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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1]악어는 왜 눈물을 흘리는가

본문

1
 "낙또옹강 강빠라암에 치마폭이 스으치미은, 하 아싸! 낙똥강만 강이냐 한강도 강이제. 강물은 흘러갑니다아아아 제에쌈 한강교 밋틀 당신과 나으 꿈을 시잇꼬서, 와싸 한강만 강이다냐 제에미 두만강도 강이다. 두마안강 푸이런 무울에 노오젓는 배앳싸아아고옹 흐일러간 그 예인날에…"
 그는 술잔이 몇 차례 오가고 나면 주위 사람은 아랑곳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깐닥거리면서, 삼천리 방방곡곡 강이란 강은 사그리 훑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 노래는 술꾼들이 흔히 말하는 음정 좋고 박자 좋고 였다.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술에 취한 그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불특정 다수인-때로는 내가 당했던 것처럼 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사건이터질 시각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였기에 나는, 행여나 참으로 의로운 선지자가 불쑥 나타나서는 근엄한 얼굴로 "사탄아, 회개해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면서,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진 그의 어깨에 손을 얹기 전에 나 스스로 사이비 선지자가 되기로 했다.
 "하이고, 니기미 빙신 겉은 기. 술만 무으면 저 지랄이다." 시계를 보는 척하며 슬쩍 내뱉은 말이었는데도, 그는 귀신같이 알아듣고 내게로 가재미 눈을 한 채 얼굴을 천천히 돌리는 것이었다. 잠깐 나를 흘겨보던 그는, 마치 흉기를 들이대듯 손가락으로 내 왼쪽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어이 동상. 우리 말여. 딴디 가서 마시더라고."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오늘 하루를 조용하게 정리하는, 마지막 남은 의식인 것처럼.

2
 일곱 달 전.
 나는 생면부지인 그와 사소한 시비 끝에 대낮부터 시장바닥에서 뒹굴며 치고 박고 싸웠다. 그 때문에 ××파출소 보호실-말이 좋아 보호실이지, 젠장, 그것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유치장이었다-에 그와 분리되어 갇히고 말았다.
 나는 그날 취재를 일찍 끝내고는, 곧 다가올 여름에 입을 티셔츠를 몇 장 사려고 ㅇㅇㅇ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언저리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노점상과 가게가 꽉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서양체조를 연습하듯 몸을 비틀고 흔들고 돌려가며 신체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시장입구에 있는 몇몇 옷가게를 기웃대며 귀동냥과 곁눈질로 훔쳐보던 끝에 흰색 반팔 티셔츠 두 장을 샀다. 생각한 것보다 간단하게 일을 끝마친 나는 이대로 회사로 돌아가기에는 어쩐지 밋밋하고 민숭민숭했다. 느긋한 마음으로 인파에 떠밀리며 시장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손끝에 매달린, 티셔츠를 담은 비닐봉지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오 분여쯤 들어갔다. 저만치 앞에 국수며 잡채며 순대 따위의 음식등속을 파는 먹자판이, 시장 한 가운데 통로를 중심해서 두줄로 마주보며 길게 늘어서 있었다. 좌판마다에는 사람들이 엉성하게 만든 나무의자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는 비교적 사람이 적게 앉아 있는 좌판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빨리 옮겼다.
 "어이, 거그 당신. 무담시 사람을 치고 다닌당가!" 순간, 갈라진 것인지 술 취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내의 둔탁한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탁 때렸다. 무엇 때문에 그 목소리가 나를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나는 무엇엔가에 홀린 것처럼 멈칫 선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어쭈. 이젠 째리봐야!" 완전히 무대뽀였다. 시비는 피하고 보는 것이 장땡임은 만고의 진리이다. 나는 머리를 슬밋 숙이면서 "아, 예, 제가 실수로 고마… 미안케 됐심더" 하는 말을 뱉아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니가미. 시장바닥에서 그럴 수도 있는 긴데" 하는 짜증스러움이 은근히 일어났다.
 
얼핏 보아 사십대 중반인 듯싶은 사내는, 얼굴에 술기운이 잔뜩 어려 있었다. 불쾌한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고 그 사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원위치하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완전히 맛이 가버린 생선찌개를 비싸게 사먹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그 사내를 대각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오륙 미터쯤 떨어져 있는 좌판나무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사내는, 내가 소주 한병과 순대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도 그 자리에 앉아 깡소주만 세 병째 들이켜고 있었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좌판대 여주인은, 사내가 그토록 오래 앉아 있는데도 소 닭 보듯 도대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시장바닥 음식좌판대에서는 시간과 좌석이 곧 돈임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운 나는 술기운이 얼근히 퍼졌다. 그 사내가 아까 내게 했던 행동을 떠올려보았다. 스멀스멀 부아가 돋아났다. 셈을 치룬 나는 처음에 왔던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다가 그 사내 가까이 가자마자 갑자기 속도를 빨리했다. 그것과 갈음해서 내 손끝에 매달려 흔들거리던 티셔츠를 담은 비닐봉지가 그 사내의 옆구리를 보기 좋게 툭 건드렸다. 그것을 느낀 순간, 나는 다시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하! 이 통쾌함이여! 자, 이제 시비를 걸어라. 아까맨크로 제발 시비를 걸어도라. 내도 배알이 있고 입이 있는 놈이다. 이 문디이 겉은 놈아. 내도 할 말은 하고 살자.
 등허리로 짜릿한 전류같은 것이 흐른다싶었는데… 어이쿠! 묵직한 것이 퍽 소리를 내면서 내 왼쪽어깨를 정통으로 때린 뒤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함이 들려왔다.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무리를 이루면서 한쪽으로 물러섰다.
 "오메, 저 씨볼놈 보소야! 야! 니놈 눈시깔은 신고 댕기냐, 개봉알맨키로 차고 댕기냐! 잉, 이씨볼놈아."
 왼고개를 틀면서 땅바닥을 내려보았다. 내어깨를 때린 것은 빈 소주병이었다. 홉으로 주고 섬으로 받은 것이다. 소주병을 보자 더욱 아파왔다. 나는 통증을 참으려고 코메디언이 몸을 배배 꼬는 듯한 동작으로 손을 등 뒤로 돌리면서 돌아섰다. 사내는 왼쪽팔꿈치를 탁자 위에 곧추세운 채 손바닥으로 왼쪽 턱주가리를 떠받친, 엇비듬한 자세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바닥에 밀려올라간 사내의 왼쪽 눈꼬리가 찌그러진 그믐달 같았다.
 주변 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이그, 지겨워서 미쳐볼겄네요이. 또 시작혔시야."
 "오늘은 누가 걸려드나 싶었더니…"
 "절마 자석은 술만 처묵으면 고마 저리 개구신이 돼삐니, 원…"
 치밀어오르는 화를 달래고 서 있던 나는, 상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용기를 얻었다.
 -저놈아 자석 편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때맞춰 술기운이 정수리 쪽을 간질거렸다. 나는 티셔츠가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바닥에 팽개치는 것과 동시에 사내한테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멱살을 잡자마자 힘껏 떠다밀어버렸다. 사내는 질퍽거리는 시장바닥에 싱거울 정도로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다음 동작을 취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시장바닥에 나동그라진 사내는 하체가, 정확히 말하면 허벅지 아랫부분이 없었다. 없어진 그 다리를 새까맣고 넓적한 고무로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밝은 곳에서나 가까이에서 보기 전에는 마치 검은 바지로 보이거나, 아니면 허벅지 위에 작업용 천이나 가죽을 걸쳐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나는, 조금 전의 그 역발산기개세는 어디로 출장을 모내버렸는지, 소한테 물린 놈처럼 허여멀검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기만 했다. 사내 또한 호흡을 멈춘 것처럼, 패대기쳐져 엎드러진 자세 그대로 꼼짝않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몸세포가 근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내와 나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그를 일으켜주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한발짝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윽고 사내는 피식피식 웃더니, 두 손바닥을 땅바닥에 짚으면서 익숙한 솜씨로 자기가 앉았던 술자리 쪽으로 기어갔다. 좌판대 앞에 다다른 그는 등짝을 나무의자 쪽으로 돌려 앉았다. 그리고는 두 팔에 힘을 주면서 물구나무서듯 하는 동작으로 나무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몇 번 그런 동작을 반복했지만 그때마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주위에 몰려서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시장상인들조차도 그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사내 또한 도움을 청하려는 태도는 눈꼽만큼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에 나는 지독히도 짓눌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싸움의 발단이야 어쨌든, 내 실수를 조금이라도 만회해야만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사내 쪽으로 다가가서 그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게끔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싱굿 웃으면서 그의 양쪽 겨드랑이에 두손을 쑥 집어놓고 번쩍 들어오렸다. 멈칫 놀랄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순간적이었지만,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내 눈이 극심한 충격을 받은 것과 동시에, 나는 사내를 끌어안은 채 시장바닥에 발라당 드러눕고 말았다. 사내가 내 오른쪽 눈두덩을 주먹으로 오지게 내려친 때문이었다.
 이젠 길게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뼈가 어긋나는 듯한 아픔은 두 번째 문제였다. 우선은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르는 불덩어리 같은 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턱 근육이 딱딱해지면서 이가 앙다물어졌다.
 -이 빙신자석을 오늘 고마, 팍 골로 보내삐리야지!
 그러나 내 생각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는 팔힘이 어마어마했다. 목에 새파랗게 핏줄을 세우며 두 손으로 내 멱살을 움켜지고 있는 사내는, 내가 아무리 요동을 치고 발광하듯이 잡아 흔들면서 주먹으로 쳐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짝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내 얼굴도 그의 박치기 반격을 받아 금세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구경꾼들은 말릴 엄두가 나지 않는지, 멀건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결국 시장경비원과 경찰관이 와서야 싸움은 간신히 끝이 났다.
 
그러나 싸움의 끝은 한편으로는 가관이요, 또 한편으로는 목불인견이었다. 나와 사내는 마치 뻘밭에서 죽기살기로 싸우다 끌려나온 두 마리 개꼴이나 다름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은 고사하고라도, 몸 구석구석 어디 한군데, 진창같은 시장박닥 오물이 묻지 않은 곳이 없었던 것이다.
 ×× 파출소 경찰관 앞에서 나는 심한 수치감을 느끼며, 피해자자술서를 작성해주었다. 내 심정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국 쏟고, 기기 데이고, 옷 버리고, 욕먹은 꼴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삼십대 초반인 듯한 경찰관은 피해자자술서를 건성건성 잃어보더니, 이번에는 피해자진술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참 동안 찍고 바르고 하는 식으로 피해자진술서를 작성해 나가던 경찰관은, 피의자가 처벌받기를 원하느냐고 내게 물어왔다.
 순간, 나는 보호실 안에 구겨박힌 것처럼 갇힌채 조그맣게 등을 웅크려 기대고 앉아 있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몸집이 유난히 초라하고 작게 느껴졌다.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는 자세로 앉아 있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보호실 철창 앞으로 걸어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사내는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엉망으로 엉켜 있는 사내의 머리카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담배갑을 꺼내 두 개피를 빼어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사내의 등을 툭툭 치고 나서 한 개피를 쑥 내밀었다. 사내는 고개만 조금 돌렸다. 그리고는, 멍은 들지 않았지만 밤송이처럼 부풀어오른 내 눈두덩을 흘끗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내는 터져서 시커멓게 변해버린 입술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일락말락하게 지으며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한 개피 담배 때문이었을까, 까닭 모를 연민의 정이 내 분노를 다독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홧김에 몇 마디 뱉아낸다. 그 뱉아낸 말이, 피해자진술서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은 저 하찮은 종이쪼가리에 끄적거려진다. 그래서 저 사내가 구류를 받지 않으면 구속이 될지도 모를 상황으로 내몰린다? 아까 생각을 하면 열불이 치밀지만, 저 사내를 처벌받게 해봐야 내게 득될 게 뭐가 있지?
 자리로 돌아온 나는 "피의자가 처벌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찰관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은 다음, 조서를 내 앞으로 디밀었다. 나는 "진술인 金敏守"라고 쓰고 나서 그 옆에 지장을 찍었다.
 사내가 보호실에서 불려나왔다. 그는 시장에서처럼 엉덩이로 바닥을 쓸면서 두 손으로 기어나왔다. 사내의 몸놀림에 따라 파출소 바닥은 마치 물걸레로 한 군데를 주욱 닦아놓은 것 같은 자국을 남겼다.
 경찰관 앞에 다다른 그는, 책상 옆에 놓여져 있는 의자에 한쪽 팔을 기역자로 꺾어 얹어놓는 자세로써 자신의 몸을 지탱했다. 경찰관은 그를 내려다보면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고상탁 씨. 당신 낼모레면 오십이야 오십. 나이값을 해야지 어쩌려고 이래? 당신 자꾸 이러면 말이야, 형사입건시키는 수밖엔 없어, 파출소가 당신 안방이야? 당신이 개판을 칠 때마다 차석님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알아?… 당신 때문에 미치겠어. 이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날마다 이러니."
 경찰관은 사내를 상대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해 나갔다. 경찰관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해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퍽이나 안쓰러워 보였다. 하리가 아팠는지 의자에 걸쳐놓았던 팔을 뺀 사내는, 파출소 바닥에 엎어질 듯이 구부정한 자세로 퍼져 앉은 채 묻는 말에 순순히 답했다.
 피의자신문조서 작성을 끝낸 경찰관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어쩔 거야! 피해자한테 사과하고 나갈 거야, 구류를 먹을 거야?"
 "‥‥‥"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파출소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가 마음에 없는 말일지라도 후딱 뱉아냈으면 싶었다.
 -고집 고만 씨우고 퍼뜩 사과하고 나가겠다카소. 고집 씨울 때가 따로 있는기요.
 어이구, 이 땁땁한 양반아! 퍼뜩!
 "어쩔 거냐니까?"
 이윽고 사내가 고개를 젖히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사내의 목소리는 목뼈에 목젖이 걸린 듯 투박스러웠다.
 "내가 잘못헌 거이 있응께 사과는 허야겄지라. 허지만 말이시, …쩌 사람도 나헌티 쪼깐 잘못헌 거이 있구먼."
 "?…. 잘못? 누가?"
 "쩌 사람이 나를 생각혀서 그랬다는 건 나도 안단 마시. 허제만… 해필이면 만인이 환시리헌 앞이서 얼굴 폴리게 동네 아그 안아주드끼 홀라당 안아볼껀 또 머다여."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홀라당 어쩌구" 하는 말에, 나는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내 웃음소리를 들은 그는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웃, 덜, 말어! 이왕지사 그럴라믄, 어깨동무를, 혀줬어야제!"
 그는 마치 동네 아이들 나무라듯 딱딱 부러지는 어투로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단 말야? 고상탁 씨, 그게 이유야? 그게?…"
 경찰관은 말을 하다 말고 "어께동무?… 어께동무…"를 중얼거렸다.
 "또 있당께. …새파란 사나새끼가 방정맞게 비니루봉다리 깐다악깐다악 혀가민서 지랄오도방정 떠는 꼬라지라니… 와이고메! 남사시럽구마."
 "나참, 진짜 지랄오도방정은 고씨 당신이 다떨어놓고 엉뚱한 소리는. 듣기 싫으니까 어서 나가요."
 사내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두 손으로 엉덩이를 끌며 파출소 문을 밀고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경찰관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파출소를 빠져나왔다. 사내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3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토요일 낮, 고상탁이라는 사내는 내 직장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날 파출소를 나온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며 화해를 청했고, 그는 무슨 생각인지 넘죽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술이 몇 잔 오가자, 넉살좋게도 "동상"으로 호칭했고, 나 또한 술김에 그를 "형"이라고 부르고 말았다. 팔자에 없는 형이 한 사람 생긴 것이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면서 언제든지 전화하라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가 고정적으로 맡고 있는 기획기사인 "살아가는 이야기"에 그를 취재해서 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퇴근 뒤 그와 ㅇㅇㅇ시장 부근에서 만나 일상적인 얘기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그런 다음 취재할 욕심으로 내 자취방에 그를 업고 와서 다음날 새벽 먼동이 희뿌염하게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권커니잣거니 술만 들입다 마셔댔다. 술판이 어느 정도 무르익게 되면 얘기 중심은 자연스럽게 가족사(家族史)쪽으로 흘러가게 마련인데도, -딱히 이것 때문이다 하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오가는 얘기라는 것이 갓난아이 오줌 싸듯 찔금찔금 단편적으로 비치다가 말았을 뿐, 서로의 속내를 드러낼 만큼 나아가진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가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연을 나름대로 짚어보았다.
 흔히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이랄까, 그런 종류의 한을 그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틀림없이(?) 부모와의 생사이별이 끼어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두 다리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많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왔을 것이고, 따라서 더욱 깊은 곳에 숨겨 놓은 한이 절절하리라는, 다분히 도식적인 생각이었다.
 새벽이 가까워오자 그는 술에 주눅이 든 눈으로 내 얼굴과 비어버린 소주병들을 바라보다가, 구석쪽에 등을 기대며 구들이 내려 앉을 만큼 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빛이 역력히 드러났다가 곧 사라졌다.
 새벽 다섯 시. 그는 피곤함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았고, 나 자신도 술에 지쳐버린 상태였다. 그와 나는 동시에 하품을 하며 방바닥에 길게 뻗어버렸다.
 "동상. 처으므로 마음 핀헌 하루연네. 인사 읍시 그냥 가네. 동상헌티는 난중에 저놔할 거시네. 고상탁이가"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고 일어난 내 머리맡에 그가 남겨놓은 글이었다.

4
 나는 주말이 되면 퇴근 뒤 고상탁과 자주 만났다. 그리고는 인적이 거의 끊어질 때까지 몇 군데씩 술집을 옮겨다니면서 폭음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와 기절하다시피 쓰러져 자곤 했다.
 고상탁의 술버릇은 모형으로 찍어낸 것처럼 한결같았다. 그 중에서 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버릇이 한 가지 있었다. 얼근히 술기운이 오르면 예의 그 "낙또오옹강…" 하는 따위는 어느 술집 어느 술꾼에게서나 보고 듣는 것이기 때문에 하등 문제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벌어지는 일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떡 본 김에 아이쿠 나 몰라라 떡판에 엎어지고 보자는 배짱인지는 몰라도, 그는 앞뒷자석이나 옆좌석 술손님 중에 "여자" 가 끼어 있으면 어거지나 다름없는 이유를 붙여 반드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종당에는 술집을 난장판으로 몰아가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 몇 번은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를 했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그런 난장판을 겪고 나자, 같이 앉아 있다는 사실부터가 짜증이 났고, 술집엘 들어가기가 겁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만나는 횟수가 쌓여갈수록 그의 그러한 행동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만 자꾸 쌓여갔다.
 그러던 차에 결국은 쌓여가던 짜증스러움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고상탁을 괴상스럽게 만난 지 벌써 다섯 달이 지나가는 구월 중순쯤이었다. 기사 마감 날짜를 이틀을 넘기는 바람에, 편집부장으로부터 꼬집히고 뜯기고 몰린 날이었다. "아침부터 엿먹은 날"이었다.
 "김 선배. 어제 김 선배 없을 때 고상탁이라는 분한테서 전화 여러 번 왔더랬어여."
 "…뭐래?"
 "뭐, 특별한 말은 없고, 그냥 전화 왔더라고 하면 안다던데요. 거의 삼십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왔어요. 횡설수설하는 게, 꼭 술마신 사람 같던데요."
 "짜증나. 인간이 왜 그 모양이지…"
 고상탁은 이날도 내게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알았어요. 예예 그래요. 글쎄. 알았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퇴근 뒤 고상탁과 약속한 술집으로 갔다. 그 술집은 여러 번 가봤기 때문에, 주인여자가 고상탁을 부축해서 의자에 앉혀주는 곳이었다. 술집 안은 탁자 한 개를 빼고는 한가로웠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약간은 겸연쩍은 듯 슬그머니 웃고는, 자신의 잔을 내밀며 술을 채워주었다. 탁자 위에는 이미 빈 소주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는 내 태도가 여느때와 같지 않다고 느꼈는지 눈치를 살피는 기미가 역력했다. 나는 한동안 그의 그런 태도를 못본 척 내버려두고 자작으로 몇 잔 따라 마셨다.

 "동상, 오늘 회사서 기분 언짢은 일이 있었어?"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보며 고개를 두어번 좌우로 흔들어, 그렇지 않다는 뜻을 나타냈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계속됐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눈이 반짝 빛을 내더니, 술집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삐뚜룸히 돌리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상탁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말았다. 문이 열리면서 남녀 한 쌍씩 네 사람이 웃고 떠들면서 술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술집 내부를 둘러보던 그들은, 하고 많은 탁자를 내버려두고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오른쪽 탁자에 자릴 잡았다. 왠지 불안했다. 여자들은 의자에 앉으면서 나와 고상탁을 번갈아보며 힐끔거렸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멍청한 표정을 한 채, 앞에 놓인 술병만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고상탁의 돌발적인 행동을 제어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었으며, 어느만큼 효과를 보는 것 같았다. "현재 상황 이상 없음" 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술집 탁자에는 술손님이 반나 들어찼다. 탁자마다 왁자지껄, 술판은 한창 매화타령에 업혀가는 건들팔월이었고, 우리가 앉아 있는 탁자에서도 예의 그 "낙또오옹강…"마지막 부분만 남아 있을 즈음, …역시 육감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남녀 일행의 좌석에서 여자들이 웃는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고상탁의 얼굴 표정은 그와 비례해서 점점 더 일그러져갔다. 나는, 도대체 이 사람이 술마시는 여자만 보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또다시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런 한가로운 생각은 잠시뿐, 부디 빼도박도 못할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밖엔 없었다.
 그러나 내 간절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은 터지고야 말았다. 고상탁이 갑자기 눈을 치뜨고서 술집을 뒤집기라도 할 것처럼 큰소리로 육두문자의 진국을 퍼담기 시작한 것이다.
 "요런 잡시런 지집년들이 오밤중에 사나새끼들허고 술을 처묵는다? 오메- 요사시런것들!"
 나는 맥이 탁 풀려버렸다. 펄펄 끓는 물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넣은 것처럼, 왁자지껄하던 술집 내부가 조횽해졌다. 욕을 먹은 다음 남녀 일행은, 처음엔 이게 무슨 수린가 싶어 주변을 휘둘러보며 의아한 표정들이었다. 그러다가 여자가 끼어 있는 좌석이 자기들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대번에 인상이 싹 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고상탁은, 아닌보살 가리산 지리산 타령을 읊어대듯 술집 천정을 올려다본 채 계속 욕을 하며 궁시렁거렸다.
 "씨볼 지집년들이 응뎅인지 궁뎅인지 방뎅인지를

<작가의 말>
 장애인들이 살아온 얘기와 내가 살아온 얘기와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오른쪽 다리를 절름거리기 때문에 결국 악어는 악어일 수 밖에 없는 것인데 그 악어에게 당해 왔지 않는가. 어쨌든 장애인들도 자기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에 허벅지게 늘려있는 악어들에게 이제 내가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장애인들에게 부탁을 드린다. 자신에게 조금 이득이 된다고 해서 엄벙덩벙 영합하지 말고 전체 장애인들에게 무엇이 도움이 되는가 서로 생각해보기 바란다. 장애인 여러분, 능력 없다고 날마다 떠들어대는 어론 매체에 대해서 무너지지 맙시다.

방구석에다가 꼭꼭 두시 않고서나, 요리저리 휘둘리고 싸댕기면 빵꾸나제, 빵꾸나!"
 "이봐! 당신 지금 뭐라 그랬어!"
 일행 가운데 남자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서는 손가락질을 하면서 따졌다.
 고상탁은 그 남자를 뾰족한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러기를 한참,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짓달 엿가락을 부러뜨리는 것 같던 목소리를, 칠팔월 엿가락 배배 꼬듯 말하는 것이었다.
 "나야? 나아 말이여, 난 자네보고 야그 안혔어. 제삼자는 빠지드라고잉." 남자는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독이 바짝 오른 독사처럼 푸르릉거렸다.
 "아니,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야, 이 자식아! 그렇게 막 욕해도 되는 거야! 난쟁이 똥자루만한 자식이 주둥아릴 함부로 까고 있어!"
 "믓이여! 난장이 똥옹자루? 긍께, 자네 눈까리엔 나가 난장이 똥자루로 보인다 이거제? 훠메. 미쳐불것는 거-. 아이갸, 요런 싸가지 읍는 놈 좀 보소야, 어이, 어이, 동상, 나가 난장이 똥자루면 요것덜은 그람 뭣이랑가?"
 고상탁인 이제 나까지 끌어들여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돌입할 태세였다. 나는 부쩌지 못했다.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술집 주인여자는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다는 표정으로 우리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탁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은 이쪽 사정은 관심 밖인 듯, 몇 번 바라보고는 그만이었다.
 "어이 이형. 저 인간 저거, 지금 보니까 다리병신이야. 그냥 내버려두고 술이나 마시자구. 상대해 봐야 우리만 손해야."
 일행 가운데 다른 남자가 동료를 끌어앉히면서 말했다.
 "다리뱅신? 오메 오메, 쩌 씨볼놈 보소야. 아니 이 씨볼놈아, 나가 다리뱅신이라서 니눔헌티 밥을 돌라고 혔냐, 돈을 돌라고 혔냐, 아니면 마누라 가운데를 한코 돌라고 혔냐?" 완전히 억지였다. 엎어진 김에 에라 쉬었다 가잔다더니, 고상탁의 행동이 바로 그런 꼴이었다. 술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젠 남녀 일행 네 사람 모두 잔뜩 화가 나서 씨근벌떡거렸다.
 "야 이 개자식아! 병신 소리 안들을려면 술을 처먹어도 좀 얌전히 처먹어라. 넌 술을 똥구멍으로 처먹냐! 이 ×자식아! 마누라 가운데가 어째? 이걸 그냥 확 밟아버려?"
 일행을 끌어앉히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그 바람으로 고상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고상탁도 그 남자 멱살을 움켜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고상탁이가 써놓은 각본대로 뒤엉키기 시작한 것이다.
 술집 바깥에는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키들거리거나 손가락질을 해가며 박진감 넘치는 한판 드잡이를 무료로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굳이 그 싸움판에 깊숙이 끼어든다거나 하는 따위의 행동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고상탁이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번은 뜨거운 맛을 보아야만 정신을 차릴 것이라는 내 생각과 오늘의 상황이 아퀴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상탁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을 잘코사니야로 바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조처를 취해야만 했다. 나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흉기가 될 만한 소주병 등을 한쪽으로 부지런히 치우는 한편, 양쪽을 적당히 뜯어 말렸다.
 싸움이 벌어진 지 십여 분이나 되었을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과 방범대원들에 의해 싸움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여섯 사람은 ××파출소로 연행되어갔다. 파출소 위치를 익히 알고 있는 나는 고상탁을 업고 맨 앞장을 서서 걸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맞은 고상탁은, 파출소로 가는 내내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파출소에서는 오십줄에 접어든 듯한 경찰관 한 사람이 "次席"이라는 명패가 얹힌 책상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차석은, 파출소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고상탁을 보자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아니, 이 친구 이거, 상탁이 아닌가!"
 "‥‥‥"
 우리는 고상탁을 필두로 파출소 벽에 붙박혀 있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이어서 고상탁을 제외하고 각자의 주민등록증을 경찰관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주민등록증이 없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지은 죄도 없이 주눅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잠시 후 고상탁과 싸웠던 일행이 먼저 당직경찰관 앞에 앉아 간단한 조서를 받았다. 그러기를 한 시간 여, 남녀 네 사람은 조서용지에 각자 지장을 찍고 다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고상탁과 나, 둘뿐이었다.
 그 한 시간 여를, 고상탁은 두 팔을 쩌억 벌려 의자 뒷부분에 걸쳐놓은 채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차석이 쯧쯧 혀를 차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 저 녀석은 천상 타고난 파출소 체질이군."
 그 말을 들은 고상탁은 약간은 멋쩍은지 두팔을 내려뜨렸다. 그리고는 짜증스럽다 못해 지겨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다는 생각과, 그리고 나서 앞으로는 고상탁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차석이 고상탁이 앞으로 와서는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 얼굴엔 피가 마를 날이 없구나. 고상탁, 넌 언제쯤이면 정신을 차릴래? 너, 요새 한동안 파출소 출입이 뜸하다 싶어 열심히 사나보다 했는데…, 제 버릇 남 못 주는군. 딱하다, 딱해."
 "차석 형님헌티는 참말로 미안시럽구만이라. 헐말이 읍어라."
 그렇게 길길이 기고만장 세상을 향해 뻗대기만 해오던 고상탁이도,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차석한테만은 고분고분했다. 내 눈에 비친 그런 모습은 불가사의한 신비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너, 앞으로 장사 그만 할 거냐? …어쨌든 먹고살자고 아옹다옹하는 거 아니냐. 널 보면 어떤 땐 화가 나, 이놈아!"
 차석이 고상탁이 앞으로 의자를 끌어다가 놓고 앉으면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진실로 안타까워하는 듯한 물기가 배어 있었다.
 "전에 너한테 분명히 애기했지! 네놈이 이뻐서 시장에서 장사 계속하도록 해준 건 아니라고, 어릴 때 다리 다친 내 동생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고상탁은 고개를 떨군 채 묵묵부답이었다.
 "이것봐 상탁이. 넌 내가 이 파출소에 계속 있을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린 육개월마다 바뀌어. 그렇게 되면 넌 단속 때마다 밥을 굶어야돼. 그리고, 자꾸 이러면 틀림없이 교도소로 가게돼. 내 말 알아듣겠어? 내 솔직히 애기하지. 시장상인들이 상조회를 통해 널 처벌해달라고 진정서를 낸 게 열 번도 넘어, 이놈아. …그렇게만 알고, 여기 있다가 술 깬 다음에 나가도록 해. 그리고 당신, 저쪽으로 좀 갑시다."

글/정희수
 

작성자정희수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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