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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은 한없이 깊고 희망은 짧은 물결일 뿐입니다

[이영문의 영화읽기]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희미한 행복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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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달에 특별한 강의를 두번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영화를 통한 삶 엿보기" 정도 되는 강의였는데 쉼터에 살고 계시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성공회 나눔의 집이 인문사회강좌를 시도한 것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상호교감이 오가는 강의를 통해 삶에 대한 동기부여를 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참 힘든 강의였다고 자평을 해봅니다. 그 힘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시선과 고유한 방식을 가슴 깊이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칼럼은 그때 그 분들과 다 하지 못했던 저의 이야기를 하는 장으로 활용될 것 같습니다.

제가 선정한 영화 중 하나는 2001년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이하 와이키키로 함축함)" 와 2000년도 브루스 패틀로우 감독의 "듀엣(duets)" 이었습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면 음악이 영화의 주제로 활용된다는 것이고 주인공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노숙인들의 삶을 영화로 반영시켜보자는 의도로 선정한 것이지만 두 영화는 모두 우리네 삶의 녹녹치 않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지면 관계로 이번 칼럼은 "와이키키"를 중심으로 연재하려고 합니다. "듀엣"은 미국판 와이키키라고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물론 한국에는 개봉조차 못한 영화지요.

임순례 감독은 현 세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감독입니다. 그녀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와이키키"는 2001년 개봉당시 조기 종영에 대한 팬들의 항의로 인해 제작사인 명필름이 다시 영화관과 계약 임대후 재개봉한 우리 영화사상 처음 있는 팬들의 반란으로 기억되는 영화입니다. 그만큼 중독성을 지닌 영화인 셈입니다. 저도 이 영화를 10번 쯤 봤으니까요.

그러나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랑 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집니다. "존재가 사유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이번에도 유효합니다.

음악이 좋아 고등학교 때부터 그룹밴드를 시작한 주인공 성우(이얼 분)는 20년이 지나도록 중년나이트 클럽에서 불륜남녀들의 불루스 음악을 연주하거나 미인대회 행사장의 들러리 음악 혹은 회갑잔치의 가라오케 밴드로 전락한 3류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살아갑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와이키키 해변에서 세계적 연주를 하자는 친구들의 어릴 적 꿈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늘씬한 비키니 차림의 여인들이 자본의 거대한 침식과 달콤함으로 치부된다면 성우의 꿈은 비키니 뒤 화면에서 플래쉬백으로 보여지는 10대의 추억거리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는 밴드의 와해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도 자신의 음악을 지켜가려고 노력합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 달리 선택의 길이 없어 보입니다.

임순례 감독이 설정한 플롯은 정확하게 한국 사회가 현재 떠맡고 있는 중년 남성의 무력함과 패배,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연민입니다.
삶이 고단한 것은 청소년이나 20대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에게는 매일 싸워야할 주제가 있고 싸움에 대한 목표가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마초적 남성관이 사라진 중년의 남성에게 진정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중년사회가 패배감을 주는 이유는 하루하루의 싸움이 치열할수록 더 이상 젊은 날의 초상만큼 싸울 가치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을 위로하는 하루하루가 버거울 뿐입니다.

많은 한국의 영화들이 여전히 마초적 남성관을 주제로 생존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비해 "와이키키"는 너무 무기력합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성우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공식 해산을 이야기합니다. 마초적 남성상의 항복과 무기력을 선언하면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아가는 너는 행복하니?"라는 유명한 대사 속에서도 어디 하나 희망이 묻어나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임순례 감독은 마초적 남성상에 대한 무기력한 연민만을 보내는 감상주의자일까요?

‘아니다 그렇지 않다’(김광규 시인의 시집 제목을 잠시 도용하면서 강한 부정을 해보았습니다).

임순례의 영화언어는 은유적이며 우리 삶에 정치의 도구가 드리우는 것을 배제하고 세대간의 역할과 연대의식, 남성과 여성이 함께 희망나누기를 담고 있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쓸쓸하게 노년을 맞는 우 선생은 성우의 미래로 평가될 수 있지만 성우는 그를 보담으며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어갑니다. 환경문제와 공무원 비리 등의 정치적 파장이 영화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어느 것도 절망의 성우를 흔들지 못합니다.

다만 오래전 사랑의 대상이던 인희(오지혜 분)가 전라도 땅 끝자락에 있는 한물간 항구도시 여수에서 새롭게 와이키키 밴드의 일원이 되는 마지막 엔딩 크레딧이 마초적 남성들의 무기력감을 일깨울 소재로 나타납니다.

여성과의 연대. 새로운 파트너쉽의 등장은 왜 이 영화의 엔딩이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로 귀결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영화 도입부의 절망은 깊지만 마지막 엔딩은 짧은 희망의 메시지로 끝납니다. 참으로 절묘한 시컨싱의 조화입니다.

높은 곳을 향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희망입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매일 행복의 꿈을 꿉니다.

연일 신문에서 보도되는 비리게이트와 무차별 신자유주의적 폭력 앞에 제대로 된 항변 한 마디 못하고 사는 우리네 현실은 희망조차도 없는 비참한 삶으로 느껴지겠지만 민중들의 대답은 언제나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불륜남녀들이 모이는 삼류 나이트 클럽의 무대연주를 하며 살아가지만 다시 출발하는 세 남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여유롭습니다. 현실이 배고프고 힘들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며 우리의 삶을 네 박자 트로트에 통합시키며 평범한 민중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일깨워줍니다.

하는 일이 잘 안 풀린다고 걱정하거나 사람에 대해 실망했거나 열심히 살아가는데도 삶이 자신을 속인다고 하소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는 이 영화를 권합니다. 결코 잘 나가고 출세할 때 이 영화를 보시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또한 모든 삶의 주체는 결국 우리들이고 행복과 희망을 언제나 느끼며 살아갈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것도 받아드리도록 권합니다.
어차피 산다는 것은 길고 긴 지루함과 짧디 짧은 행복과 희망의 교차점들이 연속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글을 빌어 이 땅의 노숙인들이 작은 희망이라도 움켜쥐고 사시는 용기가 생겨나기를 기대해 봅니다.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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