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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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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자란 곳은 재활원
까까머리에 퀭한 눈 버짐 핀 얼굴로
먹을 게 없어 대신 손가락을 빨았었다
엄마 같은 따뜻함이 그리워
담벼락에 기대 하루종일 해바라기를 하며  
눈쌀 찌푸리기도 했었다
돌아보면 배고픔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지만
아무 것도 몰랐던 그때
살아남기 위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그때  
장애를 가진 우리 앞에
세상이라는 더 큰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 수 없었던 그때
친구야,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도 그때가 우리들의 행복한 시절이었다
 
1

그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성인이 됐다고 재활원에서 등을 떠밀어서
그는 절룩이는 다리를 목발에 의지한 채
세상을 향해 걸어나왔다
거리에는 온통 찬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그는 가슴속에 희망의 불씨 하나를 붙들고 있었다
재활원에 있을 때 선생님이 말했었다
기술을 배워야 해 오로지 기술을 배우는 것만이
너 같은 장애우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 말이
그가 붙잡고 있는 초라한 희망의 전부였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조건도 감수하고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그나마 운이 좋았다
다리는 불편했지만 두 손은 멀쩡했다
변두리 시계점에서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고
자리를 옮겨 가게를 대신 봐준다는 전제하에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웠다
두 가지 기술이 모두 사양산업이라고 해서
이번에는 금은 세공 기술을
먹고 재워주기만 해도 감지덕지 하다고
배불뚝이 사장에게 사정하고 또 사정해서 겨우 배웠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재활원에서 같이 자란 한 친구가
어느 날 서울 종로거리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친구가 밥 한 끼 먹자고 하자
그가 친구를 데려간 곳은 탑골 공원 뒤
밥 한 그릇에 천오백원을 받는 싸구려 해장국집이었다
국물 한 숟갈을 입에 떠 넣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름만에 처음 먹어보는 밥이다…
눈물 섞인 밥을 먹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동안 기술을 배운다고 실컷 고생만 했지 남은 게 없어, 너도 알겠지만 나 말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남들 쉴 때도 주린 배를 움켜쥐며 기술만 배웠거든, 어떻게든 기술만 배우면 험한 세상이지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사장이 장애우라고 무시하면서 월급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장애우라고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손가락질 할 때도 내가 기술만 제대로 배우면 언젠가는 큰 소리 치며 살 때가 올 거라고 믿었던 거야.
그렇지만 세상은 말야. 흔하디 흔한 유행가 가사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더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수중에 남는 게 없었어.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뼈가 부숴 지도록 일했지만 단 한 번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무리해서 가게를 차렸어. 이십 년 고생고생 하면서 모은 돈과 여기저기 아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서 내 이름으로 된 금은방을 열었지. 가게를 처음 시작할 때는 시계도 고치고 도장도 파고 세공도 하면 부자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내 한 몸 먹고 살 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야. 불경기 탓도 있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이 없었던 거야. 빌린 돈에 대한 이자와 가게 세는 매달 꼬박꼬박 나가야 하는데 손님이 전혀 없으니 내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겠니,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지, 세상은 말야, 무엇보다 학연 지연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라는 걸 말야, 가족들이 있고,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 있고, 하다못해 어렸을 때 같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들이라도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나는 고아로 버려졌으니까 가족이 있을 리 없고, 교육을 받지 못했으니까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도 없어, 말하자면 세상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거지. 그런 내가 주제도 모르고 기술만 믿고 가게를 차린 게 잘못이었던 거야.
빚쟁이에게 가게 넘겨주고, 빚 독촉을 피해서 지금은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어. 갈 데도 없고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미안하다 친구야, 이런 추한 모습을 보여줘서, 그건 그렇고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가진 돈 있으면 오천 원만 빌려줘라.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 그냥 목욕탕 가서 자고 싶어….”

2
그는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성인이 됐다는 이유로
이제 나가야 한다며 재활원에서
아무 대책 없이 내몰았을 때
그는 붙잡을 수 있는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비틀거리는 몸 하나로 던져졌다
그는 심한 장애 때문에 기술을 배울 수 없었고
그 순간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구걸을 해서라도 질긴 목숨을 연명하든지
아니면 또 다른 수용시설에 들어가서 생을 마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무슨 이런 개 같은 삶이 있단 말인가 원망도 잠시
그는 세상에 남아있기 위해 구걸을 해야 했다
시장바닥을 박박 기며 수세미를 팔았고
창피함에 고개 숙이며 지하철에서 한 푼 줍쇼 손을 벌렸다
그는 이 병신 새끼 구걸해서 먹고살려고 하는데
한 푼만 보태달라고 고래고래 악을 썼고
세상의 바닥을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황망히 지갑을 열어 그의 손에 동전 몇 푼 쥐어 줬다
밤늦은 시각 인적 끊긴 플랫홈에서
그는 동전을 세며 하얗게 웃고 또 웃었다 
앵벌이들은 구걸해서 번 돈으로 술을 사먹지만
그는 술 대신 저금통장을 선택했고
돈의 힘을 믿은 그의 판단은 전적으로 옳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말했다
그는 돈을 쓰지 않아서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아주 많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재활원에서 같이 자란 한 친구가
어느 날 우연히 포장마차에서
대낮부터 술에 절어있는 그를 발견했다
안주 없이 소주를 병째 들이키던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부짖었다
나 다시 거지가 됐다….
“구걸을 해서 돈을 벌었지. 악착같이 돈을 모았어. 재활원에서 나올 때 빈 손 이었지만 십 년 동안 구걸해서 전세방 하나 얻을 돈을 모을 수 있었어. 그렇지만 돈은 벌었지만, 살다보니까 돈으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 게 있었어. 왜냐면 나도 사람이잖아. 먹을 것만 있으면 충족하는 돼지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정에 목마르고, 이성이 그립고,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거야. 그렇지만 이 세상 여자들은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았어. 내가 곁에만 가도 놀라서 도망치기에 급급했지.
여자가 그리워서 돈을 들고 술집에도 가보고, 윤락가에도 가봤어. 하지만 돈으로 여자를 사는 건 정이 없어서 결국 허망함만 남을 뿐이었어. 내가 원했던 건 여자와 자는 게 아니

 
었거든. 나는 나를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밥을 해주고 나를 걱정해주는 마음씨 고운 여성이 필요했던 거야. 어떻게든 그런 여성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싶었어. 정말 미치도록 결혼을 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나 같이 가족도 없고 장애가 심한 뇌성마비 장애우는 결혼을 하는 게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보다 어렵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지.
솔직하게 말하면 그래서 많이 낙담했어. 어느 정도로 낙담했냐면 구걸해서 돈을 번다는 것도 더 이상 의미가 없어서 일도 나가지 않고, 왜 여성들은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나 그 생각만 골똘히 하면서 증오심에 눈에 핏발 세우고 하루종일 거리를 싸돌아다녔을 정도였지. 그 때 아는 사람을 통해서 솔깃한 얘길 들었던 거야. 돈만 있으면 중국에서 조선족 여자를 데려올 수 있다는 거였어.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캄캄한 밤에 한 줄기 불빛을 본 것 같은 희망에 몸을 떨었지.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여행사를 소개받고 중국에 가기로 했어. 여행사에서 중국에 가기 전 먼저 경비와 여성에게 줄 지참금을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이천 만원을 줬어. 결혼이 성사되면 천 만 원을 더 줘야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지. 삼천 만원은 내 전재산이었지만 돈이야 다시 벌면 됐으니까, 집에서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만 있으면 돈은 구걸을 해서 얼마든지 벌 자신이 있었거든, 그래서 전세방을 빼서 월세방으로 옮겼던 거야.
중국에 갔어. 거기서 세 명의 조선족 여자와 맞선을 보고, 그 중 한 명과 결혼수속을 밟았지. 그녀는 이혼녀였어. 한국에 가면 오직 나를 위해서만 살겠다고 했어. 그 말을 철떡 같이 믿었지. 중국에서는 혼인신고만 하면 여자를 데려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거든. 혼인 수속을 마치고 육 개월 후에 마침내 여자가 한국에 왔어. 말하자면 나는 삼천 만원을 주고 여자를 사온 셈이었는데, 비록 돈으로 사온 여자였지만 힘들게 결혼했으니까 나는 그 여자와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 아니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그 여자만 내 곁에 있어주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어. 그런데 여자가 사라져버렸어. 같이 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여자가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사라져버리고 만 거야.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어. 날린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냐, 돈이야 다시 벌면 되겠지. 돈  보다는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는데, 그 여자마저 나를 버렸는데, 이제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그게 두려운 거야.  친구야, 내가 가당치 않은 욕심을 부린 거니….”

글 이태곤 / 삽화 강풀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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