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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진의 음악여행(2)]팝 음악계의 모짜르트 ‘엘튼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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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녁 시간대에 모 방송사로 채널을 고정해서 오래도록 보고 있으면 꼭 한 두 번쯤은 지금부터 소개할 이 대중음악인의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알리는 광고물을 볼 수 있다. 2004년 9월 17일에 대한민국 서울의 월드컵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하게 된 주인공은, 이름하여 엘튼 존
아마도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조용필’ 이상의 의의와 가치 등을 지니고 있는 영국의 국민 가수급 거물이 그이다. 주요한 히트 곡을 대라고 해도 아마 A4 용지 두 장 정도는 너끈히 채울 수 있을 정도가 될 방대한 레퍼토리이기 때문에 이 가수의 노래 2∼3곡 이상을 모른다고 절래 머리를 흔든다면 지체 없이 바로 간첩으로 신고하거나, 혹은 청학동 주민(?!)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고, 심지어는 아예 팝송이라면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라 생각하면 될 듯하다. 음악다방이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던 그 시절에는, 머리카락 길게 기른 채 버터 발음 굴리던 수많은 ‘준이 오빠’ DJ들이 경쟁하듯이 엘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나 <Tonight>, <Goodbye Yellow Brick Road>, <Your Song> 등으로 여성 단골들의 가슴을 후벼 팠었다. 그것으로도 안 된다면 비장의 무기 같은 <We All Fall In Love Sometimes>로 나름대로 작업(?)을 걸기도 했었는데.

1970년대를 대변하는 정상의 솔로 가수로 인정받는 엘튼 존은 1947년 3월 25일에 영국


 
미들색스 주 피너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마치 중세의 기사나 귀족들의 멋진 모습이 떠올려지는 그럴 듯한 것이었는데, ‘Reginald Kenneth Dwight’로 자라던 엘튼 존은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아들이 안정적인 은행가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와는 늘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해와 관심, 그리고 전폭적인 후원으로 그를 밀어줬다고 하는데 그나마 부모님은 그의 나이 10살 때 이혼을 해서 그 후부터는 어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11살이 되던 해에는 클래식 교육으로 너무나 유명한 영국 왕립 음악 아카데미 장학생으로 입학할 만큼 대단한 내공을 지니게 되는데, 참 운명이라 게 뭔지 저명한 피아니스트나 클래식 작곡가가 될 수 있었던 그는 어깨 너머로 듣고 빠지게 됐던 당시의 로큰롤 사운드와 팝의 매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대중음악인이 되기 위해 왕립 학교를 뛰쳐나왔다.
그 후에는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에 가담하며 본격적인 대중음악계에 입문하는데 결국 이 그룹은 현재 그의 이름인 엘튼 존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동기를 제공하게 된다. 이 팀의 멤버였던 엘튼 딘과 롱 존 볼드리의 이름에서 각각 한 단어씩을 차용해 아주 쉬운 이름인 “엘튼 존”을 예명으로 만들게 된 것.
비틀즈의 폴 맥카트니, 존 레논에 비견되는 싱어송라이터였던 엘튼 존은 남들과 달리 독특한 점이 있는데, 가사만큼은 자신이 직접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경력에는 ‘영혼의 동반자’라 불리는 이름인 버니 토핀이 등장하는데 아름답고 쉬운 가사와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주던 그와는 오디션장에서 알게 됐다고 한다.
지금이야 조지 마이클, 로비 윌리엄스로 대를 물리는 영국 최고의 남자 가수라는 평가를 듣지만 엘튼 존도 초기에는 음반사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한다. 당시 제일 큰 약점 중 하나는 자신이 만든 곡을 부르기에는 너무 긴장돼 남의 노래를 불렀다는 것인데, 이게 감정이 제대로 살거나 실력 발휘가 될 리 없었다. 그 때 당시 엘튼 존은 우리가 <Epitaph>라는 곡으로 잘 아는 그룹 킹 크림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여튼 70년대를 맞이하면서 발표한 <Your Song>이라는 곡이 전 세계적으로 대 히트를 기록하며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호흡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여세를 몰아 비틀즈 이후 4장의 앨범을 동시에 탑 텐에 올려놓은 음악인이 되기도 했다.
지난 1994년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의 주제가였던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이 차트 정상을 차지할 때 당시 엘튼 존은 무려 25년 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연속적으로 차트 탑 40 히트를 기록한 엄청난 기록을 세우게 된다. 후에 이 기록은 더욱 추가되기도 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23년 간의 기록은 이미 92년에 깬 상황이었다. 한편 지금까지 무려 40여 장에 달하는 정규 앨범과 60여 곡에 이르는 차트 히트 곡을 지닌 엘튼 존은 음악성이나 음악적 양에 비례되는 기행과 토픽 거리를 제공한 사람으로도 기억된다.          

본인 스스로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을 23살 때 쯤 알았다고 하는데, 매스컴에 알려진 것은 1979년경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이었는데 이런 소문을 무마하기 위해 스스로 양성애자로 밝히기도 했고, 84년에는 엔지니어 출신 여성과 결혼을 하며 여론을 진화하기도 했지만 이 결혼은 3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는 완벽한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엘튼 존이 그냥 여성으로 좋아한 사람은 한 명이 있었다. 바로 마릴린 먼로다. 후에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사망했을 때 가사를 약간 수정해 다시 헌정했던 곡이기도 했던 <Candle In The Wind>는 마릴린 먼로에게 바치는 곡으로 처음 만들어진 노래다. 85년 호주 공연에서는 마릴린 먼로 분장을 하고 노래를 하기도 해서 그녀에 대한 열정을 다시 나타내기도 했다. 그녀의 무덤 옆에 묻히고 싶다는 꿈을 지녔던 그는 마릴린 먼로의 친척이 이미 묻혀있는 묘소 옆자리를 50만 달러에 사겠다고 했다가 먼로의 유가족에게 거절당한 일화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엘튼 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의 병적이라 할 정도로 모자와 안경, 선글래스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모자야 그의 적은 수의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그랬다고 치지만, 가끔 공연장에도 착용하는 기기묘묘한 선글래스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로도 떠오른 바 있다. 그리고 온갖 자동차를 모으는 것으로도 유명하며 광적인 축구 팬인데, 결국 그 사랑이 넘쳐 1980년에서 93년까지는 와포드 FC라는 축구단의 구단주 겸 회장이기도 했다. 게다가 축구장에 빨리 가기 위해 축구장에만 가는 전용 스포츠카가 따로 있었다고 하니 할말이 없지.
이후엔 악물과 알콜 중독 등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도 했고, 스트레스성 다식증에 걸려 끊임없이 음식을 먹어대야만 직성이 풀리기도 했는데, 그의 비대해진 몸이 아직도 정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 때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이후 그가 파티 등에 참석하게 되면 옆에 항상 커다란 통을 든 사람이 따라 다녔는데, 음식을 맛만 보고 바로 뱉어 버리는 습관이 생겨 이런 모습을 보고 입방아가 뒤따르기도 했다.  
라이온 킹 주제가로 아카데미상과 그래미상 등을 석권하며 재기에 성공했던 엘튼 존은 다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94년에 헌액되었고, 아까도 언급한 다이애나 비를 위한 리메이크 버전 <Candle In The Wind>로는 무려 14주간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라는 타이틀도 지니게 됐다.

“팝계의 불사조”라는 표현에 걸맞도록 아직 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화제를 만드는 것 또한 여전해서 ‘무소유의 삶’을 살겠다고 런던 자신의 아파트 살림살이를 모두 경매에 내놓기도 했고,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왕립 음악 학교에 다니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불화를 빚고 있는 데이빗 베컴 부부를 달래주기 위해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자신의 별장을 내주기도 했다는 해외 토픽을 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98년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아 이제야 본명에 어울리는 ‘Sir Reginald’가 된 엘튼 존.
음악의 양만큼이나 다양하고 정력적인 삶을 이어가며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진짜 ‘아티스트’다.



글 성우진(대중음악평론가, 팝컬럼니스트)


 

작성자성우진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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