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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할 수 있는 자가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영문의 영화 읽기]영화 "아들(Le Fils, The 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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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윤리학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지켜야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언제나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죄와 벌, 참아내기 혹은 폭발하기, 그리고 분노하기와 어렵지만 용서하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윤리에서 중용은 흔히 어정쩡한 양가감정(ambivalence)-이는 중요한 정신병 상태의 감정입니다-을 질타합니다. 흔들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듯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리타분한 윤리학적 논쟁을 이제는 옆으로 물리겠습니다.

 

오늘 함께 보고자 하는 영화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수년전에 실직여성의 삶을 미시적 현미경 표현으로 묘사한 ‘로제타’라는 영화 한 편으로 깐느 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던 프랑스의 다르덴 형제들이 2002년에 만든 ‘아들(Le Fils, The Son)’ 입니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작업은 이미 독특하기로 유명하고 특히 관객들의 구원심리나 안전망을 이미 꿰뚫어 본 후에 이를 무시하기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지요.

하지만 무시당한 관객들이 아무도 이 형제들에게 분노를 보내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영화 속 주인공의 예기치 못한 모습들은 모두 우리의 또 다른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100분 가까운 상영시간동안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고사하고 그 흔한 배경음악 한 소절이 나오지 않는 이 영화를 우린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카메라는 늘 주인공 올리비에(배우의 실제이름과 극중 이름이 동일합니다)의 뒷모습이나, 주름지고 거친 손등, 통증에 시달리는 허리, 땀이 배어 나오는 콧잔등 등을 집요하게 비추고 따라다닙니다. 첫 장면부터 교도소 청소년 재활교육센터에서 목공일을 가르치는 목수, 올리비에의 다부진 뒷모습이 비칩니다. 그 너머 가려진 누군가의 얼굴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그가 왜 목수 일을 하는지, 그가 가르치는 소년이 누구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영화를 봅니다. 답답합니다. 갈증이 나고 갑자기 누군가가가 뒷덜미를 움켜질 것만 같은 적막감이 영화관 내부를 가득 채웁니다. 올리비에의 거친 숨소리, 나무 깎는 소리만이 유일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입니다. 이혼한 아내를 만난 뒤에 몇 마디 대사를 통해서만 올리비에의 아들이 5년 전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는 것과, 이로 인한 부부의 헤어짐이 슬쩍 나타납니다.

전처가 재혼하겠다는 말에도 올리비에는 말이 없습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나무길이를 재는 줄자만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가 찾아서 목공일을 가르치는 한 아이가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아들을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40분이 지나서야 관객들은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는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윤리학 교과서가 되어 올리비에의 마음에 들어갈 때입니다.

과연 올리비에는 아들을 죽인 아이를 용서할 것인가 아니면 더 지독한 방법으로 복수할 것인가에 쏠리기 시작합니다. 헐리우드식의 시나리오와 헐리우드식의 감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지금부터 불편하고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왜 저렇게 답답하게 뜸을 들이는 것인가. 그저 네가 내 아들을 죽인 나쁜 놈이구나 외쳐주기를 우리는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그의 등 뒤를 더 숨가쁘게 따라갑니다. 벽이나 유리창을 이용해 올리비에의 무표정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비추고 아들을 죽인 소년(프란시스)의 천진난만한 얼굴 위로 간간히 무서움을 드릴 뿐입니다. 만일 여러분 중에 폐쇄공포증이 조금이라도 있으신 분들은 숨이 차오를 것입니다.

영화 말미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옵니다. 외진 제재소에 이제 둘만이 남게 됩니다. 드디어 올리비에는 아들의 복수를 할지 모릅니다. 그에게 더 이상의 관용이나 용서를 바라는 관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죄를 용서하는 입장에 서서 거꾸로 자신이 프란시스가 죽인 소년의 아버지임을 고백합니다. 아이러니의 극치입니다.

보통의 영화에서는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빕니다. ‘아들’은 정 반대입니다. 겁에 질린 프란시스는 결코 용서를 바라지 않습니다. 애걸복걸하면서 매달리지도 못합니다. 사실주의에 입각한 다르덴 형제의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범인이 그 아들과 똑같은 18세의 아이라는 사실 앞에 복수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올리비에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프란시스를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을 죽인 이유에 대해 추궁한 뒤 무서움에 자기도 모르게 목을 졸랐다고 얘기하고 금새 잠들어버리는 프란시스에게 올리비에는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합니다. 윤리학이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체념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질리도록 무서움 속에 살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분노에 가득 찬 그 순간에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입니다. 복수를 체념하는 순간, 사람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비평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면서였습니다. 흔히들 마음을 비운다는 구실로 지리산을 많이 찾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올라간 장터목 대피소의 화장실에서 우연히 바라본 낙서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지리산에 내 마음을 버리고 나를 용서하며 가노라.’

위의 낙서를 바라보며 많이 웃었습니다. 산은 말이 없고 그 산이 받아들이지 않는 용서를 굳이 화장실 귀퉁이에 써 붙인 그 용기가 가련하면서도 우스웠습니다. 우리가 과연 무엇을 버리고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용서와 미움과 안타까움을 버리지 못한 채 그저 가지고 간 쓰레기와 함께 산을 내려왔습니다.       

미국의 대표적 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아들은 위대한 영화다. 이 영화에 감흥을 받을 수 없다면 그건 당신이 얼마나 더 성장해야 하는 가를 말해주는 척도가 될 것이다.”

너무 이 말에 기죽지는 마십시오. 아직 성장해야할 구석이 있다는 것은 무한한 잠재력을 내포한 것이니까요. 누군가를 용서해야만 하는 계절입니다.

감기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조심하십시오.
다음달에 뵙겠습니다.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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