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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번역연재] 정수영의 도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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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영

1949년생으로 어렸을 때 온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한국 국적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뇌성마비 장애우인 그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27세에 「희망의 집」에 입소했다. 이후 국적으로 인한 연금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국민연금의 국적차별을 없애기 위해 1992년 「재일외국인 연금차별을 없애는 모임」을 결성해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자립체험, 자원활동자와의 전쟁

 제12회 자립체험 〔1995.3.24-26〕
자립체험을 시작한지도 벌써 12회나 접어들고 있습니다. 반년이란 세월이 참 빠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는 요즘입니다.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무척 걱정했습니다만, 어쨌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열심히 분발해 나갈 것입니다. 이런 의욕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여자친구가 차별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원활동자를 모집한다는 전단을 내자 그것을 보고 말을 걸어온 사람이 바로 和光結 씨입니다. 정말 좋은 만남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서로가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하기 때문에 같이 행동하는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함께 쇼핑을 하거나 또는 어디에 가면 무엇을 싸게 살 수 있는지 함께 조사를 한다든지, 어쨌든 서로가 ‘자립’이라는 두 글자를 향하여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건 그렇고 요즘 어머니께서는 점점 더 협조적으로 나와서 여러 모로 기분이 좋습니다. 역시 나의 선택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제13회 자립체험 〔1995.4.7-9〕
처음 데이트를 신청했을 때 제가 和光 씨에게 물었습니다.
“이번에 어디 놀러라도 갈까요?”
“좋아요. 하지만 저는 수영 씨의 아파트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
“아파트 문 입구가 좁아서 어떻게 하지요?”
“저는 앉은걸음이 가능하니까 손만 조금만 빌려주면 괜찮을 거예요.” 雲英 씨와 저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복잡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공원이라도 가서 도시락이나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습니다. 날씨가 좋은데 왜 그녀는 야외로 나가지 않고 내 아파트를 택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는데, “그 사람의 집을 보아두면 나중에 가볍게 산보라도 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였답니다.
그래서 함께 아파트를 향했습니다. 내 집을 보고는 和光 씨가 “역시, 자립을 위한 집이라서 그런지 마음이 편안하네요”라면서 “지금부터는 서로가 도우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네요”라고 말해 기분이 더 좋아졌습니다.

 

 제14회 자립체험 〔1995.4.21-23〕
네트워크 형성에 관해 저는 어느 실습생의 했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걱정스러워집니다. 그사람은 AJU가 실시하는 파견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멤버 중의 한 사람인데 “자원활동자 서로들간의 교류가 잘 되지 않으니까 일부 장애우들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에도 다른 장애우들이 어떻게 생활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죠. 모두가 그냥 각자 떨어져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로는 자원활동자들 서로들간의 교류가 활발하다면 보다 많은 장애우들의 곁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것이 저에게도 더 많은 공부가 될테니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도 많이 생각했는데, 자원활동자를 모집한다는 것은 사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렵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만, 저는 자원활동자를 구하기 위해 전단을 돌리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적은 인원을 유용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和光 씨는 지금도 자원활동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잘해 나가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자원활동자를 모집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장애우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일을 넓혀나가고 또한 장애우 당사자들간에도 서로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15회 자립체험(의존과 배려) 〔1995.5.12-14〕

和光 씨가 “3시 30분에 자원활동자가 오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요”고 말한 것이 기억이 났기 때문에 희망의 집에서 조금 일찍 출발했습니다. AJU에 도착하니 그녀는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和光 씨에게 부탁받은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마늘엑기스였습니다. 그녀는 평소에 위장기능이 약해서 마늘엑기스를 먹으면 건강해진다고 하니까 한 번 먹어 보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문할 때 함께 주문해서 반씩 나누자고 말했었기 때문에 이날 그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대신 그녀에게는 세탁물과 간식을 부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마늘엑기스 대금과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는데 나중에 편지를 읽고는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 편지에는 “지금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어떨지 몰라도…”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순간 ‘실패였다. 너무 서두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그 전에 그녀에게 “저는 너무 기뻐서 어머니에게 ‘이러이러한 친구가 생겼어요. 그러니까 그녀를 한 번 만나주셨으면 좋겠어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어요”라는 말을 했는데,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오해를 사게 만들었고 결국 일이 틀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나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하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자립체험에는 충격적인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雲英 씨가 “이제 수영 씨의 자원활동 일을 그만두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찰의 일이 바쁘게 되었다는 것, 나를 돕는 자원활동일이 끝이 안 보인다는 것,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일은 K씨가 雲英 씨에게 여러 가지로 설득을 해서 어쨌든 해결은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雲英 씨에게 그런 부담을 준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그 동안 雲英 씨에게 너무 의존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 달에 2번 있는 자립체험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雲英 씨에게는 부담을 적게 줄 생각입니다.

 

 제16회 자립체험 〔1995.5.26-28〕

살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자전거를 도둑맞기도 하고, 자원활동자가 감기가 들어 갑자기 오지 못한다는 연락이 오기도 합니다. 특히 자원활동자가 오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은 저를 가장 곤란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자원활동자들이 원활히 잘 움직여준 편이지만, 전화를 건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면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생겨납니다. 옛날부터 나는 예감이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河合 씨에게 자원활동자가 오지 못한다는 것을 감추고 돌아가게 했습니다. 다행히 사전에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놓았기 때문에 대타 자원활동자가 와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和光 씨는 나에게 튀김 메밀국수와 쥬스를 부탁했습니다. ‘왜 하필 이럴 때 부탁을 하는 거지’ 하고 잠시 짜증도 났지만 어쨌든 부탁받은 일이니까 심부름을 해주었습니다. 和光 씨도 일전에 저를 위해 리프트가 부탁된 차를 준비해두기도 하고, 콘서트 사전답사까지 해줬었으니까요. 돌아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조금 늦고 말았지만 그 자원활동자는 열이 38도까지 오르는 등 몸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아파트까지 잘 바래다 주었습니다.
난처한 일도 종종 있습니다. 매회 자립체험시 오후 7시부터 3명이 관련서적을 보면서 연구모임을 갖는데, 어느 날은 친구가 식사케어가 조금 일찍 끝났다면서 나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좀 들어 보자면서 녹음기를 갖고 나에게로 왔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雲英 씨가 7시부터는 모임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녹음기를 옆으로 치워버렸습니다. 나에게 아무런 언급도 없이 말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자립체험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원인은 물론 나에게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 더욱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어떻게 해서든지 자립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죽을 때에는 “태어나서 정말 행복했었다”는 말을 남기고 죽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여러 많은 사람들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제17회 자립체험(자원활동자와의 교제방법) 〔1995.6.9-11〕
雲英 씨가 자원활동자를 될 수 있는 한 잘 활용하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자원활동자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맺고 싶습니다. 즉, 자원활동자와 케어를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보면 어쨌든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만남의 관계가 진정 좋은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자원활동자는 인생을 함께 하는 친구입니다. 부담없이 같이 놀고 웃고 필요할 때 도와주고, 예를 들면 연구모임을 함께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장애우중에서도 최중증 장애우입니다. 그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왼손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 것과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눈과 귀를 활용할 수 있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 정도의 일만 가능하지만 마음껏 활용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 어떤 산이나 강이 가로 막혀 있을지라도.


  제18회 자립체험 〔1995.6.23-25〕
이번에는 ‘희망의 집’ 직원과 함께 갔습니다. 지금까지 자립체험이라는 것은 저에게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자립을 위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해도 직원들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잘 느끼지 못할 것이며, 그래서 자립체험을 단지 자기 만족만으로 치부되는 것이 싫고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나고야 시에서 아파트를 빌려 어떻게 자립체험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와 같은 장애우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직원 여러분들과 같이 동행하고 싶습니다.
다른 얘기를 하자면, 이번에는 D씨에게 자립의 집과 희망의 집의 차이에 대해 알게 했다는 것이 가장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AJU의 시설장인 山田 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지만, 그 대신 어떠한 갈등상황이 발생하면 자기들끼리 스스로 해결하길 바란다는 얘길 했습니다. 게다가 장애우니까 더욱 열심히 분발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평범한 한 시민으로서 생활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山田 씨가 갖고 있는 이러한 생각들이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곤란했던 일은 자원활동 동료들간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매회 금요일 밤 7시부터 9시까지 연구모임이 있습니다. 이 연구모임은 雲英 씨와의 공부를 말합니다. 이러한 것을 모르던 S씨가 일전에 제가 놀러 갔던 라이브하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7시 가까운 시간에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雲英 씨가 아무런 사전 설명도 없이 돌려 보내려고 해서 말다툼이 발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19회 자립체험(노력)
저는 이번에는 케어매뉴얼을 만드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쉽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만들려고 하니까 꽤 어려웠지만, 어쨌든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은 슬프다고 해야 될지, 억울하다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빛의 고향’에서 자립체험에 대한 비디오를 어머니와 함께 본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끝날 때까지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너는 나고야니까”라고 한 마디 하셨다. 참고로 어머니의 성격은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외출하기 전에 같은 자립체험을 하고 있는 동료로부터 “또 놀러나가는 거야”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 말을 듣고 잠시 황당했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쉽게 함부로 말을 잘 내뱉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더 건전한 쪽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다 그저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내 인생인만큼 타인에게 삶을 맡기는 것 보다는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20회 자립체험(만남과 이별) 〔1995.7.21-23〕
이번에는 어느 자원활동자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저 올해 안으로 결혼하게 돼서 앞으로는 못 오게 되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는 심정이 참으로 복잡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축하합니다, 잘 됐군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매번 자립체험시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자원활동을 해준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겠지요.
하지만 이 정도의 일로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더불어 함께 하는 모임’에 “제 자원활동자를 다시 구해주세요”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될 수 있는 한 제 힘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참된 자립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에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21회 자립체험 〔1995.8.11-13〕
이번에는 자원활동자의 수가 지금까지는 가장 적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추석과 자립체험이 시작되는 날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향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나고야시에 남아서 자기 일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 자원활동자들은 대부분 나고야 시 거주자들이지만, 훗날 참된 자립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적은 인원으로 여유있게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과 함께 혼자일 때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자원활동을 받고 싶습니다.

 

  제22회 자립체험(1995.825-27)
25일 저녁 6시에 ‘희망의 집’을 나와 아파트에 도착한 것이 7시였습니다. 도착해서 보니 뭔가 상황이 달라 보였습니다. 아파트 문 밖으로 가구가 나와 있고 쓰레기같은 것들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아파트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헌 TV는 버렸으니까 지금부터는 이것을 사용해”, “그리고 이럴 때는 이렇게 해”라고 몇 마디 하시고는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부모는 정말 고마운 존재구나”라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님에게 더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금이 나올 곳이 필요합니다. 자립생활을 하는 것도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연금자인 나에게 있어서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는 지금부터의 과제겠지요. 하지만 저에게는 풀뿌리만남을 통한 인적 자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행복한 놈인 것 같습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옛날 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같이 최중증에다 무연금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면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저나 저의 어머니는 현재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무연금자이고 어머니는 생활보호를 수급받아 어렵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어머니는 매월 5만엔을 저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 다행히 작년부터 나고야시에서도 무연금 장애우에 대해 3만5천 엔을 지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생활보호를 받고 있는 어머니는 제가 그 돈을 받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생활보호비가 그만큼 삭감되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와 많이 의논한 결과 어머니는 “내가 한 달에 5만엔씩 줄 테니까 세대분리는 안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마음 속에는 모처럼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특별보조금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만,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다시 자립체험으로 돌리겠습니다. 자립체험도 편한 것이 아닙니다. 자원활동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못 온다는 것을 전날 밤에야 알고 자원활동자를 구하기 위해 밤새 전화를 걸어야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저와 같은 재일한국인으로 간호사 일을 하고 있는 분이 하루를 함께 해 주어서 기쁘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있던 대로 재일한국인들도 생활에 여유가 조금씩 생겨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차별이 남아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23회 자립체험 〔1995.9.8-10〕
자립체험을 시작한지도 10월이 되면 벌써 1년째가 됩니다. 잘 버텨온 것 같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의 덕분인 것 같습니다. 많은 충고와 어드바이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하나 하나를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 마디로 1년이 지났다고 해도 마음은 매우 무겁고 복잡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대로 좋은 것일까요, 정수영의 인생은?
울적한 마음을 친구에게 풀어야겠습니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도 부끄러움도 모두 무시하자,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친구들은 그냥 내버려두자, 그리고 내 생각에 공감해 줄 사람이나 나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고 같은 입장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장수영씨 당신처럼 최중증에다 무연금자인 상태에서 자립을 위해 도전히고 있는 사례는 전국에서 처음일 겁니다.  물론 무언금으로 자립생활에 도전하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애 정도가 다릅니다. 정수영씨 힘드시겠지만, 정말 분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어깨가 무거워지니깐 힘들지만 나름대로 제 페이스를 낮추지 않고 나아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자원활동가를 구하는 일입니다.  내 자신이 직접 자원활동가를 구하려고 하는데 가능하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 나가고 싶습니다.


 글/ 함께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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