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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사(白衣社)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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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1945-1949년)에 백의사(白衣社)라는 비밀 결사조직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백의사는 중국 장개석의 지하 공작단체 남의사를 본떠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뜻으로 45년 12월 서울에서 조직된 단체입니다. 당시 백의사의 본거지는 서울 궁정동 안가,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쓰러진 곳이기도 합니다. 이 조직의 보스는 염동진 혹은 염응택이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는데 김일성 간담을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였다는 후대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염동진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하들이 그를 맹인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각설하고 백의사의 혁혁한 활동내역을 말씀드리면 먼저 백의사는 1946년 3월1일 평양역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조직원을 보내 기념식에 참석한 김일성. 김책. 김두봉 등 북한정권 핵심인물들에게 수류탄을 투척해서 응징을 가했습니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백의사는 해방공간에서 활개치던 좌익 인사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재작년 미국에서 공개된 속칭 실리 보고서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실리란 인물은 해방공간에서 미군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로 근무했던 인물이고, 그가 백범 김구 암살 사흘 뒤인 1949년 6월29일 작성해 다음날 미 육군 일반참모부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보고서는 신뢰도 A(정보원)-2(내용)로, 미 정보기관의 평가에서 신뢰도가 B-2 이상이면 신뢰할 만한 정보로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실리 보고서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지목하고 있지는 않지만 김구 암살의 배후로 백의사를 염두에 둔 듯 염동진과 백의사, 그리고 백의사 내부의 혁명단 조직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리는 염동진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업무를 통해 접촉했던 한국인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악질적인 인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렇지만 20개월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 실리는 백범 암살범 안두희에 대해서는 백의사의 구성원이자 혁명단 제1소조의 구성원이라고 지목한 후 안두희가 속해 있던 백의사 내부 혁명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실리에 따르면 혁명단은 5명씩 4개조의 구성원들로 조직되어 있으며 이들은 민주한국과 한국민족주의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든 암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이를 수행하고 애국자로 죽겠다는 피의 맹세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리는 안두희도 피의 맹세를 했고, 백범 외에도 해방공간에서 2명의 저명한 한국 정치인, 즉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피의 맹세를 한 백의사의 구성원이라는 당시 항간의 소문이 있다고 보고서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리는 또 이 지하조직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라며,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백의사에는 군인, 해안경비대, 세관원, 경찰관, 소방관, 정부 관리, 정치인, 상인, 산업가, 밀수꾼, 농부, 보통 시민 등 한국의 모든 계층이 모여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백의사와 관련된 또 다른 문건을 보면 염동진은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하게 혼자서 점조직으로 조직을 운영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백의사 단원의 수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만여명에 이르렀다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근거는 충분한 가설도 있습니다.
실리 보고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염동진과 미군 방첩대(CIC)와의 관계입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염동진의 주 채널은 당시 CIC 서울지구 대장인 미 육군 소령 위테커였고, 그는 궁정동 백의사 본부를 찾아와 염동진이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백의사 활동을 비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약속대로 위테커는 백의사가 북한에 파견할 첩보원 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고 하는데, 훈련장소는 위테커의 도움으로 마련한 정릉 골짜기의 외딴집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부호의 별장으로 쓰이던 그 저택은 저택 주변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백의사가 은밀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합니다.
내친김에 백의사 내부에 대해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의사의 궁정동 안가에는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밀실이 있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의사 단원 가입의식이 거행됐다고 합니다. 백의사를 다룬 책을 보면 신입 단원들은 먼저 여기서 보스인 염동진과 맞절하고 무릎을 끓은 채 마주앉아 오른손을 펴든 다음 하나, 나는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 둘, 나는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셋,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맹세한 다음 자기 손가락을 베어 준비된 서약서에 그 피로 수결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만, 됐네, 거기까지, 그 정도면 백의사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진 것 같군, 수고했네 수고했어, 자네는 나가서 부를 때까지 대기하고 있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젊은 비서가 서류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자 실내는 다시 팽팽한 긴장에 휩싸였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중앙에 막 담배를 입에 문 장이 앉아 있었는데, 그는 이 날 모임의 주선자였고 전직은 군 장성이었다. 장의 오른쪽에 전 국회의원 이가 피곤한지 안경을 벗어들고 손등으로 눈을 훔치고 있었다.  그는 박정희 때부터 전두환 때까지 내리 5선을 기록한 옛 여권의 실세였다. 이의 옆에 김이 눈길을 허공에 둔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재벌의 오너였다. 김의 맞은편에 정이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북 출신으로 내무장관과 총무처 장관을 지낸 전직 관료였다. 마지막,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며 골똘히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박은 역시 이름만 대면 초등학생도 아는 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본인은 작금의 상황이 백의사가 활약하던 해방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무거운 침묵을 깬 건 장 이었다. 그는 담배 재를 재떨이에 털고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해방공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그때와 마찬가지로 피로 지킨 조국이 친북, 좌경, 반미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습니다. 다행히 노무현의 국가보안법폐지 발언 이후 현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원로들이 나서 뭔가 힘을 보태야 도리일 것 같아서 오늘 모임을 마련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지금 백의사 같은 테러조직을 만들자는 얘기인 것 같은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전 국회의원 이가 안경을 고쳐 쓰고 매서운 눈빛으로 장을 쏘아보며 말을 받았다.  
“테러조직이라뇨, 절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제가 알고 있는 백의사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한 구국 비밀 결사조직이었습니다. 테러와는 거리가 한참 멀죠. 김일성을 응징한 걸 테러라고 하면 죽은 백의사 단원들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장이 손사래를 치며, 이의 말에 화가 났는지, 이를 마주 쏘아보며 큰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전 장 장군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테러조직이 됐건 비밀 결사 조직이 됐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노출되지 않는 비밀 조직을 만드는 것은 이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 입니다.”
신문사 논설위원인 박이 낮은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박에게로 향했다. 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는 행위를 그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그리고 있는 향후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국가보안법은 한나라당이 반발하겠지만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민주노동당 삼 당이 똘똘 뭉쳐 조만간 결국 폐지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 보듯 뻔하게 이 나라는 급속하게 혼란의 소용돌이로 말려 들어갈 겁니다. 자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좌익 세력들이 거의 매일 도심에서 집회를 열어 인공기를 나부끼며 거리를 질주하는 빨갱이들의 세상이 온다구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단언하지만 국가보안법은 문제도 되지 않는, 한때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문화혁명에 버금가는 또 다른 혁명적인 상황들이 눈앞에서 벌어질 것입니다. 애석하지만 지금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다 포함될 것 같은데, 이 나라에 인민재판을 통한

 
숙청의 회오리가 휘몰아친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정권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다름아닌 주류그룹 해체를 통한 지배세력의 교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순이 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안절부절 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우익도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조만간 장 장군이 언급한 대로 해방공간에 필적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겁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나와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자위 수단을 마련해야죠. 저는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비밀 조직 결성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저, 주제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전직 관료 정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잔뜩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저는 우리가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기 전에 우선 일제 시대 때처럼 해외에 망명정부를 먼저 만드는 게 순서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한국 자본의 대탈출이 시작됐다며 돈 있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해외의 부동산을 매입해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등지의 한인타운 주변 집 값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들은 이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민을 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부추겨서 미국에 망명 정부를 만들게 하는 겁니다. 당연히 미국도 도와주겠지요. 그러면…”
“그런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얘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정의 말을 자른 건 이 였다.
“정 장관님, 신문에서 이런 기사는 보지 않았습니까? 해외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이민 가기 전 고위직 신분을 이용해서 은행이나 카드사에서 거액의 대출을 받아 가지고 줄행랑 쳤다는 겁니다. 그 액수가 평균 한 사람 당 1억2천만원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이런 부도덕한 인간들이 망명 정부를 만든다면 과연 국민들이 호응할까요? 택도 없는 얘기입니다.”
머쓱해진 정이 다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가 말을 이어갔다.
“이 자리에 오기 전 연줄이 닿아 알고 있던 이름은 밝힐 수 없는 현 정권의 실세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나라가 혼란해 질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렇게 국보법 폐지에 목을 매느냐고 물어보니까 돌아온 대답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율배반적이게도 경제 얘기를 꺼내더군요. 그 친구 말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에 의존해온 한국 경제가 한계상황에 다다랐다는 것이었습니다. 뻔히 아는 얘기지요. 저가품은 중국에 밀리고 우리 상품을 사주던 미국과 일본은 빗장을 걸고, 그래서 한국 경제의 미래를 대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친구 말이었습니다. 뭐, 이 얘기도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대륙으로 진출해서 무한한 자원을 가진, 아직은 미개척지로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라는 시장을 개척하는 게 한국이 살길이라는 거죠. 그럴려면 대륙으로 진출하는 통로인 북한과 적어도 적대적인 관계는 벗어나야 한다는 게 그 친구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미국 얘기를 꺼내더군요.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미국은 점점 고립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친구라는 사실이 국제사회에서 더 이상 자랑이 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현재 미국이 이슬람 국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얘기인 것 같았습니다.”     
하하,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소리군요.”
장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상황이 무척 심각합니다.”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재벌 오너 김이 나섰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관심이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예민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 예로 미국의 마이클 무어가 만든 화씨 9.11이라는 영화가 작년에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걸 예사롭게 보지 않습니다. 작품성도 없는 단지 반 부시를 주장하고 있는 영화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건, 그만큼 유럽인들의 바닥 정서가 미국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증거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 의원님이 지적하신 미국이 고립되고 있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얘기지요. 제가 말이 나온 김에 영화 얘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미국의 최근 상황을 다룬 화씨 9.11이라는 영화를 보면 오사마 빈 라덴이 사우디인이고, 테러범의 대다수가 사우디인인데, 미국이 엉뚱하게 사우디 대신 아프카니스탄을 공격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이유를 영화는 사우디 왕족들이 막대한 오일 달러를 미국에 투자해서 미국 경제의 7%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우디가 투자금을 회수해 가면 미국 경제가 바로 절딴나기 때문에 미국이 사우디인들에게 테러를 당했지만 사우디를 비호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지요. 마찬가지로 이라크 침공도 미국이 침공 이유로 내세운 막대한 화학무기 은닉은 말 그대로 핑계일 뿐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는 석유가 필요해서 침공했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정설입니다. 이렇게 미국은 철저하게 자국의 경제 논리에 따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무력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미국의 실체를 국제 사회가 인지하고 있고, 그래서 부시의 미국은 고립의 길로 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초강대국이고 국제 사회의 경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미국에 맞장 뜨자고 덤빌 국가가 없죠.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부시의 미국이 이 정권을 심히 불쾌해 하고 있다는 겁니다. 저도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이라크 침공 1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부시가 이라크에 군대를 파견한 나라들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미국의 동맹국들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그때 한국은 거명되지 않았죠. 저는 아무리 부시가 머리가 나쁘다지만 건망증 때문에 한국을 빼는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런 거죠. 이 정권이 미국에 단단히 미운 털이 박혔기 때문에 부시가 불쾌한 감정을 그런 식으로 드러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우익들이 저항권을 행사해서 궐기한다면 반드시 뒤에서 미국이 도와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장이 김의 말을 반박했다.
“그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장 장군님은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보고 계시는 겁니다.”
이번에는 박이 나섰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 버릇인 손가락으로 탁자를 치는 행위를 되풀이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미국은 광주사태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그나마 이어져오던 미국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광주사태로 인해 순식간에 적대적인 감정으로 바뀌었죠. 또 다시 미국이 내정에 개입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강압적인 정권이 등장하지 않는 한 설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 말고도 장 장군은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 하셨지만 저는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아까 김 회장이 얘기한대로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철저하게 이익을 쫓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는 미국이 탐낼 석유가 없다는 겁니다. 미국에 있어서의 한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사실상 미국의 식민지인, 미국 국채를 워낙 많이 갖고 있어서 돈을 빼가면 미국이 망하기 때문에 사우디와 마찬가지로 비호할 수밖에 없는 일본을 지키기 위한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건데, 물론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한국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불리하면 군대를 빼서 일본으로 철수하면 그만이라는 거죠. 성미 급하신 원로분들께서, 아마 장 장군님도 똑같은 생각을 갖고 계실 것 같은데, 왜 미국이 북한을 가만놔두냐, 미국의 화력이면 북한 하나 절딴 내는 건 시간문제 아니냐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제 생각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게 확인돼도 미국이 그걸 이유로 이라크처럼 쉽게 침공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건 어린아이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인데, 이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거죠. 미군이 코앞에 들이닥치는데 중국이 가만있겠습니까? 결론을 내리면 저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 우익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자위 수단을 마련하고 그걸 기반으로 대중들을 설득해서 궐기하는 게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을 하자는 겁니까? 말자는 겁니까? 말씀들을 들어보면 불리한 상황만을 얘기하시니 우리가 모인 취지가 무색해지는군요.”   
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권은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는 게 제 소신입니다.”
재벌 오너 김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이 어느새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저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속성상 이윤 추구가 절대 가치이죠. 부동산 투기가 됐건 밀수가 됐건 금융 사기가 됐건 돈만 벌면 그만입니다. 이윤 추구에 도움이 안돼서 장애우 고용도 부담금만 납부하고 고용은 기피하고 있습니다. 제 입장에서 이 정권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뭐냐면 규제니 뭐니 해서 돈을 버는데 사사건건 간섭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짜증 나는 거죠. 이 자리에 모인 분들만이라도 솔직해 졌으면 좋겠습니다. 실례지만 장 장군님은 집을 몇 채 가지고 계십니까?”
“강남에 조그만 빌딩 하나, 분당과 일산 천안에 작은 아파트 세 채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의원님은 과다한 토지 보유로 예전에 재산 공개 때 문제가 됐던 걸로 아는데, 맞죠?”
“큰 땅은 아니고 아내 명의로 충남권에 땅이 몇 만평 있습니다.”
“박 위원님은?”
“신문쟁이가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하면 먼 친척 명의로 된 땅이 강남과 판교에 몇 만평 있긴 한데,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건지…”
“우리에겐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여쭤봤습니다. 저는 누가 뭐라건, 또 어떤 논리로 덧씌운다 해도 이 싸움은 근본적으로 유한계급과 무한계급의 싸움이라고 봅니다. 쉽게 얘기하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싸움이죠.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정권이 우리보다는 가지지 못한 자의 편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권이 집권한 후 당장 집 값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가 채워지지 않는 거죠. 저를 포함해서 여기 모이신 분들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표는 뭡니까? 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그 부를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물려주는 거 아닙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이 정권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심각한 걸림돌입니다. 하루속히 무너뜨려야 하는 이유가 충분한 거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장 장군님, 혹시 군 쪽은 알아보셨나요? 쿠데타가 가능한지…”
정이 손을 번쩍 들고 장에게 물었다.
“연줄이 있어서 의사 타진을 해보기는 했는데… 어려울 것 같습디다. 예전의 군대가 아니고, 탄핵 후폭풍 기억하시죠? 단순한 국민들이 쿠데타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군 고위직 얘기였습니다. 5.16 혁명 같은 쿠데타는 어렵다고 봐야죠.”
장이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우리의 무기는 뭐가 있습니까? 비밀결사조직밖에 없는 건가요?”
전직이 국회의원인 이가 불안감을 느꼈는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가진 최대의 무기는 바로 돈입니다. 돈의 힘으로, 돈의 위력으로, 이 정권을 반드시 전복시킬 수 있습니다.”
신문사 논설위원인 박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쐐기를 박고 나섰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이 박에게로 집중됐다. 
지금 우익들은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있습니다. 이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거죠. 그들에게 돈이라는 실탄을 제공하는 겁니다. 물어봅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나요? 뭐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까짓 총 몇 자루 구하는 거, 그리고 신용불량자나 조폭들을 돈으로 고용해서 이 정권의 핵심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돈만 있으면 사설 군대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안 되면 외국에서 용병을 모집해서 데려오는 겁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우익들에게 돈이라는 절대적인 무기가 있다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박이 말을 마치고 동의를 구하듯 일행을 한 사람 한 사람 쏘아보았다.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리며 박의 말에 동감을 표시했다.
“정리하겠습니다. 역시 박 위원님은 신문사에 계시다보니 상황판단이 빠르시군요. 까짓 거 돈의 힘으로 비밀 결사조직을 만드는 겁니다. 돈 몇 백만원씩 안겨주면 하다못해 노숙자라도 데려올 수 있겠죠. 그러면 오늘 모임은 절대 비밀로 하시고, 각자 돌아가셔서 제 2의 백의사인 우리 비밀 결사조직에서 각자 어떤 역할들을 하실 지 깊게 고민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이 만족한 듯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전직 관료 정이 갑자기 “잠깐!”하고 외치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분들 혹시 리디노미네이션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게 뭔데요? 천지가 개벽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장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리디노미네이션이라는 말은 한국어로 화폐액면변경, 즉 화폐개혁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제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권이 조만간 우리 가진자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화폐개혁을 단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정희 때 기억하시죠?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개인 당 금액을 정해서 교환해 줘서 부모들이 낭패를 겪었던 일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앉아서 영문도 모른 채 당할지 모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우선 가지고 있는 돈을 외화로 바꿔서 외국은행에 예금을 하십시오. 제가 추천하고 싶은 상품은 달러 연금입니다. 달러 연금은 미국 달러로 미국 은행에 보험료를 내고 나중에 연금을 미국 달러로 받을 수 있는 상품입니다. 달러로 받기 때문에 화폐개혁이 돼도 전혀 상관이 없죠. 그리고 돈이 남으면 금은방에 달려가서 금을 사놓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절대 금값은 내리지 않을 테니까 화폐개혁이 돼도 안심할 수 있는 실물자산에 투자하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정 장관님은 역시 재테크에 밝으시군요.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모임의 주선자로서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우리 조직은 어디까지나 해방공간에서 활약하던 백의사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서두에 제 비서가 백의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빼먹은 말이 있습니다. 백의사의 보스 염동진은 중국 또는 일제의 고문에 의해 시각장애우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우리의 비밀 결사 조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상징적으로 염동진 처럼 시각장애우를 데려다가 보스로 앉히는 게 어떨까 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자 제 말에 이의가 없으시면 흩어져서 속히 현 정권의 무지막지한 고문으로 시각장애우가 된 인물을 찾아냅시다. 그게 우리의 첫 번째 할 일입니다. 여러분, 긴 시간 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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