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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들이 배워 온 것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해 말할 때 믿어라"

[번역연재] 페미니즘과 장애우 (3)

본문

제2장. 새 이론을 위한 기록(2)

페미니즘 이론

  우리 문화처럼 낙관주의에 가치를 두는 문화 속에서 자신을 심각한 문제를 지닌 사람으로 인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원인이 육체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두 가지 모두이든 간에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과 함께사는 사람 누구에게나 요구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정의를 내려 ‘심각한 어려움을 가진 사람’임을 인정하는 여성은 자신의 인생 속에서 중요성을 찾기를 강요당한다. 만일 장애를 가진 여성과 간병인이 상처받기 쉽고 분리되어 있지만 결국 관련이 있는 이들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나약함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협동할 수 있게 된다. 창조적 투쟁을 포함한 그러한 협조는 우리들에게 의존의 개념을 바꾸도록 도움을 준다.
누군가에게 독립심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현상은 의존적이거나 무능하다고 규정지어질 때 그 반작용으로 발생한다. 이런 반작용은 여성 운동에서도 보편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페미니즘의 이상은 육체적 건강과 기능적 능력-특히 장애를 가진 여성이 갖기에는 무리인-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여성은 그런 이미지에 근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이상형이거나 더 나아가 페미니즘적인 이상형을 추구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욕구가 훨씬 더 강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자신을 돌봐 주는  이로 하여금 슈퍼우먼으로서의 일상을 비교하고 재평가를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페미니즘 이론은 현실적 의문에 직면해-공허, 자신의 가장 깊은 중심- 여성의 종속을 둘러싼 복잡한 감정에 대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두어 왔다. 그러나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장애우의 측근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관련되는 개념은 바로 ‘슬픔’이다. 만일 질병에 대한 예의 때문에 차단되어 있지 않다면 간병인과 장애를 가진 사람 사이의 특별한 공감적인 친교가 슬픔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실이 슬픔에 관해 그들간의 경험을 비교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이 경험의 차이와 그들에게 쏟아지는 외부 압력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 준다. 슬픔의 만성화와 슬픔이 한 사람의 가치 중심부를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숭고함과 고통에 대한  낭만적인 설명따위나 영원한 슬픔 혹은 이별을 겪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슬픔의 ‘단계들’에 대한 일반화라는 잘못된 기대를 반대하게 될 것이다.
비트릭 라이트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고수함으로써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슬픔을 더 주게 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만일 한 여성이 다리를 쓸 수 없지만 다리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왜 우리가 걸어 다니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만일 만성질환을 가진 여성이 질병이 진행하는 속도에 따라 본래 몸의 빠른 속도를 잃는 것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뛰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는 것에 대해 의심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마가레트 보이시는 장애아의 부모들은 마치 그들의 상황이 ‘정상(normal)’인 듯 행동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인해 자신의 감정에 대한 신뢰를 넘어서서 주체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되고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정당화를 요구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누군가의 슬픔을 이해하는 과정은 누군가의 고통을 기꺼이 경험해 보려는 것뿐만 아니라 외부적 압력을 이해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자신이 고통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달리가 ‘여성들은 참아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고 말했던 그 실재하는 용기의 일부이다.
의뢰인(client) 대 간병인(caregiver)의 관계가 변화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우리 대부분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 하나는 평등의 개념 -사람들은 똑같이 다뤄져야 한다. 어떤 사람은 걷거나 보거나 듣거나 논리적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특히 더 달성하기 어려운 이상-에 대해 우리가 논리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캐롤 길리간은 이 전제에  대해 남성 윤리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특징되는 ‘정의의 윤리’에 기초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여성의 윤리는 보살핌의 윤리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이 같은 전제는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길리간은 두 가지 가치가 두 성(性)을 성숙하게 수렴시킨다고 주장한다. 장애우-간병인이라는 파트너를 길리간의 분석틀로 검증해 보면 ‘상호성’이란 개념은 장애를 입은 여성에게는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간병인에게는 평등이 필요하다는 것을 혹은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우리에게 상호성의 문제와 함께 두 관계자의 관계에 개입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만든다. 상호성은 서로의 요구를 알아내고, 서로를 의지하며 도움을 구하고 받고, 책임감을 가지며 공감을 주고받는, 그리고 경계를 존중해야 하는 어려움을 포함한다. 그것은 또 엘레노어 루스벨트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줄 수 없고 다른 이들도 줄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라는 더 어려운 원칙을 포함한다. 장애우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매우 정확하게 말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는 것에 특히 좌절하게 된다”고 나에게 말한다. 그렇지만 똑같은 페미니스트 그룹들 안에서도 시각 장애 여성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명확하게 말해도 요구가 자주 무시되거나 축소되어 버린다. 간병인들에게 이런 문제들은 복합적이다. 그들을 제한하는  장애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한계가 아니라 변명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게다가 여성들은 주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두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피하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움을 받거나 요청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이에 상응하여 줄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여성을 찾아내기는 쉽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단순히 우리가 이런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장애우들이 배워 온 것에 신중히 주목하고 그것에 관해 말할 때 믿기만 한다면 여성장애우와 여성 간병인의 이해를 통한 상호성이 나머지 우리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움을 받거나 반대로 힘이 있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는 사람에 대해 역경을 이겨내는 강한 모습으로 낭만화시키는 것은 상호적인 것이 아니다. 이를 낭만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기준보다는 고통을 겪어낼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더 높은 기준에 맞추는 것이다. 중증 장애 아이의 엄마 역할을 하는 데 있어 한 가지 가슴 아픈 것이 있다. 실제 통제 불능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을 때 다른 이들로부터 ‘그런 어려운 문제에 어떻게 그렇게 존경스러울 만큼 강하게 잘 대처해 나가느냐’는 좋은 의미의 찬사를 자주 듣는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것은 아이가 성장하지 않거나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아이의 ‘발달’이나 ‘정상’이라는 자질들에 대해 비현실적인 칭찬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제니퍼에게 예쁘다고 칭찬할 때 그 아이의 장애가 초래하는 어려운 문제들뿐만 아니라 신체적 모습에 대한 우리의 사회적 가치 기준에 비추어 아이러니한 말들이어서 허탈할 뿐이다. 이는 그 애의 삶을 좀 더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먼 얘기고 예쁘다는 칭찬도 그 애가 진짜 요구하는 것을 간과할 경우에는 불이익으로 작용한다. 내가 견딜 수 없는 비극을 견디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도 강하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내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의 기준(용감하게 고통을 겪어내는 사람)으로  나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퇴행하고 있는데도 성장한다고 말하는 것을 용납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내 실체를 무시하고 나에게 다른 사람의 안녕을 책임지도록 하는 불합리한 낙관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장애를 가진 여성과 간병인들이 다른 이들에게 상호성의 모델로 작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특히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이거나 정신이나 정서에 장애가 있는 경우 도움을 주는 사람의 요구를 실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만일 간병인이 상호성 훈련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면 이 상황에서 동시에 의존적인 다른 이에 대한 여성의 책임 윤리가 경외의 대상이 되면서 불균형은 부분적으로 바로잡힐 것이다. 밀러는 종속된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능력과 문제에 대해서 실제보다 낮게 평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상호성 안에서의 훈련은 장애우와 간병인 사이에서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완화시키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적 치료법에 있어서 의뢰인-치료자 관계에서 평등을 기본적인 목표로 하는 전제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여성들 사이의 불균형 관계를 재설정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마사 톰슨이 관찰하는 것처럼 리치의 이론에 근거한다면 여성 사이의 관계가 기본적이고 상호적일 때 우리는 유형 무형의 자원들을 교환하는 것을 포함한 어떤 자원도 소모하지 않으면서 신중히 신중하게 몰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이 장애우와 간병인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들이다. 그들은 함께 그것을 페미니즘 집단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은 페미니즘 집단 안에서도 여성의 건강, 때로는 여성의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것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진 여성 그룹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밀러의 관찰에서처럼 성장은 다양한 것들을 요구하고 그 다양한 것들을 체득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요구한다. 넓은 범위의 차이들을 체득하고 있으며 다양하고 경험 많고 자주 보이지 않는 집단인 여성장애우들과 여성 간병인들은 페미니즘의 성장과 변화에 있어 가치 있는 자원이 된다.

 

3장. 장애 용어와 장애우의 이력(1)  


여성학과 장애에 대한 관계를 말할 때 복잡한 언어의 문제에 곧바로 부딪치게 된다. 어떻게 해야 정치적 운동에서뿐만 아니라 장애에 관계된 사람들의 민감한 감정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고 동시에 정확한 말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부적절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말을 찾아낸 다음에는 어떻게 하면 여성학자들이나 장애우 권익 옹호자들, 또는 다양한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들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여성이나 장애에 대해 지니고 있는 몇몇 의견과 거의 분명히 다른 분석으로 개개인의 의견을 존중해 가면서 장애를 가진 여성의 경험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여성 단체 사람들은 장애 단체들이 ‘장애(disability)’라는 말 대신 선호하는 ‘다른 능력(differently abled)’과 같은 특정 용어를 채택하기도 하지만 그 용어가 다른 집단에게는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여성학과 장애, 양 운동에 대한 정치적 운동에 있어서 각 용어들이 암시하는 것에 대해 지속적으로 재검토해야  하고 비판해야 한다. 일단 ‘handicapped’란 말이 ‘disabled’ 보다 더 좋고 ‘disability’란 명사형은 괜찮으나 ‘disabled’란 형용사형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를 들어 a disabled person이 아니라 a person with disability 라고  부르면 더 낫다.) 용어는 논쟁의 소지가 있고 정치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변화한다.
이에 더해 만성적인 병과 장애는 매우 많은 신체적, 정신적, 심리적인 조건들까지 포괄하는 포괄적인 용어여서 어떤 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험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의 경험과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그룹 안에서도 인식을 포함한 개개인의 경험은 무척 다양하다. 신체적 특징에 따른 공통된 사회적 경험들과 의학적인 관리, 그리고 사회적으로 부족하게 보여지는 것만으로 이러한 차이점이 부분적으로 뭉뚱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개개인의 경험에 대해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정치 권력자나 심리학자들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다양한 계층을 포함해 그 경험들을 듣는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에 항상 영향을 받는다. 어떤 한 장애에 대해 다양한 특정 어휘들이 있지만 이들은 언어뿐아니라 의학적으로 서로 모순될 수 있다, 아마도 개인의 이야기들이 여성장애우들이 겪는 장애의 경험에 대한 가장 좋은 정보가 되겠지만  여성학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보통 저자가 조리를 갖고 있는 중산층들이고 거의 대부분 장애 중에서도 읽고, 쓰고, 생각할 수 있고, 또는 적어도 인터뷰할 수 있는 장애에만 한정이 되어 있다. 퇴행성 질환이나 말기 병환에 있는 사람들의 개인 이야기가 장애 경험과는 상관없는 자신만의 아젠다(agenda)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편찬되기도 하고 쓰여지기도 한다. 대단히 큰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문학과 전문문학이 개인적 이야기들을 보조적으로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여성학적이지 않고 단지 추상적으로 객관적인 경우가 잦고 저자와 출판인의 편견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이치에 맞는 장애와 관련된 용어가 타당성을 얻고 있고 대중문학과 전몬문학에서 개인적 이야기들을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것 때문에 여성학자들이 장애에 대해 분석할 수인는 것이다.(계속)



변역/ 이수지 (여성장애우번역모임)

작성자이수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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