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터 소년과의 부질없는 약속 > 문화


낚시터 소년과의 부질없는 약속

[주제가 있는 이야기 2] 이 가을에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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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낚시에서 아주 손을 놓았지만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나는 짜투리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낚시터를 찾고는 했다. 고기를 낚는데 욕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삭막한 도시생활에 찌든 심신을 조용하고 한적한 저수지나 강변에 방기하다 보면 자연스레 자연과 합일을 이룰 수가 있기 때문이다.
  수면위로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조금 내민 찌를 미동도 않고 끈질기게 응시하다 보면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사유를 넘어 결국엔 삶에 대한 자기응시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그 고독과 만나게 된다. 특히 여명직전의 물안개가 햇귀(해가 처음 솟을때의 빛 편집자주)에 의해 수면위로 번져나가는 그 정적을 사랑했었다. 그 뒤 낚시터에서 조차 버리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과 번잡과 무질서에서 오는 쓰레기공해등을 이유로 낚시에 흥미를 잃고 말았지만 지금도 일상에서의 짜증스러움과 맞닥뜨리게 될 때면 생각은 어김없이 강심으로 날아가곤 한다.
  그리고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이름모를 소년하나. 그애와의 만남은 지평리넘어 산속의 작은 저수지였다. 몇 채 안돼 보이는 인가마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저수지에는 낚시꾼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일용잡화를 파는 조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고 그 소년은 차에서 내리는 우리 일행을 한여름 햇볕에 잘 그을린 가무잡잡한 얼굴로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저수지 주변은 온통 산과 옥수수밭 뿐이었고 전기마저도 겨우 들어오는듯 그 흔한 TV안테나 하나 변변이 볼 수 없는 오지였다.
 그나마 저수지를 찾아오는 도시의 낚시꾼이 없다면 외지의 문화를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조그만 잡화상마저도 불필요할 것 같아 보였다.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내 주변을 서성이며 낚시꾼들이 버리고 간 라면봉지나 과자껍질들을 주어모으며 내게 친밀감을 표시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세히 보니 그애는 언제부터 입었는지 땟국물이 묻어날 듯 싶은 런닝셔츠와 헐렁한 바지에 한쪽 다리마저 온전치 못한 장애우였다. 나도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싶어 조금 안스러워 보였지만 굳이 안시켜도 될 심부름을 시켰다. “얘, 너 저 가게에 가서 담배 좀 사다줄래? 잔돈 남는 것은 네가 갖고...” 소년은 절룩거리는 다리로 쏜살같이 달려가 담배를 사왔고 그 뒤로도 내 낚시를 거들며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해주곤 했다.
  수줍어하며 별 말이 없는 소년은 아마 내개서 도시의 낯선 문화냄새를 맡았던 것 같았다. 지방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가려고 해도 그 소년의 걸음으로는 30여분은 족히 걸릴 거리이고 보면 관광버스나 자가용에서 내린 한가롭고 여유있어 보이는 낚시꾼들이야 말로 소년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낚시터는 막연한 희망과 꿈을 제공해주는 유일한 장소였으리라  생각된다 나는 긴 여름해가 꼬리를 감출 무렵 소년과 헤어지면서 서울에서부터 갖고 갔던 기호식품 몇 개와 지폐 몇장을 쥐어 주며 부질없는 말을 남겼다. “다음에 또 올께!”
  말없이 희마하게 웃기만 하던 소년은 한참을 우리가 탄 버스를 쫓아오다 그만 어둠속으로 묻혀 버렸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도 한가한 시간, 지난 일들을 의미없이 반추할 때 간혹 그 소년과의 짧은 만남이 삽화처럼 떠오른다.
  그럴때면 나는 심한 부끄러움에 빠져들곤 한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온통 산과 옥수수밭과 땡볕과 저수지와 잡화상이 전부였던 그 소년에게 그때 내가 풍기고 떠난 이질스러운 문화의 냄새는 도시의 낚시꾼들이 함부로 버리고 간 쓰레기의 잔해처럼 부질없는 희망이나 기약없는 꿈만을 심어준 것이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

 

글/ 김형배 (만화가, 현 한겨레출판학교 강사)

작성자김형배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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