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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정희수

[주제가 있는 이야기 4] 이 가을에 생가나는 사람

본문

  벌써 그렇게 됐나?
  길가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고 바람이 서늘해지면서 책상 서랍 한 귀퉁이에 접어 놓은채 잊고 있었던 많은 그리움, 그리고 오늘 문득 떠오르는 그사람 정희수.
  신길동 산동네, 가파른 언덕길 너머 한 구석에서 유배지로 내쫓긴 장수처럼 그렇게 으르렁거리던 희수형이 우리 곁을 떠난지 어느덧 네 해가 넘었다.
  늘 깡소주에 분노를 안주삼고는 주체하지 못하는 주사에 온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세상 바깥으로만 빙빙돌던 그 사람, 정희수.
  세월이 약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둥글고, 무디게 해주는 것인가. 희수형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쯤인지 아무리 되짚어 올라가도 신길동 언저리에서 맴을 돌 뿐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찌 어찌해서 알게 된 희수형의 첫인상은 깡마르고 꺼칠한 머리, 움푹 드리워진 눈가의 그늘, 수시로 튀어나오는 육두문자에 종잡을 수 없는 낄낄댐, 그리고 가파르기만한 자존심에 비틀거리는 몸을 기댄채 끝없이 마셔대던 술, 그래 우리 만남은 그렇게 이상하게 꼬이고 또 꼬였었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매월 애하나씩 낳듯 힘겹게 만들어 낸 ⌜함께걸음⌟을 떠나 보내고 나면 뒤이어 들이닥치는 전화.
“야, 임마. 이걸 책이라고 만들었니. 너 정신이 있어, 없어..”
  밑도 끝도 없이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서야 “내 얘기좀 잘 들어봐라..” 스스로 분을 삭이며 하나하나 문제점을 짚어주곤 했다. 목차에서부터 심지어 광고까지 집요하게 매달린 교정덕에 되돌아온 책은 언제나 시뻘겋게 물들어 책만큼이나 우리 얼굴도 달아오르곤 했다.
  “나 택시비가 없어서 못나가니깐 늬들이 좀 올래?”++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신길동 그 골짜리로 우리를 끌어들이고는 일본 사는 누이가 놓고 갔다는 전기불고기판에 하나 가득 고기를 볶아주면서 흐뭇하게 웃곤 했었지.
  그 시절 우리는 만나서 무엇을 했던가.
  우리는 그저 벽을 등에 진채 멍하니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거나, 누렇게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보거나 그도 아니면 바둑을 두면서 정치를 씹고, 문학을 씹고, 정 씹을게 없으면 우리 스스로를 씹었다.
  남들이 자신을 ‘병신’이라고 부르는게 얼마나 그의 삶에 깊고,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로 남았는지는 그만이 알 일이지만 그토록 보장구를 권하고, “자동차 한대만 있으면 인생이 달라질거야”라면서 유혹을 했음에도 번번히 거절한 이유는 또 뭘까.
  그에게 ‘장애’는 늘 증오의 대상이면서도 도 때로는 무슨 훈장이나 되는 것처럼 푸릇푸릇 이끼가 끼면 다시 꺼내 반짝반짝하게 닦아 내던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한계령⌟이라는 시구에서 죽으려고 달려가다 마주친 산에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나 이제부터 다시 살란다”고 선언해 우리를 놀라게 했던 그사람, 정희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서울,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았으면서도 이틀이 지나서야 주검을 발견했다는 이웃집 아저씨 말에 소름이 돋도록 단절된 우리 사이의 ‘벽’을 실감하기도 했지.
  그후, 아주 가끔씩 어둠속 저 멀리서 탁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당신 자식의 ⌜유고집⌟ 소식을 묻던 어머니마저 “당분간, 아니 아주 오래 못볼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그사람, 정희수는 그렇게 어둠속으로 가라 앉고 말았지.
  이 가을, 서늘한 바람에 우수수 황금빛 이파리를 쏟아내는 은행나무는 어제까지 한 몸이었던 이파리들을 보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다가올 겨울, 매서운 추위와 싸우기 위해 말없이 생명의 순환을 준비하는 저 나무들처럼 형과 나 우리도 돌고 돌아 그 어느날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글/ 전흥윤 (김한길 의원 보좌관, 함께걸음 전 편집부장)

작성자전흥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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