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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슬픈연가>에 보내는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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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보다.
MBC <슬픈연가>의 출발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서 살아생전 여성장애우가 주인공으로 나서는 미니시리즈를 목도할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곳엔 여성도 없었고, 장애우도 없었다.
단지 ‘혜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스타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현실 보다 못한 드라마
지난 해 10월 EBS는 ‘프리쥬네스 인터내셔널’한국 시사회를 개최해 방송관계자들의 높은 호응을 받았다. 프리쥬네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어린이, 청소년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행사로 다양한 국가에서 제작된 독창적인 프로그램들을 접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작품은 프랑스에서 출품한 <그들이 너를 보는 방법>(다큐멘터리)이었다. 시각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의 삶을 담은 <그들이…>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기존의 다큐멘터리와 큰 차이를 보였다.
먼저 <그들이…>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비장애우가 아닌 장애 가진 사람들의 시선에서 관찰된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시각장애청소년들의 고민은 보이지 않은 눈이 아니라 이성과의 사랑이었고, 이들의 관심은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외모에 있었다. 저시력 장애여성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여성에게 눈화장을 대신 해주며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은 여느 여고생들의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물론 ‘장애’도 이들의 고민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장애는 비장애우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절망’의 대상이 아닌 생활의 ‘불편’을 주는 요소였다. 장애우로 살면서 겪는 비장애우와의 갈등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그들이…>의 백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에 곱게 화장을 했던 주인공 시각장애여성은 선글라스를 끼지 않았다. 무안구증으로 비장애우의 눈과 전혀 달랐지만 그는 자신의 눈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계기는 남자친구의 말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말했다. “저도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까봐 선글라스를 끼곤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남자친구가 말리더라구요. 너의 눈은 그 어떤 눈보다 아름답다고. 지금의 눈을 가진 너를 사랑한다고요.”
맞는 말이다. 지금의 나를 아껴주는 게 사랑이다. <그들이…>가 보여준 현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게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줬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이 프랑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오늘도 사랑에 빠져 아파하고 즐거워하는 장애우가 있을지 모른다. 그 대상은 장애우일 수도 있고 비장애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드라마는 장애우에게 그 어떤 상상도 허용하지 못하고 있다. 비장애우의 눈에 의해 재단된 ‘장애우’는 고정된 캐릭터로 드라마를 전전하고 있는 중이다.

시각장애 가진 신데렐라 등장
MBC <슬픈연가>는 제목 그대로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박혜인(김희선 분)과 서준영(권상우 분), 이건우(연정훈 분)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이들은 서로 공통점으로 엮여 있으면서 운명적 사랑임을 강조한다.
이런 줄거리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이 보다 더 뻔하고 유치한 줄거리는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주인공들의 캐릭터며 드라마가 갈등을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슬픈연가>의 박혜인은 기존 드라마의 여주인공 캐릭터들과 비교해도 한참 뒤떨어져 있다. 최근에 등장한 드라마의 여성캐릭터들은 남성에게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는 노력을 많이 보여줬다. 그러나 박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뜨개질과 노래뿐이다. 시각장애를 갖고 있는 박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장갑을 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는 생략됐다. 노래도 스스로 발견하고 노력한 재능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의해 만들어진 재능이다. 박혜인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서준영과 이건우이 등장해 문제를 해결하며, 그 때마다 박혜인은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흘린다.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박혜인의 모습은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강화되고 있다. 즉 박혜인은 시각장애를 가진 신데렐라에 불과한 것이다.
서준영과 이건우도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왕자님 캐릭터에서 한 발짝 변화도 없다. 박혜인을 위해 무모하게 싸우며 모든 것을 건다. 서준영을 사랑하는 조연으로 등장하는 차화정(김연주 분)은 전형적인 악녀의 역할로 서준영과 박혜인의 사랑을 질투하고 드라마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차화정은 서준영이 사고로 죽었다고 박혜인에게 거짓편지를 쓰는 등(7회) 극단적인 행동들을 반복해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게 하고 있다. 또 미모와 재능을 갖춘 그가 10년 이상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서준영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박혜인의 캐릭터는 비장애우 남성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다. 박혜인은 서준영이 자신의 얼굴에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가도 키스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며(2회분)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리고 청순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도박에 빠진 이모와 살지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천사표다. 남자주인공을 위해 100통의 편지를 쓸 정도로 헌신적이며 그를 위해 장갑을 뜨고 스웨터를 뜨는 게 박혜인의 주요 일과다. 따라서 박혜인의 시각장애는 남성의 부성애를 자극하는 장치에 지나지 않다.

드라마 속 장애여성은 변화했는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여성의 등장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최근작만 살펴봐도 영화로는 <오아시스>(지체장애우>, <후아유>(청각장애우), <안녕! UFO>(시각장애우), <얼굴 없는 미녀>(정신장애우)가 있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MBC <엄마야 누나야>와 <우리집>의 여주인공은 청각장애우였고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윤서경(전혜진 분)은 어릴 때 사고로 지능이 멈췄다. MBC <불새>는 지체장애우, SBS <내사랑 토람이>는 시각장애우였다.
그러나 드라마는 영화와 비교해 장애여성의 캐릭터가 제자리걸음이다. 오히려 여성장애우의 이미지만 차용하는 뮤직비디오들과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장애우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자.
먼저 <오아시스>. <오아시스>는 많은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공주(문소리 분)과 종두(설경구 분)의 사랑을 날것으로 전했다. 문소리는 기존의 여성장애우들이 보여줬던 ‘휠체어에 앉아 있는 긴머리의 청순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뇌성마비 장애우의 모습을 그대로 연기했다. <안녕!UFO>의 경우(이은주 분)의 첫 대사는 “장애인인데 좀 봐주세요”다. 헤어진 연인의 강의실에 찾아간 경우는 이런 뻔뻔스런 대사를 날리며 청강을 하겠다고 말한다. 경우는 이별 후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지기보다 집에서 나와 구파발에서 독립을 시작한다. 장맛비로 침대 아래까지 물이 차던 날, 경우는 이 마저도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몇 번이나 다짐한다. 만화가 장차현실 씨와 딸 은혜(다운증후군)의 모녀 이야기는 현재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은혜가 주인공으로 직접 나선다.
이에 비해 드라마는 너무나 전형적이다. <슬픈연가>의 박혜인은 손에 든 흰지팡이가 아니면 장애를 가진 사람임을 인식하기조차 힘들다. 이는 시각장애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지만 비장애우의 세상에 장애우의 등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심리가 반영돼 있기도 하다. 따라서 <슬픈연가>에는 박혜인이란 인물에 몰입하기 힘들고 김희선이라는 스타의 이미지만 남아있다. 차라리 김희선이 가지고 있는 통통 튀고 개성이 강한 이미지를 활용해 “시각장애우라고 구질구질하게 다니는 것은 질색이야. 나는 최고로 예쁜 장애우야”라고 말하며 긴 생머리를 다듬거나, “그래 나 시각장애우다. 어쩔래”라고 큰소리치며 두 남자를 휘어잡았다면 속이라도 시원했을지 모른다.
<슬픈연가>의 박혜인은 MBC <엄마야 누나야>의 황수정, MBC <우리집>의 유민과 비교해도 별반 차이가 없다.
반면에 장애남성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경우는 또 다른 차이를 보인다. 장애가 있는 남성은 주로 장애인의 날을 맞은 특집 드라마에 더 자주 등장했고 이들은 장애를 극복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역할을 주로 맞는다. MBC <눈먼 새의 노래>(시각장애우)의 안재욱은 시각장애가 있는 강영우 박사의 실화를 그렸고, 탤런트 김정균은 뇌성마비 장애우로 나와 직장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최근작 KBS <금쪽같은 내새끼>나 <부모님전상서>에 등장하는 남성장애우는 모두 어린이로 설정해 가족과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할 존재로 묘사되고 있어 논외다. 
그러나 장애가 있는 남성이 멜로나 트랜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KBS 아침드라마 <하얀 민들레>에서 탤런트 김광필이 청각장애우로 등장해 탤런트 박선영과 사랑을 나누었던 모습, MBC <눈먼 새의 노래>에서 안재욱(시각장애우)과 김혜수 커플 정도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처럼 장애우가 등장하는 멜로드라마의 커플은 대부분 장애여성과 비장애남성의 결합이다. 보호받아야 될 존재라고 인식되는 ‘여성’과 ‘장애우’의 조합은 자연스럽지만 ‘능력’이 거세된 남성은 드라마안에서 매력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아울러 드라마 속 장애여성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존재는 될 수 있으나 함께 생활하는 동반자로는 그려지지 못하고 있다. 일반 드라마의 여성캐릭터가 주로 사랑에 빠지는 미혼여성에서 주부, 직장인, 이혼녀 등으로 다양하게 그려지는 것과 비교한다면 차이를 알 수 있겠다. SBS <내사랑 토람이>의 하희라 정도가 결혼 후 중도에 시각장애를 갖게 돼 겪는 갈등을 그렸으나 드라마의 핵심은 안내견 토람이와 시각장애우의 관계에 있었다.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윤서경은 아들 갈치(박건태 분)를 키우고 있으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고, 오히려 갈치가 윤서경을 보호하는 역할을 맞는다.

드라마도 “눈을 떠요”
시청자들을 가장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박혜인이 1월 말쯤 수술로 앞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박혜인의 이모(진희경 분)은 “혜인이가 내 실수로 시력을 잃었지만 수술만 하면 앞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돈 벌어서 눈 수술을 꼭 시켜줄 것이다”며 이를 암시해왔다. 아마도 재벌2세인 이건우에 의해 박혜인을 수술을 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세 명의 관계는 더 복잡해 질 것이다. 이는 MBC <불새>의 윤미란(이혜영 분)이 휠체어를 타다가 갑자기 걸어 다녔던 설정만큼이나 황당하다.
현실적으로 장애가 사라지는 것은 MBC <!느낌표>의 ‘눈을 떠요’ 코너만큼이나 실현되기 어렵다. 더구나 <!느낌표>의 주인공들은 눈을 뜬 후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고 꿈이 있었다. 그러나 기껏해야 윤미란의 목표는 복수고, 박혜인의 목표는 서준영의 얼굴을 보는 일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주인공이 갖고 있는 장애가 서로의 사랑에서 방해물이었나?’라는 질문까지 낳게 한다. 장애를 없애는 것으로 드라마의 갈등을 해결하고 클라이막스로 이끌려는 시도는 너무나 진부하다. 그나마 희미하게 대리만족이라도 느낄 수 있었을지 모르는 장애우들의 입장에서 봐도 채널을 돌리고 싶게 만드는 이유를 제공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랑, 드라마판 <그들이 너를 보는 방법>을 꿈꾸는 것은 무리일까.

글 황지희 객원기자

 

작성자황지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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