.

 

중증장애학생의 일반학급 및 지역사회 환경에의 통합과 초영역팀(Transdisciplinary team) 구성원간의 효과적인 협력전략 등이 요크 박사의 관심분야이다. 대안적 의사소통체계(Augmentative/aternative Communication System)의 종류에는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수화, 구화를 포함하여 그림, 사진 그 형태 또한 Communication board 혹은 수첩형의 휴대용이 있는가 하면 보이스 신디사이저 등과 같이 다양하다.

 

이 책은 1장 대안적 의사소통체계에 대한 개요, 2장 AACS 고안 및 적용과 관련된 의사결정에 대한 정의, 3장 기능적 의사소통 도모를 위한 생태학적 사정활용, 4장 의사소통의 시작, 5, 6장 요청, 거절 항목 작성, 7장 의사소통적 교류의 발전, 8장 자발성과 일반화 달성, 9장 의사소통기술 지도를 위한 훈련적 자극물 정의, 10장 적절한 자극물 통제하에서 의사소통적 행동의 도출, 11장 의사소통 기술의 습득과 문제형동의 교체, 12장 중증 장애우의 AACS 적용, 13장 스케잉 선별기술 지도에 관에 논의하고 있으며 마지막 14장은 자립기능향상을 위한 도화체계 활동에 관련된 다양한 내요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의사소통의 전형은 언어적인 표현언어(Speech)만을 생각한다. 한 개인에게 자신의 생각, 의견 등을 표현할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과 가족의 삶의 질과 선택권에 중요한 영양력을 미친다. 언어치료사, 특수교사, 사회복지사 등 장애우와 그 가족을 돕는 전문가들은 언어만이 의사소통 수단의 전부라고 믿고 잇는 장애우와 가족에게 의사소통의 신개녀과 다양한 대안적 수단에 대해 제시하면서 많은 중증장애우가 지역사회내에서 자기결정권, 선택권, 자립생활을 누리며 완전참여를 통한 사회통합을 성취하도록 도와야 하겠다.

장애아동이나 중증의 발달장애우의 의사소통에 있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부모와 전문가들을 위해 중증장애우의 기능적인 의사소통과 다양한 대안적 수단에 대한 적극적 연구 및 적용이 요구된다.

 

대출 맟 기타 문의사항

 

서대문장애인 종합복지관 사회교육팀 안상희

(02)376-6283~5/전송 376~6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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