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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찐 남자, 살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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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하순의 초가을. 출근을 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선미의 머릿결을 희롱하고 있는 바람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선미의 마음은 오후에 있을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꽉 차 있어서 그 부드러운 바람의 희롱을 음미할 여유가 없었다.

 어떤 사람일까의 기대보다는... 설렘. 1년 가까이 작품을 통해서만 교류하다가 이제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 언제부터인가 선미의 가슴에 가장 큰 넓이의 집을 가지고 있는 남자. 문규를 오늘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머리도 새로 다듬고 오늘은 옷에도 신경을 썼었다.

 그때 회사로 가는 시내버스가 와 닿았다. 선미는 버스 입구를 탄력적으로 밟아 올라갔다.

 같은 시간대에 버스 출근을 하면서 알게 된 낯익은 얼굴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면서 운전기사 뒤쪽의, 좀은 낯익은 자기 또래의 여자가 앉은 자리로 가서 핸드백을 맡기고 그 옆에 섰다. 이미 빈자리는 없었다. 이윽고 차가 달리자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선미의 기분 좋음을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은 어떤 사람들이 탔나 싶어 버스 내부를 쭉 둘러보던 선미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무는 것과 동시에 인상을 구겼다. 언제나처럼 승강기 쪽의 자리에 살찐 남자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선미는 살이 찐 사람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사람들 틈에 끼이는 것도 거부했다. 그것은 선미 자신이 160cm도 채 안되는 키에 50kg을 훨씬 넘는 몸무게를 가진 꽃돼지여서였다.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다. 자기 혼자 있을 때보다 살찐 사람이 더 있음으로 해서 자기가 부각되는 것이 싫은 거였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회사가 6개월 전에 이주를 하면서부터 버스 통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날부터 이 살찐 남자를 보고 기분 잡쳤던 기억이 났다. 혐오스럽게 디룩디룩 찐 것은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람들보다는 부풀어 보이는, 하지만 누구나 살쪘다는 사실에는 반대하지 않을 그런 살찜을 가진 살찐 남자는, 버스 속에서 특이한 행동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나이가 많거나 몸이 불편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자리를 양보해 주는 거였다. 타고난 예의범절인지 투철한 경로사상인지 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많을 때는 앉아 있는 젊은이들까지 강제로 일어서게 하였다.

 한번은 선미도 운 좋게 자리에 앉아 가다가 살찐 남자의 강요에 늙수그레한 할머니한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서 누구나 속으로는 원망을 해도 대놓고 따지지는 못했다. 그것도 좋은 일 하자는 데야. 하지만 살찐 남자의 자리 양보는 순 한국적인 장유유서일 뿐 서양의 기사도 정신이나 레이디퍼스트 같은 예의는 아예 아니었다. 오늘은 아직 살찐 남자의 먹이감이 나타나지 않았는지 살찐 남자는 출구 뒤편의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선미는 못 볼 곳을 본 듯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문규 생각을 했다. 다니는 회사의 사보 객원기자로 참여하고 있는 선미는 아직도 꿈을 꾸는 문학 소녀였다. 그래서 사내의 문학 동아리에 참여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늦가을 ㅇㅇ물산의 사보 팀장이 선미 회사의 사보 팀장을 만나러 왔다가 자기 회사에도 문학 동아리가 있다면서, 서로 교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으면서 선미가 속한 ‘산바람’과 ㅇㅇ물산의 ‘강바람’간에 문학 교류가 있게 되었다. 산바람과 강바람은 회원 모두가 시를 쓰고 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바람은 모두 다 여자인 반면 강바람은 모두가 남자였다.

 어떻게 보면 아주 궁합이 잘 맞는 만남이었다. 양 사보 팀장끼리 중간에서 결정한 교류방법은 서로 간 얼굴을 맞대지 말고 순수하게 작품만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남녀가 만나면 사랑에 빠지거나 편견을 가지게 되어서 올바른 문학적인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매달 한 사람씩 3편 이내로 쓴 것을 모아서 우편으로 양쪽에서 같은 날짜에 부치면 그것을 서로가 읽어보고 다음 달에 다시 원고를 보낼 때 전번에 본 상대편의 시의 감상문을 함께 적어서 보내는 방식으로 하였는데, 일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그 일은 한번도 중단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 가량 작품을 주고 받으면서 선미에게 특별함으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문규였다. 솔직히 말하면 문규보다는 문규의 글이었을 것이다. 선미는 그의 시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주로 사랑의 시인데도, 서점가에 깔린 알롱달롱한 표지로 치장된 그런 류의 것들과는 다른, 수십 번은 속으로 삭이고 삭인 후 절제된 감정으로 쓴 사랑의 시, 어쩌면 과거 완료형이기 보다는 현재진행형일 것만 같은 사랑... 그래서 문규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한편으론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그런 시를 그렇게 아름답게 쓴다는 하나만으로 선미에게는 중요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꼭 만나보고 싶었다. 만나서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중인지, 사랑을 하면 그런 시를 쓸 수 있는 지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 쪽 사보실로 전화를 해서 문규의 부서와 전화번호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미는 그런 몰상식이 싫었다. 우연이 연출된, 문학적으로 만나고 싶었다. 영원히 만나지 못해도 언젠가는 만나지리라는 기다림에 살아도 좋을 그런 만남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그 만남의 기회는 온 것이다. 이제 교류한 지 1년 가량 되었으니 서로의 문학에 대한 이해도 알만큼 알게 되었으며, 사람을 본다고 해서 선입견같은 것을 가지지 않을 것도 같고 해서 한 번쯤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을 한다면서, 시화전을 열게 된 강바람이 오늘 오후 3시에 전시회장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산바람에게 해온 거였다.

 토요일 오전 근무는 후다닥 지나가고, 선미는 산바람에 휩쓸려 점심을 먹은 후 꽃집으로 갔다. 가격 5천원으로 통일하여 아무 꽃이든 개성에 따라 살 수 있었는데, 선미는 장미꽃에다가 안개꽃을 둘렀다.

 자기가 산 꽃이 누구에게 안길지는 몰라도 무작정 장미가 좋았다. 오후 3시 정각에 축하 화분이 듬성듬성 서 있는 전시실로 산바람은 들어섰다. 출입구 앞에다가 방명록을 펼쳐 놓고 앉아 있던, 분명 강바람회원일 것 같은 남자가 일어서서 맞는다. 방명록에다가 산바람이, 산바람이라고 큼직하게 타이틀을 잡고 한사람 한사람씩 이름을 써내려 가자, 카운터는 전시회에 찾아온 사람들 곁에서 안내하고 있는 강바람들을 손짓해서 부른다.

 산바람과 강바람은 바람처럼 말없이 가볍게 악수를 나누었다. 1명은 시루떡을 찾으로 가서 아직 안 왔다면서 5명의 강바람은 산바람을 전시실 중앙에 길다랗게 놓여 있는 탁자 앞으로 산바람을 데리고 갔다. 선미는 그 중에 누가 문규인지 궁금했다. 탁자 위엔 정갈하게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음식을 들면서 바람들이 서로 간에 소개를 할 때 어깨 위에 과자 박스를 지고 들어와서는 탁자 위로 올려놓는 사람이 있었다.

 ‘토요일이라 차가 밀려서...’

 혼자말로 변명을 다는 사람을 보는 순간 선미는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버스 칸에서 매일 만나는 그 살찐 남자였다. 언제나 자신의 싸늘한 눈길로 바라보았던. 그런데 선미가 더 놀랄 일은 그 남자가 바로 문규라는 사실이었다. 선미의 머리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저런 살찐 몸으로 사랑의 시를 쓰고 또한 섬세하게 표현해 낼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가 선미는 사돈 남말한다는 생각이 풀썩 났다. 선미 자신도 꽃돼지면서 사랑의 시를  쓰고 섬세하고 치밀한 일을 오히려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이 상상하고 있었던 샤프하고 말라 보이는 그러면서 눈이 깊고 외로운 분위기가 묻어나는 타입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문규를 선미는 다시 한번 보았다. 정말로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의 타입이었다면 보기에는 좋아도 함부로 다가설 수는 없어 자기는 거리감을 느꼈으리라.

 한데 문규는 만만하게 보였다. 살찜이란 공통점도 있고, 오랫동안 보아왔던 터라 없던 친근감도 새삼 밀려들었다. 앞으로 출근 버스에서의 살찐 암수 두 돼지의 만남을 생각하며 선미는 입가로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글/ 김진균 (시인, 소설가)

작성자김진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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