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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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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죽었다. 그녀가 한 밤중에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날아서, 삶의 무게 때문에 미처 하늘로 날아오르지는 못하고 암흑 속으로 떨어져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 곳으로 떠났다.
소식을 듣고 7단지 영구임대아파트 주민 세 명이 병원 영안실을 찾은 것은 오전 10시경이었다. 썰렁한 영안실에는 그녀가 세상에 남긴 여섯 살 아홉 살 두 딸과 옆집에 사는 경산댁이 훌쩍거리며 울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생전의 그녀 모습을 담은 영정 사진도 없었고, 그 흔한 꽃 한 송이 눈에 띄지 않았다.
초라한 장례식장을 찾은 주민들은 방바닥에 둘러앉아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안됐구먼, 친척도 없다는데, 이제 누가 아이들을 키우누… 죽은 은지 엄마도 불쌍하지만 말야, 따지고 보면 남은 아이들이 더 불쌍한 거지. 이제 꼼짝없이 고아가 됐잖아. 죽은 은지 엄마를 내가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하는 건 말야, 은지 엄마도 고아라고 들었거든, 어렸을 때 부모가 버려서 재활원에서 자랐다고 하던데, 그랬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들은 고아로 만들지 말았어야지. 왜 자기의 불행한 운명을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냐는 거지. 말이 나온 김에 내 얘기를 하면, 내가 빌어먹고, 사람들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이날 이때까지 질긴 목숨을 포기하지 않은 건 말야, 오로지 아이, 이제 열 아홉 살 된 우리 딸 선화 그 아이 하나만 쳐다보고 살았고, 그래서 결국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내 말은 자기가 힘들게 자랐으면 적어도 아이들은 고아가 되게 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도리고 사람의 도리라는 거지, 아이들을 생고아로 만들어 놓고 죽긴 왜 죽냐 이거야, 저승에서 그 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은 406호에 사는 정씨였다. 54세인 정씨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젊어서 행상으로 전국을 떠돌 때 운 좋게 구미에서 마음 착한 한 비장애우 여자를 만나 짧은 세월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선화가 태어났는데, 정씨 말에 따르면 아이 엄마가 어느 날 핏덩이를 남기고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마치 잠시나마 같이 산 것이 꿈결인 듯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져버렸단다. 목발에 의지해 겨우 걸을 수 있었던 정씨는 그 후 아이를 데리고 전국을 유랑하며 빌어먹고 살았는데, 먹고 살만한 다른 수단이 없어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떻게든 아이 엄마를 찾아내서, 선화에게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온갖 고생을 마다 않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는 것이 정씨 말이었다.

 

십 수년 간 멀리 제주도까지 전국을 이 잡듯이 헤매고 다녔지만 끝내 아이 엄마를 찾지 못하고,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쇠잔해지자 정씨는 어쩔 수 없이 기초생활 수급자 책정을 받고, 덕분에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됐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은 건 정씨의 끔찍한 자식 사랑이어서 정부에서 생계비를 지원 받아 겨우 먹고사는 처지였으면서도 정씨는 선화가 해달라는 것은 뭐든지 다 들어줬다. 학원도 피아노학원을 비롯해서 세 군데나 보내고, 선화가 학교에서 기죽지 말라고 철이 바뀔 때마다 비싼 메이커 옷과 신발을 사다 바쳤다. 선화에게 쏟아 부은 돈이 고스란히 카드 빚으로 남아 쌓이고 있었지만 정씨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랬던 정씨에게 문제가 생긴 건 요즈음이었다. 안그래도 정씨는 지병인 당뇨병이 심해져서 몸이 퉁퉁 부어오르고 왼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이르러 걸어다니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수세미와 고무장갑 등을 파는 행상 일을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고물 오토바이 한 대를 구해 하루종일 동네를 돌며 파지를 수집해서 몇 푼의 용돈을 벌고 있었다. 그런 최악의 상태에 놓여 있는 정씨를 향해 카드회사의 무지막지한 빚 독촉이 시작된 것이었다. 카드회사 추심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정씨에게 전화를 걸어 빚 독촉을 해댔다. 그것도 모자라 불쑥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래도 빚을 갚지 못하자 마침내 정씨 집 텔레비전과 냉장고에 색깔도 선명한 빨간 차압딱지가 붙는, 동네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일이 벌어졌다. 그 지경에 이르자 어차피 갚을 수 없는 빚 법원에 파산을 신청해서    하루속히 빚 독촉을 벗어나라고 주위 사람들이 조언했지만 정씨는 여기 저기 알아본 결과 파산을 하면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결국 그 빨간 줄 때문에 아이 장래에 먹구름이 낄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감옥에 가서 썩는 한이 있어도 절대 파산 신청은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지독한 병과 심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정씨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선화가 얼마 전 비록 임시직이었지만 회사 이름을 대면 누구나 다 아는 번듯한 회사에 취업했다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기뻤던지 선화가 면접을 보러 가는 날 선화를 배웅하고 나서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서 하루종일 울고 또 울었다고 훗날 정씨는 7단지 경비 일을 하고 있는 김씨에게 고백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화가 취직했다는 것이 정씨 입장에서는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사무소 사회복지 전문요원이 전화를 걸어 왔는데, 규정상 선화가 취업해서 돈을 벌면 기초생활수급자에서 탈락시킬 수밖에 없고, 그래서 생계비를 줄 수 없고, 더 기가 막힌 것은 수급자가 아니기 때문에 영구임대아파트에서도 나가야 한다는 통보를 해 온 것이었다. 전세방은커녕 월세방을 얻을 보증금조차 없는 정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진배없는 청천벽력같은 통보를 받은 셈이었다. 그렇다고 선화에게 회사를 다니지 말라고 제지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정씨는 이래저래 심한 속앓이를 하며 끙끙대고 있었다.
이렇듯 정씨는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숨만 푹푹 내쉴 수밖에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놓여 있었지만 그래도 자부심을 갖는 건 어쨌거나 선화를 고아로 만들지 않고 품에 안아 키워냈기 때문이었다. 장애우로 살면서 굶기를 밥먹듯이 해야 했고 어떤 때는 잠 잘 곳이 없어 찬바람 에이는 거리에서 자면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차니까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야겠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렸지만 그때마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독한 심정으로 어금니를 깨물고 그 유혹을 이겨낸 정씨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정씨는 아이들을 고아가 되게 하지 않는 것이 부모의 도리고 사람의 도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쌍하기를 따지면 아이들보다 아이들 엄마가 훨씬 더 불쌍하죠… 오죽했으면 은지 엄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겠어요…”
903호에 사는 연주 엄마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죽은 은지 엄마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은지 엄마와 달리 장애를 갖고 있지 않았는데, 비장애우인 그녀가 장애우인 은지 엄마와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올해 열 다섯 살이 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연주 엄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난 연말 복지관에서 열린 장애우 가족 모임에서 처음 은지 엄마를 만났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연스럽게 아이들 얘기를 하다가 연주 얘기를 하며 설움에 복받친 그녀가 먼저 울었고, 그런 그녀를 위로하던 은지 엄마가 자신의 심한 장애 상태를 얘기하면서 따라 울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장애를 매개로 한 동병상련의 감정을 공유하게 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친한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은지 엄마의 생전의 유일한 말상대가 바로 그녀였다.
“며칠 전 은지 엄마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또 하염없이 우는 거였어요. 붙잡고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뜬금없이 술집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은지 아빠 얘기를 꺼내는 거였어요. 그 자식을 찾아내서 죽이겠다고,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어떻게든 찾아내서 죽여버리겠다고 막 고함을 지르면서 우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말렸어요. 은지 엄마,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고, 잊으라고, 잊어야 산다고… 그렇지만 은지 엄마는 막무가내였어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울고불고 난리를 치면서 그 밤에 저를 앞세워 아이들 아빠를 찾으러 가자고 떼를 쓰는 거였어요. 저는 은지 엄마가 왜 그렇게 속상해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어요. 그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은지 엄마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어요. 조금 진정이 되자 은지 엄마가 흐느끼며 말하더군요. 점점 더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이제는 간단한 단순작업도 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날 다니던 공장에서 그만 나오라는 사실상의 해고 통지를 받았다고 울면서 말했어요…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내막을 아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은지 엄마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었어요. 은지 아빠가 몰래 은지 엄마 이름으로 많은 빚을 얻어 쓰고 집을 나갔기 때문에 은지 엄마는 정부에서 주는 생계비로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어요. 그런 처지에서 어떻게든 일을 나가야 아이들과 먹고 살 수 있는데 점점 더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은주 엄마의 생명줄이 끊어져 버리게 된 거죠. 이제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는 은주 엄마에게 파출부 일을 나가 근근히 먹고사는 제 처지에서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겠어요? 그냥 아이들을 생각해서 참으라고, 우리 연주도 사니까 은지 엄마도 참고 살라는 그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다른 말이 없었어요…”
연주 엄마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불현듯 연주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죽은 은지 엄마 얼굴에 연주 모습이 겹쳐지면서 훗날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결국 연주도 장애 때문에 은지 엄마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복받치는 설움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올해 열 다섯 살인 연주는 그녀가 임신 상태에서 임신중절 약을 잘못 먹는 바람에 약물중독으로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우로 태어났다. 연주의 장래를 염려해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연주 밑으로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된 남동생을 하나 더 낳았지만 그 아이는 부모 속도 모르고 누나가 장애를 가졌다고 업신여기고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아 연주는 하루종일 방안에 방치된 채 혼자 지내고 있었다. 라디오가 연주의 유일한 친구였다.
불쌍한 연주를 제대로 돌봐야 한다는 마음은 늘 굴뚝같았지만 연주 아빠는 건설현장에서

 

 

 

 

 

 

 

 

 

 

 

 

일용직 잡부로 일하고, 그녀는 파출부 일을 나가야 겨우 먹고살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연주를 제대로 돌봐준다는 것은 마음과는 달리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그 놈의 가난이 원수였던 것이다. 부모가 제대로 돌봐주지 못하자 요즘 연주는 부쩍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내뱉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 연주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방안에서 누워서 지내는 연주 엉덩이에 욕창 균이 침입해 야금야금 살을 먹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픈 연주가 살 수 있는 길은 어떻게든 연주를 장애우 수용시설에 보내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연주 아빠에게 제발 연주를 시설에 보내자고 졸라댔지만 그때마다 연주 아빠는 절대 안 된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내 자식이니까 내가 돌볼 거라고, 절대 연주를 시설에 보낼 수 없다고 노발대발 화를 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렇게 화를 내는 연주 아빠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어서 그녀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며 애만 태우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연주 아빠에게 연주의 존재는 그저 측은하고 불쌍한 자식, 그래서 평생 옆에 두고 돌봐주어야 할 대상이기 때문에 연주를 어디론가 떠나보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랬구먼, 은지 어미에게 그런 일이 있었구먼, 나는 그것도 모르고…”
1003호에 사는 박씨 할머니가 말끝에 휴-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은지 어미에게 그런 아픈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말야, 은지 어미를 볼 때마다 애들 잘 건사하라고 생난리를 쳤구먼, 그래서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건데… 불쌍한 은지 어미 속도 모르고, 내는 그 놈의 우유 하나가 아까워서, 우유가 몇 푼 한다고, 은지 예지가 우리 집 우유 훔쳐먹는다고 은지 어미 볼 때마다 우유값 내놓으라고 욕을 퍼붓고 난리를 쳐댔구먼, 어쩔거나, 내가 이 벌을 어떻게 받을거나… 자식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우리 정민이 생각해서라도 내가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잠시 뭐에 씌었나 보이, 막상 일을 당하고 보니 겁나네, 집에 가서 정민이 얼굴을 어찌 봐야할 지 답답하기도 하고…”
박씨 할머니에게는 올해 34세인 외아들 정민씨가 있었다. 그런데 박씨 할머니는 장성한 아들에게 부양을 받기는커녕 반대로 자식을 부양하며 살고 있었다. 정민씨가 정신지체 1급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씨 할머니는 젊어서 장애를 가진 아들을 낳은 게 죄가 돼 시집에서 소박을 맞았다. 아무 것도 지닌 것 없이 맨 몸으로 쫓겨난 그녀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떡장사 생선장사를 전전하며 밑바닥에서 험난한 세월을 헤쳐 나왔다. 언젠가는 자기 몸에서 나온 아들 정민이가 낳아져서 꼭 제 밥벌이를 하게 되리라는 희망 하나를 붙잡고 긴긴 세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민씨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아직도 혼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는 짓이라곤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 화투짝만 만지작거리며 노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박씨 할머니의 억장이 하루에도 수십 번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요즘 부쩍 더 박씨 할머니는 눈물을 달고 사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녀는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한바탕 눈물바람을 한다 "보소, 내 말 좀 들어보소, 내가 자식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네, 이년이 죽으면 저 놈이 어찌될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여서 나도 모르게 숨이 넘어가네, 보소 어떻게든 내 아들 좀 구해주소, 정말 애통터져서 내가 못사네, 이 년이 편히 눈감게 제발 내 아들 좀 구해주소…”
이런 박씨 할머니에게는 잔인한 얘기겠지만, 그래도 박씨 할머니는 그나마 옆에 자식을 두고 살고 있기 때문에 412호에 살던 이씨 보다는 사는 형편이 나은 축에 속했다. 412호는 지금 텅 비어있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412호에 살던 이씨 에게는 박씨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역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25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현수라고 했다. 현수네 집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현수 때문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현수네가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와 살기 전 봉천동 산동네에 살 때 현수네 집은 거의 매일 부부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는데 이유는 늘 현수 때문이었다. 결국 현수 엄마는 현수가 열 살이 되던 해 현수 아버지와 현수의 학교 입학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집을 나가버렸다.
현수 아버지 이씨는 공사판에서 미장공 일을 해 돈을 잘 버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현수를 돌봐야 했기에 제대로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이씨는 동네 술집여자를 데려다 가 같이 살게 됐다. 그랬는데 현수 새엄마는 살림을 시작한 첫 날부터 현수를 드러내 놓고 구박했다. 우연히 여자가 현수에게 손찌검을 가하는 상황까지 목격하게 되자 이씨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일을 나가는 날보다 못 나가는 날이 더 많아지니까 당연히 살림도 심하게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기초생활 수급자로 등록하고, 영구임대 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됐지만 이씨가 제대로 일을 못 나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올해 초 잠 못 이루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씨는 결국 극약처방을 내렸다. 여자를 내보내고, 현수를 가족이 없는 무연고 장애우로 둔갑시켜 꽃동네에 보내버린 것이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던 봄 날, 이씨는 현수 손을 붙잡고 음성행 버스에 올랐다. 버려진 장애우는 발견된 지역 장애우 시설에 수용된다는 것을 사전에 전화로 구청에 물어 알고 있었던 이씨는 현수를 음성 버스터미널에 버렸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테니까 꼼짝 말고  여기 앉아 있으라고, 천원짜리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현수 입에 물려 놓고 이씨는 현수 손을 놓아버렸다.   
밤이 깊어 인적 끊긴 버스터미널 대합실, 덩그마니 혼자 앉아 있는 현수를 마침내 경찰이 와서 데리고 갈 때 현수는 자꾸 자꾸 뒤돌아보며 울면서 “아빠 아빠…”를 찾았고, 그 모습을 기둥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이씨는 대성통곡을 하며 자기 가슴을 쥐어뜯고 또 쥐어뜯었다.    
그렇게 현수와 이별하고 이씨는 곧바로 심한 허탈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은 물론 거의 매일 폭음을 하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다. 이씨는 현수가 많이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현수는 이제 그의 곁에 없었다. 정씨는 이씨가 현수야! 현수야!를 목놓아 부르며 아파트 단지를 휘젓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자 서슴없이 이씨가 미쳤다고 말했다. 박씨 할머니는 이씨가 정신을 놓쳐서 실성했다고 혀를 쯧쯧 찼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씨가 정말 미쳐서 집을 나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이씨는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어디 가서 자살을 했는지 아니면 노숙자로 전락했는지 그 후로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은 우유뿐만이 아니었어요. 은지 예지가 다녀가면 뭔가 늘 없어지곤 했어요. 하다못해 숟가락 하나라도 없어지곤 했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 손버릇이 나쁘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요…”
연주 엄마가 말을 멈추고 흘깃,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는 은지 예지를 잠시 일별했다. 그러나 곧 눈길을 거둬들였다.
“그렇지만 박씨 할머니와 달리 저는 단 한번도 은지 엄마에게 대놓고 뭐라 그러지 않았어요. 아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도저히 그럴 수 없었어요. 왜냐면 은지네 집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모두들 아시잖아요. 은지 엄마가 약시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거, 은지 엄마의 시력은 점점 암흑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그리고 집안에는 그 망할 놈의 돈이 없었지요. 은지 엄마가 전자부품 조립공장에 다녀서 버는 수입으로는 아파트 임대료를 내고 나면 겨우 밥과 김치만을 먹을 수 있었을 정도로 은지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어요. 그렇지만 생전의 은지 엄마를 지켜보면서 제가 정말 가슴이 아팠던 건 가난이 아니었어요. 뭔지 아세요? 은지 엄마가 보이지 않는 눈으로 거의 매일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거였어요. 몇 푼의 수당보다는 야근을 할 때 간식으로 나오는 빵과 우유를 얻기 위해, 빵과 우유를 아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은지 엄마는 매일 야근을 자청하면서 보이지 않는 눈을 혹사시켰던 거예요. 그러면 안됐는데, 정말 그러면 안됐는데, 은지 엄마는 이렇게 해서라도 엄마 노릇을 해야 한다고 우겼어요… 제가 말렸지만 소용없었지요. 생전의 은지 엄마는 돈이 없어서, 엄마가 돼서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지 못해서, 은지 예지가 빗나가고 있다고 울면서 제게 말했어요. 아이들이 우유를 훔쳐먹다 혼이 나고 슈퍼에서 과자를 훔치다 들켜서 두들겨 맞는 것이 모두 다 자기 탓이라며 괴로워했지요. 그래서 빵과 우유로 조금이나마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게 엄마의 도리라고 믿으면서, 대신 그 대가로 자신은 매일 암흑 속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들어갔던 거예요. 이런 바보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 여기 오면서 은지 엄마가 왜 죽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바람이나 은지 엄마를 버리고 도망간 은지 아빠에 대한 원망과 직장에서 받는 천대, 그리고 빗나가는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 은지 엄마를 죽음으로 내몬 거겠지요. 그렇지만 은지 엄마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은지 엄마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정말 없었던 걸까요…”
말을 마친 연주 엄마가 본격적으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누구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제 장내에는 영안실답게 은지와 예지 경산댁 그리고 연주 엄마가 한꺼번에 쏟아내는 통곡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울음소리를 비집고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406호 사는 정씨가 황급히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뭐라구, 뭐, 잘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해 봐, 뭐, 507호 사는 여자가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됐다고, 이런 우라질 그 다리 병신은 또 왜 뒈진 거야? 뭐, 경찰이 그러는데 생활고와 장애를 비관해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그랬다고… 제기럴 이건 아예 줄초상이 나는군, 가만있자 그 여자도 가족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 말이 맞지? 뭐, 조금 있으면 시체가 이 병원에 도착할 테니 기다리라고,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네 올 때 소주 한 병만 사와, 이거야 원, 다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먼…”

 글 이태곤 기자 / 삽화 이상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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