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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남도답사 그리고 "머피의 법칙"

[주제가 있는 이야기] ③ 올해 가장 가슴 찡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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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지리산 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학시절의 단짝 친구와 8년만에 처음으로 여행스케줄이 많아 떨어진 순간이었다.  설레는 가슴을 가라 앉히고 옷장 속 깊이 묻어두었던 빛바랜 청바지와 닳아빠진 과 티셔츠까지 챙겼다. 그리고는 무작정 전라선 심야 열차에 몸을 실었다. ‘노찾사’의 <지리산>을 흥얼거리면서...
  새벽 5시, 지리산 화엄사엔 장대비가 내렸다. 비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처마 밑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어느새 눈꺼풀이 눈두덩을 덮고 코까지 곯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 기도를 나섰던 보살님네들이 ‘남의 속도 모르고’ 선문답을 던진다.
  “추운데서 참선을 하시는군요”.
  가랑비를 딛고 올라선 노고단 입구. 구름은 발밑까지 축축히 파고 들었다. 점심도 거른채 반야봉쪽으로 발길을 돌려세우기 무섭게 ‘빨갱이’보다도 더 시뻘건 간판이 막아선다.
  ‘산림보호기간, 입산금지’
  꿩이 아니면 닭이었다. 우리는 이병주의 「지리산」을 버리고 조정래의 「태백 산맥」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외서댁과 죽산댁이 꼬막을 캐던 보성만뻘에도 라면봉지는 어김없이 휘날렸다. 해변가에서 별장을 꾸미는 목수들의 손놀림도 바쁘기만 했다. 소설속의 ‘해방구’인 율어면 촌구석에서도 노래방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조정래는 내년쯤 ‘개발독재의 쌍두마차’인 박정희와 박태준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소설을 쓰겠다고 한다. 시대와의 ‘간통’을 저지르겠다는 선언이리라.
  보성당에서 들이킨 ;보해소주‘는 왜 그리도 쓰던지.
  내친 김에 유홍준 선생이 ‘문화유산 1번지’라고 추켜 세운 남도당 심장부로 깊숙이 들어섰다. 강진땅 구석에 처박힌 김영랑 시인의 생가. 전기톱 소리에 신경이 거슬리더니 인부들의 손놀림은 노가다판을 방불케했다. 자신없으면 그대로나 둘 일이지. 멀쩡한 생가를 신식으로 뜯어 고치려는 속뜻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해남땅 땅끝마을, 전망대를 지나 420m에 달하는 돌계단을 내려가면 그곳이 한반도의 최남단이다.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백 26도 06분 01초.
  한강다리나 고속전철을 놓을 때도 이렇게 원칙을 지켰으면 오죽 좋으련만, 탑 끝에 비수처럼 꽂아놓은 피뢰침은 어찌된 영문인지 구부러진 채 흉물이 된 지 오래다. 땅끝에서부터 조선땅은 제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목포와 무안땅을 돌아 빛고을 광주로 간다. 17년만에 새옷으로 갈아입었다는 망월동 5‧18묘역, 누군가‘ 박제화된 혁명은 초라하다’고 말했던가, 수유리 4‧19탑 보다도 더 짜증스러운 조형물이 답답한 자태로 서있다. 곳곳에 물이 새고 벽이 갈라진 부실공사 후유증. 소풍 나온 유치원생과 효도관광차 다녀가는 노인들의 어설픈 기념촬영. 다리품을 팔고 나온 인솔자조차 “왜 이런 곳을 코스에 넣었어”라며 투덜거린다.
  지리산에서 시작해 망월동까지 1천3백리에 달하는 남도 답사를 마무리할 시간이다. 20대의 끄트머리에서 스무살 청년의 마음가짐으로 되돌아 가보고자 햇던 우리들의 바람은 어지럽게 구겨졌다. 광주터미널을 벗어나 친구와 이별을 고하는 순간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토막이 주마등처럼 스친 것은 지나친 감상이었을까.
  아마도 시민군 출신 조직폭력배 박태수가 계엄군 출신 친구인 강우석 검사에게 던진 말일 듯하다.
  “그 다음에 무엇을 했는데‧ ‧ ‧. 중요한 건 그 다음부터야.”
  우등고속버스에 오르자 밀물처럼 습관처럼 카세트 스위치를 누르자 귀에 익은 가락이 들려온다. 이젠 늘어질대로 늘어져 타령조가 돼버린, 요즘엔 CD로만 나온다는 정태춘의 노래였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내일은 임철우가 발표한 소설 ‘봄날’을 사야겠다.

 

글/ 육성철 (일요신문 기자)

작성자육성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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