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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문의 영화읽기] "여자, 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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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부터 꼭 글로 표현하고 싶은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주제는 담백해야하며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가해자격인 남성에 대한 편견이 없는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저의 강박관념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달을 쉬고 이번에는 마음속에 묵혔던 그 영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여전히 남성적 카리스마(유능해지고, 일 잘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집착하는 저의 삶과 정반대되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여자, 정혜"는 그런 평범한 일상에 대한 영화입니다. 우체국 직원으로 1년 365일 똑같은 장소에 출근하고 혼자 살아가고 있고, 재미있는 일은 하나도 없이 과거 성폭행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자, 정혜라는 평범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든 촬영은 100% 핸드헬드에 의해 정혜의 일상을 쫓아가고 인공적인 음악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처럼 배제되어 있습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하기까지 한 영화임에 틀림없습니다. 줄거리도 뚜렷하지 않습니다. 정혜라는 한 여자를 통해 그녀의 일상이 자세하게 묘사되는 지루한 내용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무색의 빛깔과 무취의 향기를 풍겨줍니다. 오랫동안 여운이 내려앉는 보기 드문 영화입니다.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된 이유는 아마 그런 것입니다. 

만일 이 영화를 정신과 의사에게 보여주면 정혜(김지수 분)는 우울증으로 진단이 되고 여성학자들에게 보여주면 성폭행의 희생자로 그려질 것입니다. 또한 20대 관객들에게는 정혜가 갈구하는 사랑에 대한 희망으로(마침 상대 남자로 황정민이 나옵니다) 이 영화를 평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평범한 우리 주변의 아는 여자 혹은 이름을 들으면 "걔는 뭐하냐, 왜 동창회는 안나와" 라며 우리의 주제를 가볍게 넘어가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영화를 프랑스 철학자인 "장 그루니에"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수필집인 "섬"에 나오는 고양이 물루를 통해 그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여자, 정혜"에 나오는 고양이는 바로 정혜의 모습이고 그 정혜의 모습에서 저는 자연스럽게 고양이 물루에 대한 상상을 했습니다.

"여자, 정혜"에는 몇 가지 대목에 고양이와 정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령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황정민)에게 저녁을 초대하고 그 초대의 이유를 길 잃은 고양이가 집에 있으니 보여주겠다는 그런 것입니다. 행동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의사소통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은 이는 사람에게 다가가기가 두렵습니다.

 

사람을 싫어하는 이들과 이기주의자들은 고양이를 좋아합니다. 일상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행동인들은 고양이를 좋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로 하여금 최후를 기다리는 동안 인내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만족스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장 그루니에는 상처받은 고양이 물루를 안락사 시키는 과정을 그의 어머니와 함께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정혜 또한 일상의 먼지들을 매우 치밀하게 청소합니다. 고양이가 걱정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집에 다니러 가는 평범함과 부질없음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제 정신으로 비쳐지지 않습니다. 고양이를 마지막 시퀀스에서 풀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을 다시 사랑하는 법을 정혜는 이제 배운 모양입니다. 힘들어도 외로워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존재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자 종착역이라는 당연한 답을 이 영화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황정민과의 사랑이 다시 시작할 것인가, 우체국 직원을 그만둘 것인가 하는 문제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저 정혜는 여자, 정혜일 뿐입니다.

장 그루니에는 "섬"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어떤 도시를, 어떤 짐승을 사랑하는 것과 어떤 여자를, 어떤 친구를 사랑하는 것. 우리는 머릿속으로는 이런 것을 서로 구별하려고 애쓰고, 마음속으로는 이런 것이 다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삶은 이러한 자질구레한 것들이 조화롭게 연결되어 있는 실타레와도 같습니다. 오늘 의미가 있는 일이 내일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확신 없이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왜 매일 똑같은 주기도문과 반야심경을 외우는 것일까요? 삶은 작은 것들의 반복에 의존할 뿐입니다.

우리가 어느 누구를 사랑하든지 대뇌일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지극히 평범한 언어입니다. "여자, 정혜"는 이러한 일상의 반복과 평범함속에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조용하게 보여줍니다.

가끔 일상이 힘든 이에게 이 영화를 권합니다. 정혜가 혼자 울 수 있듯이 풀처럼 고개를 숙이고 우리의 존재를 일깨우는 힘든 일을 반복하시기 바랍니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김지수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압권입니다. 보기 드문 배우 한 명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얻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작성자이영문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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