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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 가족은 더 진하다’

[이영문의 영화 읽기] 민족과 가족의 통합을 다룬 영화 ‘굿바이 레닌’

본문

 
 
요즘 신문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소위 수구언론으로 불리던 신문들이 앞다투어 북한 룡천역 참사에 대한 민족적 도움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나라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오히려 남북통일 문제를 주도하던 재야단체들이 더 머쓱해진 느낌입니다. 과연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줄곧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나 봅니다.

저는 솔직히 룡천역 참사로 온몸에 화상을 입은 어린 생명들을 TV로 보며 안타깝지만,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성은 움직이되 오감은 그대로인 셈입니다. 우습게도 저는 남북이산가족들이 금강산에서 만나 대성통곡을 하는 장면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1983년이던가요? 처음으로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만난 여러 사람들의 애환을 보며 마구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눈물은 구체적인 감정의 물질입니다. 울 수밖에 없는 막다른 심리적 절박감에서 참았던 감정이 북받치며 눈물이 나옵니다.

지난 호의 영화였던 '송환'을 보며 울던 장면도 바로 봉천동 주민들과 양심수 선생 등의 헤어짐에서 나왔지요. 보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것,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대상이 없는 것, 그리고 이대로 떠나면 평생 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등이 저를 울게 하곤 합니다. 외로움은 이길 수 있으나 그리움에는 지는 것이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룡천역 참사를 보며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이 생각났습니다. 2003년도 최우수 유럽영화로 선정된 이 작품은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족의 해체와 통합, 미움과 용서를 그리고 있습니다.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도 가족이라는 조그만 공동체는 마치 거대한 해일 앞에 우뚝 선 마린보이처럼 거침이 없지요.

통일이 논의되지 않던 70년대 중반, 과학자인 아버지가 서베를린으로 망명해버린 알렉스는 어머니, 누이와 함께 동베를린에서 달나라 가는 우주비행사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아버지 망명 이후 열성 공산당원이 되어버린 어머니와 사춘기 갈등을 겪으며 반정부 시위대에 참여하게 되지요. 통일을 얼마 앞둔 1989년에 반정부 시위를 하는 알렉스를 목격하게 되고 어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집니다. 그리고 8개월 간의 의식불명상태에서 독일은 통일됩니다.

통일 독일에서 의식이 회복된 열성 공산당원 어머니가 충격을 다시 받으면 돌아가실 수 있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알렉스는 통일 전의 베를린을 꾸미기로 비장한 결심을 합니다. 이 영화가 가족코미디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통일로 인해 없어져버린 동독의 식료품을 찾아 알렉스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심지어는 폐허로 변한 아파트를 몰래 들어가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머니를 위해 거짓말 뉴스를 제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랫도리는 팬츠만 입은 채 근엄한 목소리로 사회주의의 위대함을 전하는 뉴스앵커는 다름 아닌 알렉스의 친구일 뿐입니다. 가짜 음식과 가짜 노래 그리고 가짜 뉴스까지 동원된 일명 ?어머니 구하기?는 점점 막다른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어머니와 아버지의 헤어짐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납니다.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는 알렉스와 누이를 위해 동독에 남게 된 것입니다. 죽기 전에 남편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어머니와 그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는 누이 사이에서 알렉스는 고민합니다. 과연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인가?

한편 통일 후 버거킹에서 일하게 된 누이는 차창 너머로 햄버거를 주문하는 아버지를 보게 됩니다. 아버지는 이제 다른 가족과 함께 행복해 보이는 타인이 된 것이지요. 알렉스는 묻습니다. 아버지에게 뭐라고 했냐고. 누이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오늘도 버커킹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십 수년간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단지 사무적으로 몇 초밖에 대할 수 없었던 누이의 심정을 헤아리며, 알렉스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리고 두 달 후 어머니는 통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가십니다. 평소의 소원대로 알렉스는 어머니의 유해를 불꽃놀이 폭죽에 담아 통일된 베를린 하늘에 쏘아 올립니다. 알렉스는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우주항공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게는 훌륭한 우주인으로 남게 됩니다.   

이 영화는 분명 유쾌한 가족 코미디입니다. 그러나 장면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는 멜로물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념문제에 아무런 생각을 가지지 않은 분들은 이 영화를 보시기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통일이라는 영화의 핵심 모티브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해체와 통합을 따라 절묘하게 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연유로 민족의 통일은 과연 가족의 통합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에 이 영화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통일이나 통합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헬리콥터에 의해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레닌 동상의 그 미소는 교조적 사회주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대 담론의 수평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인가. 저는 여전히 통일 후에도 이념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사회이념보다 더 중요하게 남을 것은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 영화의 대립각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분되는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이념이 아닙니다. 바로 사회구조 변동 속에 알렉스를 중심으로 한 자녀세대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부모세대의 가족공동체에 대한 시각차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념 성향마저 바꾸며 알렉스와 누이를 지키는 가족통합의 삶을 선택합니다. 또한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던 알렉스는 사회주의 반대운동에 나서며 가족해체의 길을 갑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이들은 다시 가족공동체로 통합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사랑하는 남편보다 더 나아가서는 동서를 가르는 구태의연한 이념보다 어머니는 가족을 택한 것이지요.

참으로 어머니는 우리가 가지지 못하는 상생의 힘을 지니고 계십니다. 일전에 판화가 이철수씨의 ‘어머니’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쓰였던 구절로 글 맺음을 대신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자유와 민주,
민중혁명의 크고 장대한 사명을 위해
모두 그렇게 잠든 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가냘픈 등불 하나로 세상의 진정한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의 손을 잡고 이 영화를 함께 보시기를 기원합니다.
평람(평안한 관람)!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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