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실미도’와 ‘태극기’에는 ‘역사’가 없다 > 문화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실미도’와 ‘태극기’에는 ‘역사’가 없다

[이영문의 영화읽기]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본문

지난 두 달 동안 우리는 2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개봉한 "실미도"와 2월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바로 그 영화들입니다. 웬만해서는 영화관에 가시지 않는 저희 부모님들도 두 번씩이나 그 영화들을 보셨으니까 1,000만명이 관람시대를 저는 바로 옆에서 느끼고 있지요.

 이 와중에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70대 두 노인들마저 추운 겨울날의 바람을 헤치고 영화를 보러가게 했을까 하는 행동주의적 의문이고 다른 하나는 대박흥행의 이면에 내재된 민족주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제가 이 영화들을 꼭 봐야할 명분은 없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버리기 힘든 자존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타자의 권유나 강요에 의하거나 시간이 맞지 않아서 보려던 영화 대신 ‘꿩 대신 닭’의 심정으로 다른 영화를 보는 것을 못 마땅해 하지요. 이 두 영화를 보러 가는 심정이 그런 경우였습니다.

어쨌든 효도여행은 못해도 효도관람은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두 영화를 일주일 간격으로 봤습니다. 아마 ‘실미도’는 1,000만명을 넘어선 시점이었고 ‘태극기 휘날리며’는 500만명이 관람을 한 시점이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평가를 굳이 하자면 두 영화 모두 예상대로 재미있었고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민족과 가족 이데올로기를 충분히 느낄 만큼 영화 속 내용이 꽉 차있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도 많이 이루어졌고 바야흐로 한국 영화의 성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확실하게 이 두 영화는 민족주의에 호소하고 헐리우드의 흥행방식을 적용시켜 크게 성공한 영화임에 분명합니다. "쉬리"와 "친구"를 거쳐 이제 분단 상황이 흥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셈입니다.

그러나 두 영화를 보고 난 뒤의 허전함은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걸쭉한 국밥을 먹고 싶었는데 국밥집의 신장 메뉴인 돈까스를 억지로 먹고 난 뒤의 비릿한 트림냄새를 맡을 때의 느낌이었지요. 그저 모든 영화를 재미로만 본다면 아무 부족함이 없는데 영화의 소재가 소재인 만큼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마도 저를 사로잡은 것이었지요.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참, 요즘은 잉어빵에 잉어를 넣는다고는 합니다) 확실히 두 영화 모두에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역사의 실종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가 시작할 때는 분명히 있었는데 한참동안 영화를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그만 실종이 되어버립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였음에도 두 영화에서 저는 역사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마치 "U보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보다 더 감동적인 헐리우드 영화를 본 것이지요. 블록버스터라는 장르가 가진 특징이기도 하지만 엄청난 첨단 영화기법에 역사적 사실은 가려져 버립니다.

한 예로 ‘실미도’의 설경구가 겪는 어머니에 대한 동경과 자신을 버리고 북으로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그저 영화 속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양념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은 블록버스터의 갈 길이 바빴던 모양입니다.

영화 속 사진에 대한 장면을 회상해볼 때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영애가 반으로 접은 사진을 액자에서 꺼내 펼칠 때 유령처럼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또한 이병헌과 송강호가 함께 찍은 제대전날의 사진에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너무 크게 나타나자 김태우는 두 사람의 어깨 사이로 북한 두 부자의 사진을 가리게 합니다. 두 장면 다 10초 정도의 짧은 프레임이지만 이를 통해서도 관객들은 역사를 느낍니다.

역사란 그렇게 무겁고 당혹스런 주제가 아닙니다.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의 사진에 대한 글에서 역사란 다만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던 시간들을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부모와 지금의 나를 잇는 끈적거리는 그 무엇. 어머니는 경험했지만 나는 그저 이야기나 느낌만으로 알 수 있는 것.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들. 우리가 늘 배제된 채 바라만 봐야 하는 것. 그렇게 해야만 구성되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태극기’처럼 큰 폭탄이 터지고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 중공군의 인산인해 장면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지요. 또한 ‘실미도’의 보트타고 북으로 가다가 돌아오는 장면(단지 8분)을 찍기 위해 수억을 들였다 하더라도 그 장면을 통해 역사를 느끼는 것은 더욱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찍을 수 있는 수 억원이라는 돈을 한 장면에다 갖다 바치고 블록버스터 영화에 집착하는 감독들에게 영화 소재로 빌려간 분단이라는 역사적 팩트를 굳이 돌려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도 역사를 공유할 권리가 있는 것이니까요.

다만 저는 두 강씨 감독이 이 영화들의 흥행을 빌미로 분단을 상품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이미 우리는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과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분단 문제를 영화화 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장르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를 만들고 찍는 사람의 역사의식과 숨결이라는 것도 또한 느꼈습니다. 역사의 실종에 관한 두 가지 예를 드릴까 합니다.  

‘실미도’에서 버스 안 수류탄 폭발직전 상황에서도 감독은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합니다. 철저한 상업성과 관객서비스입니다. 그 장면에서 웃는 사람들을 보면서 ‘투캅스’의 박중훈이 떠오른 것은 저만의 상상인지도 모르지요. ‘태극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군의 대좌로 변신한 장동건이 마지막 전투 도중 한참동안 원빈과 형제애를 나누는 화면은 더 이상 전투장면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이 프레임은 역사라는 사실이 사라지고 영화라는 현실만이 남는 셈이지요. 친절하게도 관객들에게 영화 시작의 만년필이 그 만년필이라는 개연성을 설명해줍니다. 억지로 삽입한 만년필은 불행하게도 감독의 척박한 역사의식을 드러나게 합니다.

조용필은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사랑이 외로운 건 모든 걸 걸기 때문이라고 하였지요. 두 감독은 두 영화에 아마도 모든 돈과 전략을 걸었나 봅니다. 올인의 상태에서는 주변부가 들어오지 않는 법이고 역사는 실종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민족주의에 편승한 두 영화는 대박을 터뜨렸고 이 분위기를 읽지 못한 이승연은 ‘위안부 누드’로 사회적 매장이 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지난 1달 사이에 보고 들었습니다.

결과만 다를 뿐 똑같은 모습의 민족주의의 양면이 우리 곁에 있었던 겨울이었습니다.

꽃샘추위에 감기 조심하시고 따스한 봄날에 뵙겠습니다.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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