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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지민의 테마에세이] 오늘도 난 무언가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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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한 편을 적는 데는 거의 반 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다. 그 기간 동안에는 온통 그 작업 안에만 몰입되어 있기에,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을 둘 수가 없다. 또한 관심도 없다. 오로지 하루의 시작과 끝은 작품 내용과 구성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심지어 꿈속에서까지도 주인공들과 논쟁을 벌이며 탈진하기가 일쑤이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내가 앉아 있던 작업 공간은 거의 난장판이 된다. 그때서야 난장판이라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이렇게 지저분하게 어지럽혀진 공간에서 작업을 했다니, 이런 세상에…….
일간지를 꼼꼼히 정독한 뒤 필요 부분을 스크랩하기 위해 오려 놓았던 조각들이 책상과 책장 구석에 가득하다. A4용지 사이사이에 담배꽁초가, 참고하고자 꺼냈던 갖가지 서적들은 바닥에 가득 뒹굴고, 내용을 알 수 없는 메모도 끊임없이 쏟아진다. 이게 누구 전화번호인지, 이 이름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르는 쪽지들을 붙잡고 한참 끙끙대다가 결국엔 휴지통에 버리고 만다. 도무지 당사자를 떠올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매번 반복되는 방 정리에 지쳤기에, 올해 들어선 모진 다짐을 한 가지 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정리되지 않는 채로 방관되는 내 공간을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이었다. 생각만으로 머물렀던 계획을 실천하고자, 십여 일 동안 실내 전체를 뒤집어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들을 가려내는 중노동에 매달렸다. 늘 시선에는 들어오지만 무심코 지나치기만 했던 물건부터 과감하게 손을 댔다.
책꽂이 위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두 개의 디스켓 케이스가 첫 번째 타깃이 되었다. 우리가 ‘플로피 5.25인치 디스켓’이라 부르던 검고 얇은 디스켓이 수십 개나 담겨져 있었다.
갑자기 시간이 정지되는 느낌에 잠긴 채, 스티커로 분류되어 있던 내용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노트북으로 옮겨지기 이전의 286컴퓨터에 사용되던 디스켓……. 이미 그 디스켓을 사용할 제품마저 사라져 버린 지금, 스티커 위에 ‘영구보존’이라 적혀진 5.25인치들은 시간의 덧없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CD플레이어도 몇 년 내로 사라질 거라는데, 지금 컴퓨터에 주로 사용되는 3.5인치 디스켓도 곧 골동품이 될 거라는데 이 5.25인치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한참 고민해야 했다. 버릴 것인가, 아니면 기념으로 보관해야 될 것인가……. 결론은 버리자는 쪽으로 내려졌다. 어차피 이사갈 때나 짐을 정리할 때마다 똑같은 고민을 반복할 게 분명하다면, 깨끗하게 버리는 편이 속시원한 일이라고 내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이어 책장 아래 가득 채워진 옛 잡지들을 모두 꺼냈다. 언젠가는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리라 기대하며, 이사할 때마다 들고 다녔던 잡지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다음 이사갈 때에도 똑같은 생각으로 가져 가야 한다면, 그리하여 또 다시 언젠가는 필요가치가 있으리라며 똑같이 쌓아두어야만 할까? 결론은 역시 깨끗하게 버리자는 쪽으로 정리됐다. ‘애틀랜타 올림픽 폭탄 테러’, ‘15대 대선 레이스 시작’, 또한 이미 중견이 된 이들이 갓 데뷔하던 시절의 기사들은 더 이상 내게 필요 없는 일이었다.
개수를 헤아리지도 못했던 카세트테이프도 모두 들어냈다. 천 개가 훨씬 넘는 분량이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끊어지도록 듣고 또 듣던, 베이스기타의 묵직한 음감은 더 이상 듣지도 못할 만치 낡아버린 테이프들이 대부분이었다. CD마저 사라질 판에 테이프를 가지고 있어서 뭘 하겠단 말인가. 하지만 테이프만큼은 일단 보관하기로 했다. 천천히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타협안이 마음 어딘가에서 제시됐기 때문이다. 하긴 모든 걸 단번에 버릴 수는 없겠지. 세상일이라는 게 대개 그러하듯이.누군지도 생각나지 않는 수북한 명함들, 헤아리기도 벅찬 사진 필름들, 손을 쓸 엄두도 나지 않는 수천 장의 악보들, 일손을 잠시 멈추게 만드는 옛 편지들의 사연, 생각없이 쌓아두었던 갖가지 술병들, 유효기간이 끝나버린 서적들, 바닥 가득한 전선들까지 모두가 먼지와 함께 제 자리를 찾아갔다. 내 공간의 평수가 두 배로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내 공간의 절반은 정리되지 않은 폐기물로 쌓여 있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작업을 마친 내 자리는 그야말로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분위기로 정리가 됐다. 그래도 끊이지 않고 튀어나오는 옛 기록들, 옛 사진들, 옛 흔적들은 내게 하루하루의 또 다른 노동을 요구하고 있었다.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 짓는 과정 자체가, 지나간 어제를 떠올리며 정리해야 할 시간으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씻고 났을 때의 개운함, 단정히 머리를 잘랐을 때, 또한 속절없이 자라난 손톱을 깎을 때의 느낌과도 같이, 소유물들의 대부분은 육신의 먼지와 같은 내 존재의 때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진정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그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경험을 나는 내 공간 정리를 통해 배웠다. 실내가 두 배로 커졌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 머리와 마음 속에도 절반만큼의 쓰레기가 담겨 있으리라는, 그것이 쓰레기였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똑같은 나날을 생존하고 있었다는 현실…….
사사로운 미련에 나를 담아두지 않기로 했다. 버린 만큼 새로운 것이 채워질 거라는, 포기하는 만큼 무언가가 소유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는 것으로, 아니 그 기대마저 접어두는 것으로 올 한해를 살아가기로 했다. 생각보다 느린 발걸음이라 해도 더 빨리 뛸 수 있는 내일이 남아 있으리라 믿으며, 어제와 다른 오늘을 설계하고 실천해 보려는 것이다. ‘천천히 서두르라’는, 언제나 가슴 언저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는 누군가의 잠언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것으로 오늘의 벽돌을 한 장씩 쌓아가고자 다짐한다.
생각을 잠시 돌이켜 본다. 길지도 짧지도 않았던 지난 날들, 그 순간 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어디에서 어떤 생존을 이어 왔던 것일까. 너무도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잃은 채로 똑같은 과오를 되밟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살아야 했던, 내가 꿈꿔 왔던 인생이 이것이었을까. 이게 맞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내일을 열어가야 하는 것일까. 먼 훗날 언젠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내 모든 게 잘못된 것이었다고 인생 자체를 후회하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까…….
너무 많은 생각과 미련에 휩싸인 채로 살아왔다는 점을 이젠 인정하고 싶다. ‘그게 아니었는데, 이게 아니었는데’라며 늘 반복하던 한숨을 똑같이 내쉬고 있었다는 점까지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버릴 것을 찾아 이젠 모두를 버려야만 한다. 지금의 내겐 보물인지 모르지만, ‘영구보존’이라는 구호가 몇 년만에 사용 불가능으로 폐기되고 마는 현실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을 적고 있는 이 순간의 아집마저도 버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올해의 계획을 세울 때마다 매년 등장하던 똑같은 문구들을 미련없이 삭제해 버렸다. 진정 내게 필요했다면 이렇게까지 실천하지 않고 방관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똑같은 계획을 버릇처럼 적어놓던 문장들, 그 무게의 허망함에 눌려 매번 자포자기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본다. 거대한 계획 자체에 만족해 버리고 그 내용의 네온사인 같은 반짝임에 스스로가 현혹되지는 않았는지, 결과 보단 눈앞의 껍데기에 우선하지 않았던지, 내 마음의 IMF는 이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게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다.
수신(修身)도 못하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만 외친다며 남들을 비난하던 나 자신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반성해야 할 일이다. 거울 속 자신의 눈빛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서, 남들의 티눈만 찾아다녔던 건 아니었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진정으로 빈 가슴을 내리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칠 수 있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내 공간과 내 마음의 거울부터 닦아내야 할 일이다.
절반을 버리고 난 다음에 남겨진 절반마저도 진정한 내 소유가 아님을, 그것이 엄연한 현실임을 마음에 새겨 두고자 한다. 오랜 시간 꿈꾸며 간직해 오던 희망의 세상을 무너뜨린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음을, 누구에게도 탓을 돌릴 수 없다는 점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모두를 허물고 모든 걸 버려야 하는 일이다. 길바닥에다 생각없이 집어던지는 휴지나 담배꽁초처럼,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버려지고 있는 스스로의 인생과 시간의 참의미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늘도 우리는 진정 버려야 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버리고 또 버려야 할 일이다.
계절이 또 다시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기 혼자만 모르고 있는 한가운데에서, 세상은 이미 우리가 모르는 저편을 향해 힘껏 뜀박질치고 있는 중이다.

글/ 채지민

작성자채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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