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장애우의 의존성과 간병인의 부담으로 인한 갈등" > 문화


"여성장애우의 의존성과 간병인의 부담으로 인한 갈등"

[번역연재] 페미니즘과 장애우(2)

본문

 

목차
1. 제니퍼에 대한 생각, 1979
(Thinking About Jennifer, 1979)
2. 새 이론을 위한 기록
(Notes Toward a New Theory)
3. 언어와 일대기
(Language and Biography)
4. 생산성과 보폭(Productivity and Pace)
5. 비탄(Grief)
6. 어머니 비난하기(Mother-Blaming)
7. 부정과 정상화
(Denial and Normalization)
8. 통과(Passing)
9. Nature and Technology
10. 간병인과 의견 차이
(Caregivers and Difference)
11. 종속과 독립
(Codependence and InDependence)
12. 회복 프로그램(Recovery Programs)
13. 제니퍼와 나를 생각하기, 1992
(Thinking About Jennifer and Me, 1992)

 

 2장. 새 이론을 위한 기록(1)


장애가 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하다 보면 간병인(caregiver)이 장애우와 친밀한 관계자이건 간병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건 간에 장애우와 그들을 간병하는 여성들 사이의 관계에 늘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때로는 간병인 여성 사이의 관계에서도 앞서 언급한 것과 비슷한 문제들이 나타난다. 이 문제들은 페미니즘 이론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온 자매관계와 관련된 다른 어려움들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페미니즘 관련 문헌에서 엄마와 딸의 관계가 종종 언급되기는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정신적 육체적 장애를 함께 지닌 한 어린 여자아이의 엄마로서의 나의 경험은 나와 있지 않다.
장애관련 문헌에서도 그렇지만 페미니즘 문헌에서도 우리의 상황에 대해 페미니즘 관점에서 언급한 것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제니퍼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녀와 나는 정신지체를 지닌 ‘의존적인’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때 나는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분투와 관계된 나의 페미니즘 철학을 하나로 정리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한편으로 장애를 가진 여성과 간병인들의 경험을 너무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내가 알게 된 것을 페미니즘 이론에 깊이 있게 접목시킬 수 있었다. 가장 뛰어난 페미니즘 이론 안에서 울려나오는 깊이 있는 공감은 우리의 삶 속에 내재되어 있다.
장애우를 돌보고 치료하는 여성들 간의 관계는 장애우, 여성(특히 엄마와 딸), 전문 간병인에 대한 사회적 기대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이 모든 기대들(때로 깊이 내면화되는)은 여성성의 정형(定型)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장애를 가진 여성과 간병인 여성 모두에게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여성에 관한 전통적 가치와 도덕성은 이런 관계에서 커다란 강점을 지니고 있고 페미니즘 이론의 의미 있는 확장에 잠재력을 제공한다.

 

독립성, 생산성, 그리고 장애

 

장애와 관련 있는 여성들 간의 관계를 밝히는 데 기초가 되는 것은 의존성과 자율성에 대한 사회적 기대이다. 전문적인 문헌이나 대중적인 문헌 모두 ‘의존성에 대한 문제’라고 정의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문제는 의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이고, 간병인의 문제는 의존적인 타인을 돌보는 일로 인한 좌절과 피로이다. 이와 같은 추론은 마치 단순히 극단적인 양극만을 허용하거나 그것만이 바람직한 것처럼 남성의 독립성과 여성의 의존성 사이를 이분하는 것에 기반한다. 이분법은 특히 신체적인 면뿐 아니라 거의 동시에 감정적인 면에서도 충분한 능력을 갖춘 성인이 강인하고 ‘적합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신체에 대한 예찬에 의해 또 다시 강화된다. 한 가지 특성을 가진 사람은 반대 특성의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관념이 장애를 가진 이들과 간병인이라는 대조되는 관계에서는 더욱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물론 어떤 장애 여성들은 간단하게 여성적인 수동성에 기꺼이 젖어들 수도 있다. 즉, 자신이 뛸 수 없는 사실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일반화시켜 버릴 수도 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해 현실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마치 재앙에 닥치기라도 한 것처럼 거부해 버릴 수도 있다. 일례로 몇 년 전 내가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장애와 의존성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을 때 마비 증세가 있는 한 여성은 건설업자나 신체가 건강한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집을 짓겠다고 주장했다. 이 얘기를 듣고 참석자들은 지대한 존경을 표시했다. 아무도 그녀의 ‘독립성’에 대해 부적절하거나 과도한 일이라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드레 로드는 유방 절제술 이후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양극단으로 향하게 하는 이와 같은 외부 압력에 대해 얘기했다. 병석에 있는 동안 그녀의 수동성은 서서히 강화되어 스스로 “전혀 힘이 없고, 감정적으로는 공허하며, 심리적으로는 감상에 빠지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보조장치를 채워주고 그녀에게 아무 것도 변한 것은 없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자신의 변화된 몸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여성 간병인에 대한 이분법적 기대는 자가당착을 일으킨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종속적인 행동(아내, 간호사)을 요구하는 전통적인 여성 역할에 있어서는 예외적으로 신체적, 감정적 힘을 지녀야 하는 일이다. 여성 간병인에게는 능력 있고 의지할 수 있으며 변함없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내재적으로 혼란스러운 세계에 확실한 구조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런 행동들은 남성에게 위협적이고, 남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남성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여성 간병인은 여성들에게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특질(정서적인 반응 같은 특질)을 표현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독립성을 강조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강한 생산성(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며 그들을 간병하는 여성들에게 스트레스의 일부가 되어온)에 대한 우리의 사회윤리이다. 장애가 한 사람의 생산성을 제한하면 이것은 그 손실을 보충해야 하는 다른 사람들의 스트레스로 연결된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장애우도 독립적이고 생산적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는 일에 힘쓰게 되고, 그들은 서로에게 혹은 또 다른 전문가들에게 짐을 넘기려고 애쓰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장애아의 선생님이 자신이 가르치는 일 중에서 차츰 더 많은 부분을 가정에서 엄마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이전할 수 있다면 성공적으로 업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을 수도 있다. 유아를 자극시키는 프로그램들은 때로는 가정에서 아이와 함께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집중적인 작업을 할 것을 요구한다.
장애아의 엄마들은 그들이 사회적 서비스기관, 의료기관, 특수교육과 접촉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때문에 외부에서 정의하고 있는 적절한 엄마 노릇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임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은 사실 훨씬 복잡하고 다루기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정서장애나 정신지체 아동 관련 기관의 직원들은 기관(시설)에서도 다루기 어려운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을 집에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엄마들을 비난해 왔다.

전문가가 아닌 친밀한 관계를 가진 간병인이 자신을 돌보는 것은 중요한 개인적(여성적) 가치를 지닌다고 여겨지는 타인을 돌보는 일에 반(反)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치료사나 상담원들은 타인에 대한 풀타임 책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강제하는 어떤 제도적 장애물도 있을 수 없다면서 간병인의 ‘자아실현’을 독려할지도 모른다. 친분 관계로 인해 간병을 하는 사람이건 전문 간병인이건 간에 그들은 자주 녹초가 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양자 모두 나아질 기미가 없는 중증장애우에게 실질적인 개인적 투자를 제공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여성장애우와 여성 간병인 사이의 관계는 때때로 특별한 어려움에 처한다. 만일 장애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녀는 여성장애우가 처한 의존적 위치와 정반대되는 독립적인 위치에 있는 간병인의 ‘남성적’이며 힘있고 지배적인 역할과 함께 간병인의 여성 자아개념까지도 위협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독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기 때문에 필요성의 여부를 묻지 않고 제공해야만 하는 도움에 대한 분노가 커지면서 장애를 가진 여성과 간병인의 관계가 손상을 입는다. 도움을 제공해야만 하는 간병인의 분노는 간병인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러한 분노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간병인이 자기 요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을 금기케 할 수 있다.

그러나 간병인들은 때때로 장애우들은 도움받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장애우들은 필요 이상으로 더 의존적으로 변한다. 이렇듯 간병인들은 유능함과 생산성에 있어 적절한 수준 이상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일부분을 이런 자질로 채우는 한편 장애우 내부에 있는 자질들을 발전시키거나 대치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지속하면서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간병인으로서의 자아개념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장애우는 실제 필요로 하는 능력과 생산성을 보다 덜 요구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연관 관계로서 ‘장애’의 개념을 바라본다는 것은 흥미롭다. 신체적  속성은 그것이 중요한 장애물이 되거나 관계에 대립적인 영향을 끼칠 때만 장애가 된다. 이와 같은 정의에서 볼 때 신체장애는 장애우와 간병인 모두에게 곤란할 수도 있다. 실제로 간병인(엄마, 딸, 또는 장애를 가진 사람의 파트너)이 도움을 받는 이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개체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녀의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건강함 자체가 장애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장애를 가진 어머니 때문에 자신의 일과 육아의 책임 위에 덧붙여 엄마가 해왔던 일까지 도맡아 해야 했던 두 여성을 알고 있다. 그들은 엄마가 더 이상 예전부터 해 왔던 일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그 일에 대해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들 딸들에게는 여전히 살아있으며 육체가 존재하는 엄마들이 항상 그래왔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엄마가 해온 전통적인 역할(추수하는 사람들과 교회 모임의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을 이어받기를 기대하고 있고 때로는 자신들 스스로가 기대하기도 한다. 딸들은 그들 자신의 일에 더해 엄마가 해온 일들을 해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마치 자신들의 일처럼 엄마의 열성을 받아들였다. 이런 경우 엄마를 돌보는 딸은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산성에 무거운 부담이 되고 그런 초인적인 책임이 장애를 가진 엄마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증가시키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

장애우와 그를 돌보는 사람이 엄마와 딸의 관계일 경우 분리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가 과장되어 특별히 친근감이 있는 관계나 동질적이고 ‘공생적’인 관계로 연결된다. 나의 사춘기 딸은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여동생과의 관계처럼 나와의 관계도 분리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메간이 지닌 생활에 필요한 기술 중 어느 하나도 갖고 있지 못했다. 제니퍼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성인으로서 하루의 생활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니퍼는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간병인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고 자기파괴적인 방법(예를 들어 길로 뛰어든다든지,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린다든지 하는)으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나는 아이의 슬픔에 공감하고 아이는 자신을 지적으로 만들려는 나의 이런 경향에 대해 감정적 균형을 제공했다. 이점에서 청소년기 초기에 우리의 관계는 공생적이었다. 그녀의 세상을 그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통역해 주는 나에게서 분리되고 싶어하는 그녀의 욕구는 나와 분리되면 보호받지 못하고 세상과의 대화도 단절되게 된다는 점에서 자기 파괴적이었다.

한 심리학자가 나에게 이런 관계를 ‘공생’이라고 설명했을 때 나는 그 개념에 어려움을 느꼈다. 내가 특별한 친밀감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존은 너무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서는 내가 필요했다. 그녀를 위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기본적이라기보다는 복잡한 것이었다. 공생의 개념은 보통 유아와 엄마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발달심리학에서 사용한다. 비네덱과 발린트는 남성 심리학자들이 이런 관계 - 내가 제니퍼에게서 경험했던 불균형 - 에서의 불균형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말해왔다. 유아의 경우 설명이 가능한 공생 개념이 유아기를 이미 벗어난 장애우 개개인에게 옮겨가면서 그런 왜곡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립성과 생산성의 문제에서 요약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적 압력에 대항해 장애를 가진 여성들과 여성 간병인들은 서로의 요구 충족이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이해를 기초로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페미니즘 이론

 

장애에 대한 여성의 경험과 페미니즘 이론을 접목시키려면 다음 두 가지에 대한 철저한 재검증이 필요하다. 하나는 ‘모든 페미니즘 이슈들은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장애에 관한 모든 지식은 재평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개요를 밝히고 있고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상세히 설명할 내 제안들은 장애에 관한 생각과 여성 운동 사이를 오고가는 과정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 제안들은 나와 제니퍼의 생활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내 삶이 페미니즘 이론에서 읽었던 것과 충돌하거나 내 삶에서 그 이론에 대해 내가 이해했던 것에 비해 놀랍거나 아주 다른 왜곡을 경험했을 때 정교하게 되었다.

‘경계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개념은 장애 여성과 그들을 돌보는  주변 사람에게 특별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가부장적인 제도들과 평균 이상으로 접촉을 하지만 양자가 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제도는 평균 이하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전형적으로 많은 부속 기관에서의 의료행위를 포함하고 있다. 법률, 복지를 포함하는 정부와 다른 사회적 서비스 기관들, 교육, 그리고 종교, 마치 공립학교의 특수교육 수업을 후원하는 교회에서 운영되는 치료기관처럼 이런 기관들은 종종 중복되기도 한다. 치료에 접근하려는 여성들은 이런 상황에서 전체 ‘패키지’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여성 자신의 선호와는 무관하게 그들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기관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기관의 철학이나 평상시 일 처리 방법에 대해 직접적인 저항을 하면 그 서비스의 일부나 심지어는 전부를 중단해 버릴 수도 있다. 만일 엄마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한다면, 특히 ‘다루기 힘든’ 아이인 경우 입소해 있는 아이들에게 그 기관의 직원들이 강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메리 데일리는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우리들이 제도 자체만을 생각하는 남성 중심적인 세상에 흡수되기보다는 각 여성이 자기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경계를 갖는 삶을 선택할 것을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이 살아야 할 제도의 경계를 결정해야 한다는 데일리의 주장은 삶 그 자체가 위협당할 때에는 잔인하게도 아이러니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경계가 자유롭게 선택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경계 위에서 어떻게 자기 중심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가를 제대로 탐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제도의 구심력에 전적으로 수동적이 되어버리려 하는 유혹이나 제도의 가치에 협력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연습해야만 한다.

 

여성과 자연에 관한 최근 페미니즘 논의는 삶과 죽음, 인간의 개발이라는 개인적인 특질에 여성이 더 친밀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에 있어 남성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한다고 가정한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의 복잡성을 인식한다면 여성들은 모든 단계의 발달에서 사람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남성들 보다(이렇게 남성 중심 설계의 제도보다도) 더 잘 인식하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페미니즘 이론의 발전을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장애에 관한 경험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 어떤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중 가장 나쁜 것이 항상 죽음일 수는 없다. 노령화와 퇴화, 질병은 인생이 성장과정이라는 믿음을 위태롭게 한다. 가득 차서 내면화되어 있는 신체의 ‘실제’ 상황에 대한 인식은 작위적이거나 과도한 영웅주의를 가능케 한다. 인간은 유한하다. 어떤 종류의 손실들은 복구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의 힘과 나약함은 통합되어야 한다.

이런 직관에 이른다는 것은 장애 여성과 간병인 모두에게 강하고 집중적이며 감정적이고 지적이며 육체적인 문제의 자기 중심화, 다시 말해 문제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슬픔의 경험을 포함한 자기 중심화의 과정을 포함한다. 적어도 1973년 메리 데일리의 ‘하느님 아버지를 넘어서(Beyond God the Father)’가 출간된 이후 대부분 페미니즘 철학의 기본주의는 ‘초월’이 자신을 부정하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서의 삶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다.
우리 모두에게 있어 자신을 발견하는 이 가장 어려운 작업은 신체도 포함시킨다. 그러나 건강과 신체적 강건을 영광으로 알고 있는 사회에서 장애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신체의 완전함이 의미하는 것을 좀더 완전히 이해할 것을 강요당하고 있다. 아드리엔 리치가 아이의 탄생을 관찰했을 때처럼 고통을 피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몸을 무시하는 것은 우리를 자신과 자신의 한계, 자신의 현재로부터 멀어지도록 한다.

우리 자신이 한계와 가까워지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강요당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안전 부재의 의미를 검토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의 ‘실제’상황(문화에 의해 이상화되지도 않고 잘못 해석되지도 않는)의 본질을 탐험하는 것이다. 진 베이커 밀러는 만일 여성들이 상처받기 쉬운 감정을 갖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약함과 거기서 빠져 나오는 길에 대해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장애를 가진 여성에 있어 더 큰 유혹들이 이런 감정들에 의해 휩쓸려 가버릴 수도 있고 간병인들로 하여금 전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유혹을 경험하기 때문에 최소한 그들은 각 개인의 바탕에 있어 중심이 되고 있는 상처받기 쉬운 동질성의 측면을 극복해 나가기 위해 함께 정진해야 한다는 생각을 잠재적으로 지니게 된다.


번역 이수지(여성장애인번역모임)


글/ 이수지

작성자이수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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